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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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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인권OTL] 그녀가 가슴 속에 품고 떠난 말

등록 2008-08-22 00:00 수정 2020-05-03 04:25

‘세계인권선언’ 감상문 공모전 우수작… ‘인류의 약속’을 읽고 후안마이를 떠올리다

▣ 엄재은 푸른시민연대 상근활동가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일어나라, 인권 OTL ⑮]

후안마이. 저는 지금 막 세계인권선언 전문을 다 읽은 참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기도 하지요. 전세계 인류 가족을 위한 글을 읽었는데, 그 당당한 기상과 위풍에 하늘에라도 오를 듯 기뻐해야 옳은데, 왜 저는 이리도 가슴이 시리고 먹먹한 건지요. 당신이 너무나도 가혹하고 슬픈 최후로 내몰리기까지 당신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던 수많은 조항들 안에서 길을 잃은 탓일까요. 한국어 교육을 받고 싶어했고, 남편과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던 당신. 그리하여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희망했던 당신. 그러나 당신이 부푼 희망을 안고 꿈꾸며 건너왔을 이 땅은, 당신의 남편을 낳고 기른 이 땅은 참으로도 모질었지요. 당신에게 그리고 아마도 당신의 눈을 닮았을 많은 사람들에게, 지금 이 순간까지도.

후안마이. 전 방금 가슴 안을 치고 올라오는 ‘그럼에도’라는 말을 꿀꺽 삼켰습니다. 그 뒤로 이어질 자유, 평등, 존엄성, 권리와 같은 단어들을 이 세계인권선언에서 어떻게 골라내 읊을 수 있을지 다시금 먹먹해집니다. 그렇지만 후안마이. 그럼에도 말입니다. 당신을 시리고 비참한 최후로 내몰았던 이 모진 땅엔 ‘그럼에도’ 다시 싹이 트고 꽃이 피네요. 당신이 꿈꾸었던 행복한 다문화가정을 위한 자리가 움트고 있네요.

후안마이. 어제도 제가 일하고 있는 사무실로 눈이 서글서글한 그녀가 찾아왔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했던 베트남에서 온 지 이제 겨우 3일. 그녀는 제 손가락 끝이 가리킨 한글 자모들을 용케도 소리내어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슴속에서 가장 먼저 울려퍼진 건 역시 그녀 자신의 말이었겠지요. 당신이 그토록 절절히 쏟아낸 가슴속의 말. 당신이 차마 이루지 못한 행복한 가정에서 하고 싶었을 그 가슴속의 말. 함께 이야기를 하고, 미래를 꿈꾸고, 더불어 살기를 원한다던 바로 그 말.

어느새 날이 저물고 있네요. 이런, 올해 가을 문을 열 ‘다문화 어린이 도서관’을 위해 외국 아동도서를 구할 수 있도록 각국 대사관에 메일을 보내야 하는데 늦어버렸습니다. 후안마이. 우리 아이들이 자유롭게 어머니 나라 말을 듣고 읽으며 자랄 수 있도록, 당신이 차마 다 꺼내지 못한 채 품고 떠난 가슴속의 말들을 기억하며 포기하지 않고 가겠습니다. 올 12월10일. 눈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엊그제 찾아온 그녀가 함뿍 웃을 수 있도록. 그때 다시 한 번 읽을게요. 우리 인류 가족을 위한 세계인권선언을 저 또한 함빡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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