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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특강-자존심] 우월감도 열등감도 없이 살라 하네

등록 2007-04-13 00:00 수정 2020-05-03 04:24

고미숙·박노자와 함께한 ‘선비의 자존심’ - 한풀이 방식으로 지배와 예속을 반복하는 우리, 연암 박지원에게 배우자

제4회 인터뷰 특강- 자존심 ⑥

▣ 글 이윤주 12·13기 독자편집위원회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문화방송 4월4일 방송분에서, 이순재는 집안의 위계질서가 무너졌다며 아들과 손자에게 나이순으로 번호가 매겨진 옷을 강제로 입힌다. 집안 모든 남자들은 이 유니폼을 입고 아침저녁마다 구호를 외치고 약수터를 찾아 운동을 해야 한다. 물론 일인자는 이순재 자신이다. 부인과 며느리에게는 그나마 ‘시리얼 넘버’도 부여되지 않는다. 남들은 재미있다며 웃고 넘기는 이 대목을 보면서, 살짝 소름이 돋았다. 텔레비전은 가족관계에서 파생되는 권력과 위계구조를 웃음의 코드로 만들고 있었다. 필자가 이런 삐딱한 해석을 하게 된 것은 전날 들었던 ‘자존심 강연’ 때문이다.

2002 월드컵 광기에 묻힌 일들

공개 강연 마지막 주인공은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연구원 고미숙과 오슬로대학 교수 박노자. 사회자 서해성씨는 “두 분은 운전면허가 없고 어릴 적 낯가림이 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말로 이들을 소개했다.

서해성(이하 서) : 를 따라가는 여행을 했을 텐데.

고미숙(이하 고) : 에 대한 책을 쓰고, 바로 여행 계획을 잡고 떠난 게 2003년 4월이다. 연암이 중국에 갔을 때가 44살인데, 당시 내가 그 나이였다.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이 전세계를 덮치고 있을 때여서 여행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스릴 있었다. (웃음) 그 여행이 삶의 새로운 문턱이 됐다.

서 : 박노자 선생은 2002년 월드컵 때 곤욕을 치렀다(당시 한국의 응원 열기에 대해 군중 광기, 집단적 히스테리 증세란 표현을 써 네티즌의 질타를 받았다).

박노자(이하 박) : 축구 열강인 포르투갈을 이겼다, 그러므로 우리도 열강이라며 콤플렉스에서의 해방감을 느끼는 분들이 많다. 이건 허위적인 해방이다. 내가 기억하는 건 포르투갈전 때 너무 시끄러워서 한숨도 못 잤던 것이다. 당시 내가 묵었던 곳 옆의 경희대병원에서 파업을 하고 있었는데,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간호사들이 강제로 끌려가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월드컵으로 묻혔다.

서: 폴란드전이 벌어지던 날에는 종로서적이 문을 닫았다. 50년 전통의 서점이 문을 닫는 순간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나를 포함해 5명이었다.

사회자의 “박노자가 동남아시아계 교수였다면 한국 사회가 어떻게 되었을까?”란 재미있는 질문에 대해 박노자는 “단속에 붙잡혀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라고 대답한 뒤 강연을 시작했다.

“벼슬하면서 사람이 못나졌다”


자기 자신을 존경한다는 것은 인간 자유에 관한 문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권력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권력관계에 휘말릴 수밖에 없지만 그 권력관계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고 낯설게 하는 것이 자존심이 아닐까. 권력관계가 처음 생겨나는 것은 가족에서다. 한국인은 대체로 아기를 키울 때, ‘착한 아이’란 말을 즐겨 쓴다. 착하다라는 말의 정의는 ‘말 잘 듣는 아이’이다. 아이에게 요구하는 것은 ‘일찍부터 자존심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자존심 지키기가 더 어려워진다. 현재 가장 잘 팔리는 책은 처세술 책이다. 처세술 책은 대부분 원만한 관계를 구축해서 위계서열화돼 있는 사회에서 성공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위계질서적인 구조에서는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상향 이동만이 선(善)인 상황이라 자존심을 논하기는 쉽지 않다. 자존심을 갖고 살기 힘든 것은 전쟁과 분단이 낳은 하나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다. 엄청난 권력을 가진 만능 국가가 수많은 무력한 개인을 지배하는 권력관계가 1950년대에 출현했는데, 그 흔적이 오랫동안 남아 있다.
1950~60년대보다 조선시대에 자존심을 굉장히 강조한다. 조선시대 지배계급의 권력관계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지만, 한 지식인이 권력에 완전히 포섭되는 것을 잘한 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을 보면 황현 선생이 사람을 평가하는 방법이 좀 독특하다. 유명한 시인인 운양 김윤식이 41살 늦게 대과에 붙어 승승장구할 때 “남산 밑에서 독서나 했을 때 대단히 좋은 사람이었는데, 벼슬하면서 사람이 못나졌다”고 평했다. 한국에서 자존심의 황금기는 개화기와 일제시대다. 전통적 의미의 자존심과 근대적 유교주의를 융합시킬 수 있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정치적 자존심이 일제에 짓밟혔는데 이 권력관계에 복종한다는 것이 치욕스러웠기 때문이다.

미안해하는 게 짜증난다는 베트남

이어 고미숙은 에서 본 자존심과 한국 사회 콤플렉스에 대해 얘기했다.


내가 누구에게 지배당하느냐, 누구를 지배하느냐를 논하기 이전에 내가 우월감과 열등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를 보면, 연암은 완벽하게 열등감과 우월감이 없다. 당시 북벌론과 소중화주의라고 하는 반공 이데올로기보다 더 심한 이데올로기 공세 상황에서, 연암은 중국에 갔다. 연암은 이것에 영향받지 않았고, 지배와 예속이라는 정서적인 기제를 자기 마음속에서 완벽하게 해방시킬 수 있었다. 앞서 박노자씨가 일제시대에 자존심 세운 지식인이 많다고 했는데, 적이 권력의 이름으로 분명히 있을 때, 자존심을 지키기는 상대적으로 쉽다. 그런데 내가 권력을 향유하고 있을 때, 내가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연암은 권력을 완벽하게 향유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데도 지배와 예속이라는 정신적 기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최고의 명제인 ‘청나라 문명의 진수는 똥 부스러기와 기와 조각에 있다’는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자존심을 지키는 것은 이런 방향이 돼야 한다. 그러나 100년 동안 우리는 틈만 나면 ‘한풀이’ 방식으로 지배와 예속의 관계를 반복했다. 그러니까 우리의 자존심은 우월감 아니면 열등감이다. 한국 자본주의가 베트남전쟁의 피에 의해 성장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에 미안해한다. 그런데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인이 미안해하는 것에 짜증을 낸다. 심지어 미국에 대한 증오심도 별로 없다. 그게 바로 승자의 진정한 자존심이다. 그런데 우리는 베트남보다 훨씬 잘살고 발전을 이루었는데 아직도 우월감과 콤플렉스 사이에서 병적인 징후를 반복한다. 연암은 근대를 넘어선 지식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훌륭한 지식인들은 대부분 유배를 가거나 사약을 먹는 등 권력과 불화한다. 그래서 권력을 가지면 똑같이 타자에 대한 억압을 반복한다. 사유의 새로움, 정서의 새로운 경계를 연 연암은 21세기 우리의 비전이다.

조선시대 인의예지, 현대 무한경쟁

이어진 청중 질문에선 다소 포괄적인 내용이 많이 나왔다. 첫 번째 진중권씨의 강연 때처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카운슬링 질문도 쏟아졌다.

청중1 : 고미숙 선생은 대학을 벗어나 연구 생활을 한다. 자본, 권력에 대해 자존심을 세우고 있다. 비법이 무엇인가.

고 : 나는 자본, 권력에 대해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딱 한 걸음만 옆으로 내딛자’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연구공간을 만들었던 때와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한 걸음씩 바꿔가는 것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또 다른 전략은 친구와 연대를 하는 것이다. 나는 절대 자신을 믿지 않는다. 능력뿐 아니라 지배와 예속으로부터 자유로운지 내 자신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관계와 활동 속으로 나를 밀어넣는다. 좀더 유능하고 힘있는 사람에게 묻어간다. 실존적인 결단, 이런 거 잘못하면 위험하다. 대부분이 혼자 힘으로 헤쳐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자본과 타협하고 권력에 들어간다.

청중2 : 한국전쟁 이후 국가 간 관계가 힘의 관계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역시 강한 중화사상을 갖고 있었다. 조선의 사대와 지금 한국의 사대는 어떻게 다른가.

박 : 대미 관계와 조선시대 대중 관계는 사실 비교조차 힘들다. 조선 말기는 중국에 대한 사대라기보다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다. 지금은 민족자본에서 국가 지배 이데올로기가 발현되는데, 사실 한국의 자본은 국제자본 안에 포섭돼 있다. 삼성전자만 해도 국민기업이라고 광고하지만 실지로 주식의 절반 이상이 국제자본, 즉 미국의 기관투자가들이다. 조선시대에는 인의예지가 있었지만, 지금 인의예지는 무한 경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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