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일어나라, 인권OTL]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계인권선언 할머니께

등록 2008-08-29 00:00 수정 2020-05-03 04:25

세계인권선언 감상문 공모전 가작… 환갑맞은 세계인권선언에 보내는 편지

▣ 김푸른샘 한국외대 부속 외고 3학년

[일어나라, 인권 OTL 16]

할머니, 오래된 약속, 따뜻한 약속을 안고 오신 할머니 회갑을 듬뿍 축하드려요. 할머니, 우리나라에선 옛날부터 회갑 잔칫날엔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온 동네가 떠나가게 노래도 하고, 덩실덩실 춤도 추고, 맛있는 음식도 가득 차려놓고 축하를 해왔답니다. 더 오래 사시라고, 더 건강하시라고 기원하면서요. 할머니, 이번 할머니 회갑에는 동네 사람들 다 모셔놓고 아름다우신 할머니도 소개해드리고, 할머니께서 아주 오래오래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시기를, 우리 동네에 아주 오래오래 살아 계시기를 소망하며 잔치를 벌이고 싶네요.

할머니, 사실 제가 할머니를 만난 건 부끄럽게도 그리 오래되진 않았어요. 전 열아홉 살이니까, 열일곱 살 되던 해 여름쯤이었을 거예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자원활동을 하고, 이어 국가인권위원회에 장애인들의 편의시설에 대해 진정을 하면서부터였어요. 국가인권위원회에 날마다 들락날락하면서 비로소 인권이라는 것이 온 세상에, 우리나라에, 우리 마을에, 우리 학교에, 우리 공부방에, 우리 집에 살아 움직이는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할머니 모습을 뵈러, 할머니 냄새를 맡으러 국가인권위원회의 사이버 배움터에도 무지무지 많이 갔어요.

할머니, 혹시 그때 제 모습 못 보셨어요? 할머니께만 비밀로 말씀드리는 건데, 사실 사이버배움터에 계속 있었던 건 제가 인권에 대해서 너무 무지했기 때문이에요. 이건 친구들한테도 말 안 한 거니까 할머니도 비밀 지켜주셔요, 네?

아무것도 몰랐던 제가 할머니의 따스한 치마폭을, 할머니의 따스한 품을, 할머니만의 고유한 향취를 맡고 느낄 무렵은 여름이 저물어갈 무렵이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2년 전 여름이었어요. 전 공부방에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자원활동을 해오고 있었는데, 용감무식하게 인권수업을 감행한 거예요. 왜냐하면 공부방 아이들이 서로 너무도 많이 무시하고, 할퀴고, 싸워서 ‘인권이라는 약’을 처방하면 딱이겠구나 하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할머니, 4학기의 방학마다 인권수업을 했더니 아이들이 신기하게 많이 달라졌어요. 마법처럼요. 처음에는 동네 사람들도 영어는 안 가르쳐주고, 웬 쓸데없는 인권수업이냐고 비웃었지만 지금은 어른들도 좀 달라졌어요. 지난해 겨울방학 땐 ‘다문화수업’을 하면서 ‘한국이주노동자센터’의 선생님들이 오셔서 다문화 강의, 다문화 체험도 했는데 동네 어른들도 많이 오셔서 구경하시며 좋아하셨어요. 이번 여름방학에는 ‘태국문화 체험활동’도 하니 할머니도 한번 구경 오셔요, 네?

그런데 할머니, 전 고등학교 3학년인데요. 할머니, 할머니께서 들려주신 말씀 중에서 제게 가장 고귀하게 다가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모두 다 존엄하고,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견해, 출신, 민족, 혈통, 지위, 나이, 빈부에 관계없이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리는 세상은 언제쯤일까요? 할머니, 지금은 고3이라 더 힘들지만, 사실 몇 년 전부터, 오래 전부터 우린 모두 힘들었어요. 이른 아침, 눈이 떠지기 전의 0교시 수업, 밤늦은 야간자율학습, 두발 규제, 학생의 정당한 의사표현의 자유를 막고 있는 현실, 자율보다는 규제와 통제가 많은 학교, 절대적인 수면 부족, 만성 피로로 이건 삶이 아니라 생존이에요. 언제 인간다운 삶을 누렸는지도 지금은 거의 기억나지도 않아요. 게다가 인권의 소중함, 필요함을 절박하게 알고 느낄수록 인권침해, 차별의 현장은 더 많이 보여,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고 가슴이 터지려고 할 때가 많으니 어쩌면 좋을까요?

그렇지만 할머니,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60년 전에 할머니께서 그 힘든 상황에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선언하고 희망을 약속한 것처럼, 저도 그리고 여러 젊은이들도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작고 더디지만, 희망을 그려나갈 것이니까요. 비록 이렇게 할머니께 ‘입시지옥’의 고통을 하소연하고는 있지만, 전 그래도 무지를 극복하려는, 공부방에서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어엿한 꼬마 인권 선생님이잖아요. 회갑 잔칫날, 만나면 할머니 제 머리 한번 쓰다듬어주셔요. 그럼 더 힘이 솟아날 것 같아요.

세계인권선언 할머니, 60주년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아직 돈이 없어 만들어드리지 못하지만, 아주 고운 ‘인권 모시 한복’을 할머니 70주년 생신 때는 선물해드리고 싶어요. 대신 이번 생신엔 우리 공부방 아이들이 쓴 삐뚤빼뚤한 ‘인권선언문’을 곱게 접어 보내드려요. 할머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약속이신 우리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셔요.

2008년 8월 김푸른샘 손녀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