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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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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멋대로’ 월드컵, 광장은 가라

장삿속 보이는 광장 응원 대신 K리그팀 홍보하거나 야구와 동시에 즐기기 등 선택
등록 2010-07-02 15:50 수정 2020-05-03 04:26
6월18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LG와 롯데의 경기는 빗속에도 관중으로 가득 찼다. 한국야구위원회는 이날 관중 수가 1만9714명이었다고 밝혔다. 월드컵 기간 관중 감소폭이 2006년 월드컵보다 적었다. 연합 한상균 기자

6월18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LG와 롯데의 경기는 빗속에도 관중으로 가득 찼다. 한국야구위원회는 이날 관중 수가 1만9714명이었다고 밝혔다. 월드컵 기간 관중 감소폭이 2006년 월드컵보다 적었다. 연합 한상균 기자

붉은 옷을 입고 시청 앞 광장으로 나가는 것이 월드컵을 즐기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기업이 깔아놓은 멍석 위에서, 광고에서 가르쳐준 대로 응원을 하는 것만이 축구 관전법은 아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월드컵을 관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6월은 ‘그들의’ 월드컵이 아니라, ‘내 멋대로’ 월드컵이다.

수원 삼성 푸른 유니폼 입고 응원

직장인 김일두(30)씨는 지난 6월21일 한국-나이지리아전을 보지 않았다. 전날 밤 10시에 야근을 마치고 수원 우만동 집에 도착한 김씨는 날씨가 더웠지만 창문을 꼭꼭 닫았다. 커튼도 쳤다. 지척 거리에 있는 수원 월드컵경기장에서 들려오는 함성에 깨고 싶지 않아서였다. 김씨는 그 다음날 아침 6시에 일어나서야 경기 결과를 봤다.

그가 축구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응원단인 ‘그랑블루’의 회장이다. 이른바 골수 축구팬이다. 그는 정작 6월25일 가나-독일전, 잉글랜드-슬로베니아전을 보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월드컵이 시작된 이후 축구를 보느라 5~6일은 족히 밤을 새웠다. 주말에 밤을 새우는 것은 기본이고, 평일에도 ‘좋은 경기’면 뜬눈으로 새벽을 맞는다.

그의 관심사는 한국 대표팀의 성적이 아니다. 수원 삼성 소속인 염기훈·이운재·강민수 선수의 활약이다. 8강이 문제가 아니라, 염기훈 선수를 향한 일부의 비난이 자칫 선수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그의 걱정거리다. 한국 대표팀 성적이 좋으면 프로축구 인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어림도 하고 있다.

외국팀의 축구를 감상하는 일도 그가 월드컵을 관전하는 재미다. 그의 눈에는 우리나라의 거리응원 문화가 오히려 낯설다. “축구를 좋아한다면 다른 나라 축구도 보고 평상시에 K리그 축구도 볼 텐데, 많은 사람들은 대표팀 축구만, 그것도 월드컵 때만 본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에게는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를 느낄 수 있는 경기장이 최고의 관전 장소다. 그렇지 않다면 차선책으로 실내에서 텔레비전으로 본다. 아스팔트 위에 앉아 보는 축구는 “진짜 축구가 아닌 것 같다”.

그는 6월26일 한국-우루과이 경기는 봤다. 보는 방식도 범상치는 않았다. 뜻을 같이하는 클럽팀 서포터들과 수원에서 영화관을 하나 빌렸다. 모두 수원 삼성의 푸른색 유니폼을 입고 와서 월드컵 축구를 관전했다. “길거리에서 푸른 옷을 입고 튈 수는 없으니까”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프로야구 관중 감소폭 적어

대학 3학년 임학훈씨에게 이번 월드컵은 ‘영업’의 기회다. 그는 지난 6월23일 밤 12시를 넘긴 시간에도 한국전을 관전하러 인천 월드컵경기장을 찾은 시민들을 대상으로 전단지를 나눠줬다. 그의 ‘동료’ 10여 명도 함께했다. 이들은 인천 유나이티드의 서포터였다. 임씨는 시민들에게 축구에 대한 간단한 퀴즈를 내고 야광 팔찌와 DVD를 상품으로 나눠줬다. 퀴즈는 K리그에서 득점 1위를 달리는 인천 유나이티드 유병수 선수를 소개하는 등의 내용을 담았다. 상품으로 준 DVD는 클럽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이었다. 자원봉사로 뛴 영업의 ‘실적’도 이미 입증됐다. 이들은 앞서 6월5일 지역 축제가 열린 부평아트센터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홍보전을 벌였다. 이날 홍보물을 다음날 인천 월드컵축구경기장에서 열린 포항과의 경기에 가져온 시민에게는 티셔츠를 나눠준다는 ‘판촉’도 했다. 다음날 60여 명이 홍보물을 들고 경기장을 찾았다. 임씨는 “국가대표팀에는 큰 관심이 없고, 기업들이 벌이는 응원에도 별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국가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면 우리나라 프로축구에도 좋은 영향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월드컵을 보고 홍보활동도 한다”고 말했다.

취업 준비생인 송유근(27)씨에게 지난 6월22일은 바쁜 날이었다. 그는 저녁 시간에는 여자친구와 함께 서울 잠실구장을 찾았다. 오후 6시30분부터 열리는 삼성과 두산의 야구 경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포항 출신인 그는 삼성 라이온즈의 팬이다. 삼성이 5-8로 진 이 경기를 관전한 뒤 다시 지하철을 탔다. 다음날 새벽 열리는 한국-나이지리아전을 보기 위해 상암축구경기장을 향했다. 서울광장으로 가려다 “장삿속이 너무 보이는 곳에 가고 싶지 않아서” 다른 곳을 선택했다. 그는 “축구든 야구든 공이 있는 스포츠는 모두 좋아한다”고 말했다. 송씨처럼 ‘양다리 걸치는’ 흐름도 이번 월드컵에서는 눈에 띈다. 한국야구위원회 통계를 보면, 6월11~20일 프로야구 경기의 평균 관중은 경기당 1만471명으로 6월10일 이전보다 16.4% 줄었다. 월드컵의 영향이 컸지만, 2006년 월드컵에 견줘서는 감소폭이 적었다. 2006년 월드컵 기간에는 경기 평균 관중이 4995명으로, 개막 전 평균 관중 6954명에서 28.6%나 줄었다.

통일운동 단체들 ‘615TV’로 축구 중계

월드컵을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다. 지난 6월21일 서울 강남구 봉은사 앞마당에서 벌어진 북한 국가대표팀 거리응원전의 한편에는 이색 방송 스튜디오가 하나 꾸려졌다. 스튜디오 배경으로는 실사 출력한 정대세와 박지성의 사진이 걸렸다. 이날 축구 경기를 중계하기 위한 해설자와 캐스터도 간이 책상에 나란히 자리잡았다. 이들은 붉은색 대신, 푸른색 티셔츠를 입었다. 가슴에는 ‘원코리아’라는 로고가 붙었다. 이 자리는 통일운동 단체들이 만든 ‘615TV 창립 준비위원회’가 준비한 스튜디오였다.

무엇 하나 세련된 구석은 없는 방송이었다. 장비라고는 이들을 촬영하는 소형 캠코더, 컴퓨터와 인터넷선, 책상, 걸상이 전부였다. 해설은 스포츠토토 예상 전문사이트인 오즈온의 천승환 축구분석위원이 맡았다. 캐스터는 성신여대 1학년 홍지혜씨가 맡았다. 홍씨는 방송 경력이 전혀 없지만 자원봉사로 참여했다. 홍씨가 “경기팀의 승리 전략이 무엇이라고 보느냐”고 묻자, 천 위원은 “포르투갈 호날두 선수가 측면에서 중앙으로 파고드는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는 전술이 중요하다”고 해설했다. 인터넷 방송에서는 60여 명의 누리꾼이 오가며 이들의 방송을 지켜봤다. 누리꾼 ‘haneul39’는 “북한 선수들 너무 심장 떨리게 하네요 ㅋ”라고 글을 올렸다. 이 방송의 프로듀서를 맡은 권오혁 615TV 창립 준비위원회 위원은 “스포츠를 통해 남북 화해의 계기를 만들자는 취지로 북한을 응원하는 방송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정희준 동아대 교수(스포츠과학)는 “월드컵 방송과 광고, 거리응원에 자본이 대거 투입되면서 월드컵 응원은 축구를 즐긴다기보다 ‘쇼’에 참여하는 성격이 강하다”며 “이에 거부감을 가진 집단에서 나름대로 월드컵에 참여하는 방식을 찾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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