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일 스포츠 이벤트로는 가장 큰 축제인 월드컵은 온 세상을 들썩이게 하는 마력이 있다. 하나가 된 세계인들의 꿈은 4년마다 돌아오는 여름을 화려하게 채색하지만, 그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어두운 이야기도 있다. 편파 판정, 음모론, 승부 조작에 관한 의구심이다. 우리는 2006 독일 월드컵 스위스전에서 편파 판정의 향기를 진하게 느낀 바 있다. 언론과 축구인들이 당시 판정에 대해 다양한 분석을 내놓았고 많은 토론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나는 당시 경기의 주심을 맡았던 엘리손도의 판정이 공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 텔레비전 스피커를 통해 들려온 차두리의 탄식은 나의 의구심에 대한 확인과도 같았다. “말이 안 돼요. 이건 사깁니다!”
훗날 선수들에게 물어보니, 경기를 몇 분 뛰다 보면 주심의 ‘의도’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포츠만큼 정직하고 깨끗한 게 어디 있는가?’라고 항변하는 때 묻지 않은 독자도 계시겠지만, 주심의 편파 판정과 뒷거래는 실제로 존재하고 그 증거 또한 너무 많다. 지난 3월만 해도 고려대와 연세대 경기의 심판 매수 사건을 주도한 김상훈 전 고려대 감독이 구속되고 해당 심판이 대한축구협회에서 제명되는 사건이 있었다.
<font color="#C21A8D">한국부터 이탈리아까지, 승부 조작은 어디에나</font>
2006년에는 이탈리아 최고 프로축구팀 유벤투스가 심판들을 매수해 유리한 판정을 등에 업고 우승을 한 일까지 있었다. 당시 유벤투스는 정규리그 38경기 중 29경기에서 심판을 매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대 후반 포르투갈 명문팀 스포르팅 리스본 클럽 단장을 지냈던 조르즈 곤칼베스는 “단장으로 일할 당시 컵 대회 등에 참가하면서 심판을 매수하기 위해 약 3만달러를 사용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우리가 ‘축구 선진국’이라고 믿던 독일,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을 대표하는 리그에서도 심판 매수가 적발된 사례가 많았다. 단일 리그에서도 수시로 이런 부정이 일어나는데, 훨씬 더 판이 큰, 엄청난 액수의 돈이 오고 갈 월드컵이 깨끗하리라 여기는 것은 너무나도 순진한 생각이다.
선수들이 직접 관여하는 승부 조작은 더 믿기 싫지만 이 역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영국 출신으로 캐나다에서 활동하는 저명한 조사 전문기자인 데클란 힐스는 2006 월드컵의 네 경기가 승부 조작에 연관됐다고 주장했다. 힐스는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세계 축구계의 승부 조작을 파헤쳤고, 2008년 9월 이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담은 폭로서 (The Fix)를 출판했다. 그는 책에서 “2006 독일 월드컵 잉글랜드-에콰도르, 가나-브라질, 이탈리아-우크라이나 경기가 타이에 본거지를 둔 거대 도박 조직에 의해 조작됐다”고 말했다. 그는 “가나의 전직 축구 선수인 아부카리 담바가 도박 조직과 선수 사이에서 일을 꾸몄고, 본인이 직접 이 사실을 내게 고백했다”고 덧붙였다.
도박 조직으로부터 가나-브라질(3-0 브라질 승)전과 우크라이나-이탈리아(3-0 이탈리아 승)전 결과를 경기 시작 전에 이미 전해들은 힐스는 자신의 눈앞에서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나자 가나-브라질전이 열린 도르트문트 경기장에서 회한의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가나의 주장을 맡았던 핵심 선수인 스티븐 아피아(30)는 훗날 인터뷰에서 독일 월드컵 16강 브라질전을 앞두고 도박 조직이 승부 조작을 제의해왔음을 확인해주었다.
힐이 밝힌 승부 조작의 원리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가나와 브라질이 경기를 하면 가나가 승리하는 이변을 연출하기보다는 브라질이 확실히 이길 수 있게 약한 팀을 매수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한다. 상대적 전력이 떨어지는 팀의 경우 중심 선수 2명만 끌어들이면 이기는 게 거의 불가능해진다. 이변의 가능성을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다. 수비수를 매수하면 정확한 스코어까지도 조작이 가능하다. 공격수와 마주한 수비수가 일부러 무리한 태클을 시도하며 넘어지기만 해도 상대는 골키퍼와 일대일로 맞선 상황에서 쉽게 골을 성공시킬 수 있다. 이때 도박사들은 브라질의 3-0 승리에 50억달러를 베팅하고 300억달러가 넘는 돈을 챙긴다. 물론 그 돈의 일부는 선수들에게도 비밀스러운 통로를 통해 전달된다.
<font color="#008ABD">2010 월드컵을 앞두고 터져나온 스캔들</font>
이미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심판 매수에 대한 음모설이 터져나왔다. 지난 5월15일 잉글랜드 축구협회 데이비드 트리스먼 전 회장은 의 위장 취재에 걸려들어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고 말았다. 트리스먼 회장은 전 내연녀와 저녁 식사 도중 “스페인이 남아공 월드컵에서 심판을 매수할 계획을 갖고 있다.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일이 성사될 경우 스페인은 러시아를 위해 2018년 월드컵 유치를 철회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영국 노동당 사무총장 출신으로 정계와 축구계를 오갔던 트리스먼 회장의 입에서 나왔기에 아주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아닐 것이라는 게 영국 축구계와 언론계의 판단이다.
축구에서의 심판 매수와 승부 조작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다.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이번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문제의 판정이나 냄새나는 플레이가 보인다면 우리는 주저 없이 해당 심판 혹은 선수를 의심하고 그들의 배경을 조사해야 한다. 우리가 가만히 앉아 받아들이는 순간, 부정한 일을 꾸민 자들은 안심하고 또 다른 어두운 비즈니스를 계획하려 들 것이다. 삶의 태도에 관한 수많은 명언을 남긴 스페인의 문필가 벨타사르 그라시안은 “의심은 매우 지혜로운 미덕이며 유용한 자산”이라고 말했다. ‘판정은 내려졌으니까’ ‘이미 그렇게 발표됐으니까’라며 체념하는 것은 깨어 있는 축구팬 혹은 성숙한 시민의 자세가 아니다.
조건호 스포츠마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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