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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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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의동에서 영의정처럼 놀아보라

등록 2008-08-29 00:00 수정 2020-05-03 04:25

포화상태 인사동·삼청동 대안으로 떠올라… 들머리 → 효자로 → 영추문 → 솔바람길, 영리보다는 공동체 지향 공간들 눈에 띄네

▣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권력 때문에 불편하면서도 즐거운 동네죠. 그 묘한 이중성을 즐기며 삽니다.”

조선 왕실의 정궁인 서울 경복궁 서쪽 동네 통의동을 건축가 황두진씨는 이렇게 평했다. 그는 통의동 거리의 옛 ‘열린책들’ 사옥을 설계한 인연으로 6년째 이 동네에 산다.

통의동은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을 마주 본다. 바로 위쪽인 청와대 들머리의 효자동, 창성동과 더불어 권력과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 공존해온 곳이다. 요즘도 효자로 등의 큰길 들머리는 촛불시위에 대비한 전경버스의 살벌한 행렬이 이어진다. 반면, 미로처럼 막다른 골목길이 얽힌 안쪽에는 70년대 서민 주택가 특유의 푸근한 운치와 향수가 서려 있기도 하다. 청와대와 경복궁의 권력장 틈바구니에서 수백 년 동안 질긴 삶을 꾸려온 이 동네가 새삼 각광받고 있다. 한적했던 거리와 골목길에 화랑과 디자인 공방, 찻집, 레스토랑, 출판사 등이 잇따라 들어섰다. 주말엔 관람객들 발길이 몰리는 ‘문화촌’으로 풍광이 바뀌고 있다. 문화, 소비 시설들이 포화상태에 이른 인사동, 삼청동의 대안으로 통의동을 꼽는 이들도 늘었다.

2~3개 미술관 건립 프로젝트 추진 중

그 변화의 중심은 통의동과 창성동의 경계인 영추문길이다. 3년여 전부터 길가 양쪽에 갤러리 쿤스트독, 브레인팩토리, 갤러리팩토리 등 젊은 작가들의 대안공간이 들어서더니, 지난해부터 디자인 공방 ‘워크룸’과 갤러리 카페, 소화랑들이 잇따라 생겨났다. 효자로에서 영추문길로 꺾어드는 길목인 옛 보안여관 건물과 일제 적산가옥, 한옥 골목길 등지에는 재력가들이 참여한 2~3개 미술관 건립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2006년 12월 출판 편집자, 디자이너, 사진가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협동공방 ‘워크룸’과 수입 아트가구를 전시 판매하는 가구 카페 ‘MK2’가 생기면서 젊은 관객들 발길이 부쩍 늘었다. 출판물 디자인을 주로 하는 워크룸은 출판사 안그라픽스 출신의 실력파 디자이너들이 만든 공방. 실비로 젊은 작가들의 도록 작업을 해주고 파격적인 디자인의 박물관 도록 등을 내놓는 한편, 젊은 디자이너 전시도 병행하고 있다. 이 공방 에디터 박활성씨는 “강남, 삼청동 등과 달리 분위기가 차분하고, 상업공간이 많지 않다는 점이 오히려 작가나 애호가들의 눈을 끄는 것 같다”며 “공방과 화랑들이 다 한 길가에 있어 자연스럽게 소통되고 하는 일도 서로 엮이는 분위기”라고 했다. 갤러리팩토리에서는 젊은 작가들의 간이 경매도 종종 열린다. 공방 건물을 끼고 위쪽으로 꺾인 골목에는 삼청동에 있던 갤러리 자인제노가 두 달 전 옮겨왔다. 갤러리 카페인 ‘고희’도 자리를 잡았다. 좀더 윗길인 솔바람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시대 2층 떡집을 개조한 갤러리 ‘아트다’가 세 달 전부터 기획전을 벌이고 있다. 9월에는 평론가 오광수씨가 카페 고희 뒤편에 사저를 신축하면서 1층을 젊은 작가들을 위한 전시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라는 소식도 들린다. 창성동 북쪽 끝에는 한 건축회사가 아트센터 활용 등을 위한 신축 건물을 짓고 있기도 하다.

워크룸 공방 맞은편에는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이 있다. 국내 미술판에서 가장 많은 자료를 소장한 기록전문가 김달진씨의 아카이브 전시관으로 9월 정식 개관전을 열고 미술인들을 끌어들일 참이다.

이 일대를 출퇴근로로 삼았던 옛사람들

전경의 단골 경비 구역인 남쪽의 경복궁역 동네 들머리도 풍광이 바뀌었다. 유명한 재일동포 건축가 이타미 준이 설계한 검회색빛의 육중한 고도빌딩이 지난해 연말 완공돼 화랑 등의 문화공간 임대 채비를 하고 있다. 바로 위쪽 건물에는 ‘갤러리 차’가 두 달 전에 입주해 젊은 신예작가들의 작품전을 벌이는 중이다. 뒤이어 기존 건물인 대림미술관과 통의동의 터줏대감인 진화랑이 있고, 옛 열린책들 사옥(현 씨네마서비스 사옥)도 자리잡고 있다. 자연스럽게 들머리부터 효자로와 영추문, 솔바람길을 따라 문화시설의 동선 축이 형성된 셈이다. 이 지역 부동산 전문가인 김준섭씨는 “화랑주는 물론 대기업, 컬렉터 수십 명이 미술관, 화랑터를 물색하기 위해 부탁을 해오거나 직접 돌며 터를 찾고 있다”며 “앞으로 2~3년 사이에 효자로 주변 일대가 급속도로 풍경이 바뀔 것 같다”고 말했다.

통의동 일대가 김광받는 데는 삼청동, 인사동에 비해 월등히 싼 임대료와 집값이 직접적 원인이다. 하지만 이 지역이 지닌 독특한 문화적 전통과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 원래 통의동, 창성동 지역은 조선시대 중·후기 왕궁에 고기, 소금, 땔감 등의 생필품을 대던 사재감이 있었다. 경복궁 서쪽에 궁궐의 관료 행정기구인 궐내각사가 있었기 때문에 고위급 관료들은 영추문으로 출퇴근하면서 통의동 일대를 출퇴근로로 삼아 생활문화를 꽃피웠다. 그래서 자연히 이를 다루는 중인과 공방 사람들의 생업 터전으로 활기를 띠었던 곳이다. 조선 중·후기 중인들이 시사 모임을 결성하며 꽃피웠던 여항(閭巷)문화의 본산지도 바로 이곳 통의동과 옆의 옥인동 일대로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의 문화촌 형성 과정은 삼청동, 인사동과는 다분히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는 평이다. 새로 들어서는 문화시설들이 상업 화랑 등의 영리시설보다는 미술관이나 문화인들의 모임터를 겸한 자영 화랑, 갤러리를 겸한 카페 등을 주로 지향한다. 문화공간끼리 공간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공동 활동을 벌이는 점도 눈에 띈다. 지난 2월 워크룸 공방과 갤러리팩토리, 건축가 서승모씨 등이 공동 출자해 만든 열린 가게 ‘가가린’이 대표적인 사례다. 일정한 연회비를 내고 회원에 가입해 소장한 책이나 생활 물품들을 다시 파는 재활용 가게인 가가린은 현재 회원이 100명을 넘어섰고 하루 이용객만 40~50명에 달한다. 이 가게를 전시 장소로 임대하고, 서너 달에 한 번씩 문화 이벤트 등을 열겠다는 복안이다.

정부청사를 문화시설로

통의동의 앞날에는 이견이 엇갈리고 있다. 카페, 레스토랑 등의 소비시설이 집중되면서 상업소비지구로 변질된 삼청동, 인사동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한옥보존지구 등 주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마스터플랜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토박이 주민들 상당수는 생업과는 거의 연관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문화지구화에 냉랭한 반응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건축가 황두진씨는 “주민들의 삶과 연계되는 것을 전제로 어느 정도의 공공적 개입이 필요하다”며 △영추문의 개방 △영추문길 들머리 정부청사 별관의 문화시설 활용 등을 제안했다. 디자이너 김형진씨는 “문화시설 운용자들의 개인적 의지를 잘 추슬러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며 △영추문길의 주말 차 없는 거리화와 일방통행로 보장 등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통의동은 왕궁의 주요 물산과 인력이 오가는 출입 공간으로 번영했지만, 일제시대 동양척식회사의 사택터로 무단 개발되면서 역사성을 단절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최근의 변모가 통의동의 역사성, 주민들의 생활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진척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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