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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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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축구는 국가였다

식민지 시대의 한풀이에서 시작돼 권력의 애국주의로 발전한 축구 역사, 이제 어디로 갈까
등록 2010-06-24 23:13 수정 2020-05-03 04:26
6월17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B조 한국-아르헨티나 경기 중 박지성이 아르헨티나의 미드필더인 하비에르 마스체라노의 방어를 피해 공을 차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6월17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B조 한국-아르헨티나 경기 중 박지성이 아르헨티나의 미드필더인 하비에르 마스체라노의 방어를 피해 공을 차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지난 시즌 우리나라 K리그 경기당 평균 관중 수는 1만1427명이었다. 일본 J리그의 1만9126명과 비교하면 절반에 가까운 수준이다.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경기당 평균 관중 3만4082명이나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2만8568명에 크게 못 미친다. 국가대표 경기로 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2006년 월드컵 당시 스위스의 일간지 는 “월드컵 응원에서는 한국이 강력한 우승 후보”라고 추어올렸다. 그만큼 국가대표팀 축구에 대해서는 극성이라는 얘기다. 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공을 다루는 11명의 남자를 응원하기 위해 같은 색의 옷을 입고 거리로 나설까? 한국 사람들의 DNA 속에는 축구가 어떤 모양으로 새겨져 있을까? 6개의 열쇳말을 통해 한국 축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조감해봤다.

식민지인의 ‘화풀이’

1921년 2월11~13일 서울 배재고보 운동장에서는 조선체육회 주최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가 개최됐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전국 단위 축구대회였다. 1882년 영국 군함 플라잉피시호의 선원들이 인천항 부두에서 한반도 최초의 축구 경기를 선보인 지 39년 만이었다. 대회 첫날 학생부 세 경기는 모두 기권으로 끝났다. 경기가 과열된 탓에 심판 판정 시비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우승팀도 가리지 못했다. 대회 이튿날 열린 배재구락부와 평양숭실구락부의 대결에서도 양팀 응원단 사이에 편싸움이 일어나 경기는 끝을 맺지 못했다. 일제시대 축구 경기는 종종 폭력으로 얼룩졌다.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열린 경평전은 그 절정이었다. 응원단끼리의 충돌은 다반사였다. 1933년 9월 서울 배재중학 운동장에서 열린 3회 대회에서는 밀려드는 관중을 막기 위해 주최 쪽에서 인분을 뿌리는 일까지 있었다. 대한축구협회 누리집은 “축구는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가슴에 쌓인 민족의 울분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청량제였고 독립의 희망을 키울 수 있는 싹이었다”라고 평가했다.

승부에 대한 강한 집착을 두고 우리나라 특유의 경쟁적 정서를 주목하는 시선도 있다.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민속학)는 “한국의 놀이구조는 집단적 틀로 나눠 경쟁하면서 노는 걸 좋아한다”며 “차전놀이나 줄다리기, 석전 등이 그런 예”라고 말했다. 대한축구협회 관계자가 전하는 일본축구협회의 한국 축구 분석도 흥미롭다. “한국 대표팀이 일본 대표팀보다 전통적으로 강한 이유를 분석해 두 가지 설명을 내놓았다. 첫째는 한국은 일본과 달리 이회택·차범근·황선홍과 같은 대형 스트라이커를 꾸준히 내놓았고, 둘째는 일본팀은 한국처럼 경기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정서가 적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와의 경기가 열린 6월17일 밤 서울광장에서 시민들이 아프리카 장단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아르헨티나와의 경기가 열린 6월17일 밤 서울광장에서 시민들이 아프리카 장단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라이벌, 일본

해방 이후 일본과 맞붙은 첫 경기는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지역 예선전이었다. 경기를 앞두고 대표팀에 전해진 “경기에서 지면 현해탄에 몸을 던지라”는 말은 유명하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 말로 일부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아니다. 당시 이유형 대표팀 감독이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한 말이었다. 대한축구협회장인 장택상도 “지면 현해탄을 넘어오지 말고 고기밥이 돼라”라고 조금 더 살벌하게 말했다. 누가 말했든, 당시 일반적인 정서는 그랬다. 1954년 3월1일 사설을 보면 “우리는 대표단원에게 새삼스럽게 필승을 기하라고 격려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며 “그것은 출정하는 군인에게 승리를 부탁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라고 기록돼 있다.

당시 승부에 대한 집착은 일본에 대한 열등감과도 맞닿아 있었다. 당시 일본팀을 국내에 들일 수 없다며 경기를 거부하던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한 논리는 “축구로 일본을 이겨보자”는 것이었다. 이기붕 부통령이 직접 나서서 대통령을 설득했다. 당시 대표팀 골키퍼였던 홍덕영은 “태극기가 일장기와 같은 높이에서 펄럭인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 국민에게는 대단한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1935년 6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경성축구단이 응원을 나온 동포들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경성축구단은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인물과사상사 제공

1935년 6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경성축구단이 응원을 나온 동포들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경성축구단은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인물과사상사 제공

이기거나 피하거나, 북한

1960~70년대 북한은 아시아 최강이었다. 정부는 체제 대결을 상징하는 북한과의 경기를 피했다. ‘북괴’와 경기해 패배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겁먹은 정부는 1966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을 포기했다.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부과하는 벌금 5천달러를 물었다. 이렇게 본선에 진출한 북한 축구대표팀은 월드컵 8강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했다.

대북 업무를 맡은 중앙정보부에는 비상이 걸렸다. 대한축구협회 간부들이 중앙정보부로 불려갔다. 여기서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최고의 축구 선수만을 골라 정보기관 소속의 축구팀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당대 뛰어난 스트라이커인 이회택 등이 불려갔다. 이들에게는 일반 기업 계장급에 해당하는 봉급이 약속됐다. 이름은 ‘양지축구단’으로 정해졌다.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한다’는 중앙정보부의 좌우명을 따른 것이었다. 양지팀의 주장을 맡은 이는 허정무 국가대표팀 감독의 삼촌인 허윤정씨였다. 양지팀은 1969년 중반 서독,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위스 등에서 105일 동안 해외 전지훈련을 하는 등 특급대우를 받았지만,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물러나면서 1970년 3월에 사라졌다.

송기룡 대한축구협회 행정지원국장은 “당시 축구는 남북한 체제 대결의 맥락에서 볼 수 있다”며 “60~70년대 우리나라 축구 인프라는 정부가 주도해 조성했다”고 말했다. 이른바 ‘박스컵’으로 불린 박정희대통령배 아시아 축구대회도 그런 예였다. 1971년 5월 시작된 박스컵은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국제 축구 행사였다.

1967년 1월 중앙정보부가 창단한 양지팀 선수들이 2009년 9월 국가정보원을 찾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

1967년 1월 중앙정보부가 창단한 양지팀 선수들이 2009년 9월 국가정보원을 찾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

국가에 대한 자부심?

1978년 12월22일 국가대표 스트라이커인 차범근은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독일 분데스리가의 다름슈타트팀에서 뛰기 위해서였다. 격려와 응원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자기만 잘살러 간다”는 비난도 적지 않았다. 차 전 국가대표 감독도 회고록에서 “나의 독일행이 돈을 벌기 위해 조국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며 “팬들의 기대와 야유 속에 한국을 떠났다”라고 설명했다. 1970년대에는 대표팀이 시원찮은 경기를 하면 팬들이 대표팀 숙소까지 쫓아와 “세금 내놓으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당시 에 난 한 기업체의 광고는 축구에 깃든 인식의 단면을 보여준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한다면 하는 민족 아닙니까? …이 땅에서 태어났음이 자랑스러운 오늘, 우리는 또 한 번 도전의 이름으로 하나됩니다.” 철학가 탁석산은 “거리의 응원 구호를 봐도 ‘대한민국’을 부르지만, 개별적으로 선수를 호명하면서 응원하는 구호는 듣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국가를 통해 자부심을 느낄 기회가 없었는데, 축구는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줬다”며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낮을수록 축구를 전투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듯하다”고 말했다.

1983년 5월8일 서울운동장에서는 아시아 최초의 프로축구 리그인 슈퍼리그 개막전이 열렸다. 당시에는 한 경기장에서 할렐루야-유공, 대우-포철의 두 경기가 연이어 열렸다. 연합

1983년 5월8일 서울운동장에서는 아시아 최초의 프로축구 리그인 슈퍼리그 개막전이 열렸다. 당시에는 한 경기장에서 할렐루야-유공, 대우-포철의 두 경기가 연이어 열렸다. 연합

아시아 최초 프로리그

1983년 5월8일 한국 프로축구가 ‘슈퍼리그’라는 이름으로 출범했다. 앞서 1981년 5월 청와대 비서관 회의에서 “우리 국민들은 여가 선용의 기회가 별로 없고 한국인은 스포츠를 좋아하니 야구와 축구의 프로화를 추진해보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진 결과였다. 할렐루야와 유공 등 프로 두 팀과 대우·포철·국민은행 등 아마추어 세 팀을 묶어 5개팀으로 구성된 리그였다. 프로축구 리그로서는 아시아에서 최초였다. 전 대통령은 개막전인 할렐루야-유공 경기를 직접 지켜봤다.

정당성 없는 권력의 우민화 정책이라는 비판이 뒤따랐지만, 슈퍼리그는 성공적으로 자리잡았다. 첫해 40경기에 입장한 유료 관중만 41만1천 명이었다. 1998년 K리그로 이름을 바꾼 프로리그에는 지난 시즌 15개 축구 클럽이 참여했다. 지난해에는 216경기에 246만8303명의 관객이 입장했다. 아시아 프로 클럽의 자웅을 가르는 아시아챔피언스리그가 1995년 시작된 뒤 지난해까지 15번의 우승컵 가운데 7번은 우리나라 클럽의 가슴에 안겼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는 “K리그가 아시아의 프로 리그 가운데 가장 수준이 높다”며 “여전히 많은 문제점이 있지만 K리그는 한국 축구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학원 축구에 부는 바람

2002년 월드컵은 축구에 대한 상식을 바꾸었다. 무엇보다 축구 저변을 확대해야 한다는 인식이 넓어졌다. 초·중·고 학원 축구의 변화도 서서히 이뤄졌다. 프로팀들이 어린이 축구팀을 만들기 시작했다. 클럽에 속한 어린이팀들은 상대적으로 성적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었다. 단기적인 성과에 치중하기보다 기본기부터 가르쳤다. K리그 팀인 부산 아이파크에서 2003년 처음 생긴 12살 이하 팀은 다른 클럽으로도 번졌다. 대한축구협회 누리집을 보면, 전국 초등학교의 등록 축구팀 수는 2000년 258개에서 올해 206개로 줄었지만, 그사이 12살 이하 클럽팀은 77개로 늘었다. 중학교팀도 같은 기간 172개에서 168개로 줄어들었지만, 15살 이하 클럽팀은 17개로 늘었다. 이청용과 오범석은 각각 FC서울과 포항의 유소년 클럽 시스템이 키운 인재였다.

지난해부터 추진되고 있는 초·중·고 축구리그도 한국 축구의 미래를 바꿀 정책이다. 새 정책은 이전에 토너먼트로 진행되던 경쟁 방식을 리그제로 바꾸고 시합도 주말에만 열도록 했다. 학생들의 수업 참여도를 높이고 약팀이라도 실전 경험을 자주 하도록 한다는 취지였다. 지난 3월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한 만족도 조사를 보면, 지도자의 82.4%와 학부모의 81.9%가 리그제 시행에 대체로 만족한다고 답했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는 “여전히 엘리트 중심의 축구라는 한계는 있지만, 학원 축구에서 뚜렷한 개선이 이뤄지고 있어 발전의 토대가 마련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참고 문헌: (인물과사상사), (랜덤하우스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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