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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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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한’ 젊은 남성들, 약자 사냥에 나서다

우리 안의 극우 37. ‘남성계’는 어떻게 확대 재생산되는가
‘피해자 정체성’ 공유하며 가해자 찾기… 타자에게 고통 전가하며 상징적 복수
등록 2026-10-29 21:44수정 2026-11-05 18:27
장대호가 쓴 편지 ‘남녀평등’.

장대호가 쓴 편지 ‘남녀평등’.


남성계 담론에는 남녀가 성별화되지 않은 동료로서 교류하는 ‘중립지대’의 감각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중립지대는 언제든 성애적 관계로 전환될 가능성을 지니지만, 남성계 구성원은 성애적 관계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비결정성 내지 불안정성을 견디지 못한다. 다시 말해 이들에게 성애적 관계가 되지 못한 이성과의 모든 관계는 ‘실패’이거나 무의미하다. 그래서 이들의 자기 표상은 ‘호구남’과 ‘알파남/(각성한) 베타남’을 오가며, 여성은 ‘꽃뱀/김치녀/페미’와 ‘개념녀’로 나뉠 뿐이다.

장대호도 그 프레임을 그대로 따른다. ‘보로나 바이러스’라는 제목의 글에서 장대호는 이른바 ‘꽃뱀’의 함정에 빠져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억울한 피해자가 되는 남성의 현실을 개탄한다. 자신은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증거용 ‘몰카’를 늘 장착하고 있다면서, 한편으로 교활한 ‘꽃뱀’과 달리 “박봉에도 건전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아가는 다수의 여성을 사랑하고 보호하자”고 힘주어 말한다.

‘여성은 감정적이고 충동적이지만 남성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식의 고정관념도 드러난다. 장대호는 여성은 감정적이고 눈물을 흘리며 ‘감성팔이’나 하는 존재로 묘사하는 반면 자신은 냉철하고 이성적인 존재, “울보들 사이에서 울지 않는 자”, 그래서 “공분을 사는 자”로 설정된다.1 그러면서 “누구든지 인싸가 되고자 하거든” “촛불을 보고 눈물 흘릴 줄도 알아야” 하며, “여성을 배려해야 하고, 여성적 국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냉소한다.2

 

과거 남성들과 선 긋고 세대적 억울함 표출

 

장대호에게 한국 남성은 ‘순결한 피해자’다. ‘네 이웃에게 몸을 팔지 말라’라는 글에서 장대호는 성매매를 없애려면 “성매매 공급원을 상대로 집중단속을 하거나 캠페인을 벌이는 게 효과적”이라면서, “성매매 근절 캠페인 광고 영상에 파는 년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사려는 놈만 범죄자 취급을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특히 ‘남녀평등’이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과거에 여성 억압을 자행하던 남성과 오늘날 젊은 세대 남성을 명확히 구별해 억울함을 토로한다.

“이처럼 우리 법은 여성을 우대하지만, 남성은 우대하는 법은 하나도 없다. (…) 즉, 남성들이 가장자리를 전담하여 유사시 목숨을 걸고 여성 등을 위해 봉사하고 보호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사회적 보상은 전무한 실정이며, 헌법 제34조에 보듯 오직 여자만을 복지와 권익 향상의 대상으로 특정하고 있다. (…) 그들은 우리 조상들이 했던 여성에 대한 억압을, 아무 유책사유가 없는 신세대 남성들에게 전가하면서 남성들의 평등권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문장 “그들은 우리 조상들이 했던 여성에 대한 억압을, 아무 유책사유가 없는 신세대 남성들에게 전가하면서 남성들의 평등권을 침범하기 시작했다”는, 남성계를 넘어 한국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숱하게 볼 수 있는 클리셰다. 이 주장은 개인 또는 특정 세대의 무고함과 구조적 불평등을 혼동하는 점에서 논리적 오류다. 과거보다 여성의 권리가 확대됐다는 사실이 곧장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하다. 결정적 오류는 남성 권리와 여성 권리를 ‘제로섬게임’으로 본다는 점이다. 즉, 저 주장은 여성 권리 확대가 남성 권리를 필연적으로 침해하는 것이 아님에도 그런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이렇듯 장대호의 글은 남성계의 여성혐오적 클리셰를 자동기술로봇처럼 재생한다. 이는 여성을 평등한 존재로 보지 않는 시선에서 비롯하며, 당연히 남성계 밖에서는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장대호가 언급한 것처럼, 대한민국 헌법 제34조 3항은 “국가는 여자의 복지와 권익의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시한다. 문장은 건조하지만 그 속에 역사적 맥락, 현실적 이유, 사회적 합의가 담겨 있다. 즉, ‘왜 여자만 복지와 권익 향상의 대상이냐’는 장대호의 불만은 반헌법적·반사회적 발언이다. 물론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그런 발언조차 강하게 비판받을지언정 원칙적으로 허용된다. 수감 상태에서도 당당히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던 장대호 본인이 좋은 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장대호가 남성계의 클리셰를 반복한다는 사실, 혹은 여성을 평등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다. 핵심은 장대호를 포함한 많은 남자가 어떻게 그런 규범을 판에 박은 듯 내면화할 수 있었는가다. 나아가 어떻게 남성계 밖에서도 그런 주장을 공공연히 표출할 수 있게 되었는가다.

 

‘약한 결속’이자만 활발한 상호작용
2023년 8월30일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경찰의 성매매 단속시 신체촬영 등 위법수사 피해’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연합뉴스

2023년 8월30일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경찰의 성매매 단속시 신체촬영 등 위법수사 피해’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연합뉴스


장대호에게 ‘외모의 열위’가 가져온 성애 불평등은 사무치게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키 작은 루저한테 대가리 깨져보실래예?”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고통스러운 감정은 전혀 해소되지 못하고 고스란히 남았다.(제1635호 참조)

그 감정은 대체로 모멸감, 울분 등의 이름을 가진다. 모멸감(humiliation)은 그 어원처럼 땅(humus)에 머리를 처박히는 기분이다. 울분(embitterment)은 무척 쓰디쓴(bitter) 맛이어서 지독히 오래간다. 이 부정적 감정의 에너지는 강력하다. 오래전부터 장대호 같은 남자들은 늘 존재했다. 다만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잘 몰랐다. 그래서 대부분 세상의 규칙을 따르며 조용히 살거나, 가끔 개별적으로 소동을 일으켰을 따름이다.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의 발달은 사람들이 만나는 방식을 크게 바꿨다. 마을과 대도시를 벗어나지 못했던 인적 교류 범위가 수천, 수만 킬로미터까지 확장됐다. 가장 도드라진 변화는 ‘약한 결속’에서 발생했다. ‘약한 결속’은 1970년대에 사회학자 마크 그래노베터가 제시해 유명해진 개념이다.3 그는 사회관계망을 ‘강한 결속(strong ties)과 ‘약한 결속’(weak ties)으로 구별했는데, ‘강한 결속’은 가족과 절친한 지인 및 동료 같은 정서적으로 친밀하고 상호작용이 많은 관계다. ‘약한 결속’은 가끔 만나는 지인이나 동료처럼 친밀성과 상호작용이 적은 관계다. 그래노베터의 학문적 공헌은 논문 제목인 ‘약한 결속의 힘’에서 알 수 있듯 취업이나 사회이동 등에서 ‘약한 결속’이 생각보다 훨씬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증명한 것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인간관계도 ‘약한 결속’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그래노베터의 것과 달리 온라인의 ‘약한 결속’은 일면식 없는 익명에 의한 관계에서도 활발한 상호작용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남성계 역시 이런 특징을 가진다. 이른바 ‘인셀’(incel·involuntary celibate, 비자발적 독신)이 남성계에 많은 건 우연이 아니다. 커뮤니케이션학자 야콥 요한센에 따르면, 인셀들은 “남성계 남성의 근본적 모순”을 보여주는 존재로서 “여성을 욕망하는 동시에 파괴하고 싶어” 하며 “끝없는 자기연민에 빠져서 세상과 여성에 대한 증오를 뿜어낸다.”4 사회학자 사이먼 코플런드는 남성계가 “남성의 소외감을 해소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됐다고 말한다. “남성이 친구를 만나고 연결감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5

 

우정과 돌봄이 소거된 감정 공유

 

장대호에게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도 그런 공간이었을 것이다. 자주 만나는 친구도 별다른 사회관계도 없었던 그에게 일베는 유일하게 자기 생각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이었다. 실제로 장대호가 범행일지와 저작물에서 일베를 회상하거나 일베 유저에게 남긴 편지 등을 보면 어머니에 대한 글보다 훨씬 강한 친밀감이 드러난다.6

그러나 코플런드도 지적하듯, 남성계는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논리로 팽배해 있기에 우정과 돌봄을 제공할 수 없고, 결국 남성들의 외로움과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한국의 경우 이른바 ‘친목질 금지의 철칙’이 거의 모든 커뮤니티에 적용되고 있다.7 돌봄이나 우정이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애초에 커뮤니티 유저들 스스로가 다른 유저에게 그런 걸 기대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요컨대 남성계라는 공간은 교류 빈도 면에선 친밀하다고 볼 수 있지만, 공동체 관점에서는 너무나 ‘약한’ 결속이다. 남성계는 감정 공유가 활발히 일어남에도 부정적 감정이 긍정적 감정으로 전환되거나 혹은 스피노자 정서론의 맥락에서 ‘수동정서’가 ‘능동정서’로, 즉 비이성적 감정에서 이성적 감정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공간이 아니다. 그런데도 남성계가 나날이 팽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멸감과 울분, 이 고통스러운 감정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남성계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것임을 깨달을 때, ‘피해자 정체성’이 움튼다. “어 너도? 응 나도!” 이는 필연적으로 ‘가해자 찾기’를 동반한다. 때에 따라 가해자는 ‘꽃뱀’이 되거나 ‘김치녀’가 된다. 장대호가 가장 적대감을 보인 가해자는 이른바 ‘페미나치,’ 즉 페미니스트였다.

‘자유의 적들’이란 제목의 글에서 장대호는 페미니스트가 ‘나치’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언론권력을 장악해 독일 히틀러 시대의 나치 정권처럼 그들만의 사상을 법제화시켜 일반인들의 다양한 표현 자유를 억압하려 들기 때문이다.” 또 ‘남녀평등’ 글에서 “페미니즘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만 발생하는 집단이기주의 현상인데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결과의 평등, 공산주의를 표방”한다고 비난한다. 실제 나치는 공산주의와 극렬히 대립했지만 장대호에게 둘은 한 몸이다.

 

무기화된 피해자성, 권력 판타지에 빠지다

 

페미니즘이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인식 오류는 차치하더라도, 저 주장은 담론형식 차원에서 지극히 전형적이다. 언어학자 릴리 출리아라키의 개념을 빌리면 이는 ‘피해자성의 무기화’(weaponization of victimhood)다.8 이는 흔히 말하는 ‘피해자 코스프레’나 피해를 과장하는 행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피해자라는 지위를 통해 타인을 가해자로 규정하고, 기존 권력관계를 강화하거나 다른 집단의 피해를 주변화하는 과정까지 포함한다. 무기화된 피해자성은 결국 도덕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정당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남성계는 남성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 즉 우정과 돌봄 대신에 욕망하는 것, 권력 판타지를 제공한다. 떨쳐지지 않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치유하거나 승화하는 대신에 타자에게 그 고통을 전가하려 한다. 그것은 진짜 가해자가 아닌 엉뚱한 피해자를 향한 일종의 상징적 복수다. 물론 그런 방식으로 문제는 전혀 해결될 수 없다.

 

박권일 미디어사회학자

 

1. 장대호, ‘아웃사이더’, ‘장대호 저작물’ 2, 57쪽, 2020

2. 장대호, ‘인싸’, ‘장대호 저작물’ 2, 60쪽, 2020

3. M. Granovetter, ‘The Strength of Weak Ties’, The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78(6), 1360~1380쪽, 1973

4. 야콥 요한센 지음, 김정은 옮김, ‘온라인 청년 극우의 성차별, 인종주의, 여성혐오의 정신분석’, 학지사, 54쪽, 2025

5. 사이먼 제임스 코플런드 지음, 송은혜 옮김, ‘젊은 남성은 왜 분노하는가?’, 바다출판사, 168~169쪽, 2025

6. 성도현, ‘장대호 “아무리 화가 나도 살인하지 마라”… 일베에 편지’, 연합뉴스 2020년 3월12알

7. 정승환·김희은·김신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의 ‘친목질’의 행태와 폐해에 대한 탐색적 연구’, 디지털콘텐츠학회논문지, 19(8), 1471~1480쪽, 2018

8. L. Chouliaraki, ‘Wronged: The Weaponization of Victimhood’, Columbia University Press,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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