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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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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정한 주체가 결국 이데올로기를 뚫는다

우리 안의 극우 23. 반항하는 존재의 출현
전태일 분신과 로자 파크스의 ‘버스 보이콧’이 의미하는 것… “이름 없는 시민이 거대한 사회변화 견인”
등록 2026-04-14 15:59 수정 2026-04-14 16:09
1995년작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1995년작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오늘날 자본주의와 그 이데올로기는 중력처럼 자연스럽다. 하지만 처음 등장했을 때 그것은 당대의 지배적 관념과 정면충돌하는 기이한 것이었다. 그것은 낡아빠진 인습과 제도에 맞선 저항의 이념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가 얼마나 ‘혁신적’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랬기에 ‘공산당 선언’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견고한 모든 것은 공기 속으로 녹아들고, 신성한 모든 것은 모독되며, 마침내 인간은 냉철한 감각으로 자신의 삶의 진정한 조건과 동료와의 관계를 마주하게 된다.”

 

이데올로기 균열 동력 ‘시민 저항’

 

자본주의만이 아니다. 전제정치의 대안으로서 갱신된 근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또한 그러했다. 지금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거의 모든 것은, 옳든 그르든 간에, 기존 것에 대한 ‘안티’이자 ‘소수의견’으로서 등장했다. 그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많은 사람을 설득해서 주류로 자리 잡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새로운 생각이 점점 사회적 지지를 얻어가는 과정은 역사적 필연성, 예컨대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붕괴하고 공산주의로 이행한다는 식의 약속과는 꽤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지배 체제와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균열하고 전복될 수 있는가? 그 변화는 필연적이라기보다 우발적이다. 또한 이때의 우발성은 비유컨대 주사위 굴리기, 즉 독립시행 확률이라기보다 베이즈안 확률(Bayesian probability)에 가깝다. 표본과 변수가 정해진 주사위와 달리 사회현상은 너무 복잡해서 표본과 변수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베이즈안 확률은 이런 상황에 적절하다. 그것은 사전 확률과 경험을 통해 지속적으로 데이터를 보완하면서 실시간으로 사후 확률을 갱신해나갈 수 있다.

요컨대 체제의 균열과 대안의 출현은 필연적 과정이 아니며 그렇다고 완전한 무작위적 과정도 아니다. 이름 없던 한 시민의 반항(revolt)이 공고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위태로운 치부를 폭로하면서 거대한 사회변화를 끌어낸 사례는 적지 않다. 한국에서 대표적 사례는 전태일이었다. 1970년 11월13일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한 그의 죽음은 영원히 한국 현대사의 경로를 바꾸었다. 그렇다면 전태일은 이론화될 수 있는가? 전태일이라는 사건의 이론화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실패하고 대안 이데올로기가 성공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단초이면서 동시에 대중운동의 동학을 해명하는 중요한 퍼즐 조각이 된다.

 

‘매트릭스’보다 현실적인 ‘헤게모니’

 

주목할 만한 하나의 이론적 시도는 젠더 이론으로 잘 알려진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에게서 나왔다. 우리 논의의 맥락에 한정해서 버틀러의 이론을 요약하자면, 이것은 권력의 ‘호명’ 실패, 즉 지배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실패하게 되는지에 대한 해명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 이데올로기 개념, 즉 ‘매트릭스 모델’에는 주체가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는 ‘선택의 순간’이 존재한다. 그 선택의 순간을 상징하는 말이 바로 ‘빨간 약’이며 그 약을 먹고 나면 주체는 진실과 거짓, 현실과 환각을 명확히 구별할 수 있게 된다. 김계리 같은 극우 지지자나 김어준류 음모론자들의 세계관이 바로 ‘매트릭스 모델’이다. 그들에게 진실, 실재는 유일한 것이다. 다만 자신은 ‘계몽’됐기에 그 진실을 볼 수 있지만, 많은 사람이 사악한 권력자와 ‘기레기’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거나 감정에 휩쓸려 가짜를 진짜로 착각하고 있다고 여긴다.

현대의 이데올로기 및 주체 이론은 이렇게 순진한 진위 이분법을 가정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이유의 핵심은 그것이 실재를 그럴듯하게 모사(模寫)한 속임수라는 점이 아니라, 그것이 세계 속에 존재의 자리를 마련해준다는 점이다. 노예냐 주인이냐, 심지어 진실이냐 거짓이냐보다 중요한 것은 내 존재의 지속이고 그 의미이다. 알튀세르의 ‘호명’ 개념의 탁월성은 그렇게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데올로기를 해명한다는 점에서 나온다. 또한 그보다 훨씬 이전에 나온 그람시의 헤게모니(hegemony) 개념만 해도 대중의 동의를 통한 권력 모델이라는 점에서 적어도 ‘매트릭스 모델’보다는 정교하게 현실을 설명한다. 다만 계속해서 이론가들을 곤란하게 한 문제는, 이데올로기가 왜 잘 작동하다가 균열되거나 대체되는지, 즉 이데올로기의 성공과 실패를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느냐였다.

 

반복 통해 내면화되는 이데올로기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에서 의례(rituals), 곧 반복적 행위를 통한 내면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파스칼의 ‘팡세’에서 한 구절 “무릎을 꿇어라. 기도문을 읊조려라. 그러면 믿게 될 것이다”를 인용한 것이다. 파스칼의 정확한 인용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데올로기가 단지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신체적이라는 이 통찰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다만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 주체가 물질적(신체적)으로 어떻게 구성되고 재구성되는지는 상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주체가 ‘탄생’하는 기원적 순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권력의 ‘호명’은 이미 존재하는 주체를 ‘출현’시킬 뿐이라는 알튀세르의 관점을 고려하면 이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2024년 한국을 방문한 주디스 버틀러. 한겨레 자료

2024년 한국을 방문한 주디스 버틀러. 한겨레 자료


 

 

그러나 버틀러는 알튀세르의 설명에 만족하지 않는다. 주체는 항상-이미 존재하는 것이기에 그 기원을 물을 수 없다는 알튀세르의 주장에 원칙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버틀러는 “이름 부르는 행위가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행위인 한, 접근이 있기 전에 수취인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존재는 (호명에 의해) 뒤돌아서기 전에 이미 항복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1 그런데 이미 항복하고 있던 그 존재는 어떻게 권력에 맞서 반항할 수 있을까? 사회적 존재로서 의미를 유지하기 위해 예속에 굴복하는 주체가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버틀러는 여기에 답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의 개념을 가져온다.

 

“정체성은 절대로 상징계(the symbolic)에 의해 총체화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상징계가 정리(명령)하는 데 실패한 것이 혼란의 형태로 상상계(the imaginary)에 출현하기 때문이다.”2

 

현실 세계에서 정체성, 곧 주체는 일관되고 매끈하게 느껴지지만 실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있으며 언제든 균열하거나 변형될 수 있다. 주체는 정념적 애착을 가진 존재로서 고정된 정체성을 통해 자신을 사회적 존재로 만들어주는 법(권력)에 애착을 가진다. 그래서 이 존재는 호명에 돌아서기 전에 이미 항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행’은 기존 규범을 전복시킨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 존재의 자리를 부정하는 법의 호명은, 예컨대 내가 규범적 이성애 범주에서 벗어난 존재, 즉 ‘퀴어’일 때 그것을 부정하는 제도와 담론은 내 존재에 계속 부딪히며 봉합되지 못한다. 버틀러에 따르면 주체는 “자신을 반복하고 재접합해야만 주체로 남아 있을 수 있”으며 “일관성을 갖기 위해서 주체가 반복에 의존해야 하는데 이러한 반복이 주체의 불완전한 특징, 비일관성을 구성하게 된다”.3 이러한 반복의 양식이 바로 수행(performance)이다. 버틀러는 수행에 대한 역사적인 사례로 미국 민권운동가 로자 파크스를 든다.

로자 파커스의 버스 보이콧 운동 당시 상황을 재연한 사진. 위키미디어

로자 파커스의 버스 보이콧 운동 당시 상황을 재연한 사진. 위키미디어


 

“로자 파크스가 버스의 앞좌석에 앉았을 때, 그녀는 그렇게 행할 수 있는 과거의 권리를 갖지 못했다. 남부의 인종분리적인 관습 때문에 보장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과거의 권위를 갖지 못했던 그 권리를 요구함으로써 그녀는 그 행위에 어떤 권위를 부여했으며, 기존의 확립된 정당성 규범을 전복시키는 반란적인 과정을 시작했다.”4

버틀러에 따르면 파크스의 수행은 사회적 지위에 의해 미리 고정된 기능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퇴적된 것에 대한 비일상적 저항이다. 그리고 이 사례를 통해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habitus), 즉 ‘체화된 사회적 규범’이라는 개념을 비판한다. 아비투스 역시 알튀세르의 ‘호명’처럼 사회적으로 주체를 구성하는 기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버틀러는 부르디외가 “(수행적 발언이) 이미 사회적 권력을 지닌 자들이 발언할 때에만 오로지 효과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권력의 여백으로부터 출현하는 행위능력의 가능성을 무심코 배제한다”고 주장한다.5 요컨대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은 사회적 권력의 작동 방식은 잘 설명해주지만 저항의 가능성은 사유하지 못한다는 비판이다.

 

저항 성공하려면 ‘인정’ 획득해야

 

버틀러의 비판은 일리 있으나 한편으로 과도해 보이기도 한다. 부르디외의 장(field) 이론에서 행위자는 구조의 조종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아니다. 그는 장이라는 게임의 규칙을 암묵적으로 체화하고, 그 속에서 인정(recognition)을 획득하기 위해 다양하고 때로 임기응변적인 전략을 구사하는 존재다. 그것이 바로 ‘실천 감각’(practical sense)이다. 다만 부르디외는 지배집단에 대항하는 수행적 저항이 그렇게 쉽게 성공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권위에 맞서는 자 또한 어떤 식으로든 권위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권력에서 배제된 주변부의 저항자들 또한 그 저항이 성공적이려면 나름의 정당화 논리를 통해 ‘인정’을 획득해야 한다.6

이에 대해 버틀러는 “권위를 부여받지 않고서도 권위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분명 가능하다”면서 결정적 질문을 던진다. “‘자유’나 ‘민주주의’를 주장할 수 있는 사회적 권력을 부정당한 자들이 지배담론으로부터 그런 용어들을 전유하여 (…) 재기술하거나 재의미부여할 때 무슨 일이 생길까?”7

이제 논의는 정당화(justification)의 문제로 넘어간다. 그것은 극우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많은 사람에게 지지되고 또 확산되는지에 관한 분석이기도 하다.

 

박권일 미디어사회학자

 

1. 주디스 버틀러, 강경덕·김세서리아 옮김, ‘권력의 정신적 삶’, 그린비, 164~165쪽, 2019

2. 같은 책, 144쪽

3. 같은 책, 147쪽

4. 주디스 버틀러, 유민석 옮김, ‘혐오 발언’, 알렙, 281쪽, 2022

5. 같은 책, 296쪽

6. Bourdieu, P., edit. Thompson, J. B., trans. Raymond, G. & Adamson, M., ‘Language and Symbolic Power’, Polity Press, pp46~56, 1991

7. 주디스 버틀러, 유민석 옮김, ‘혐오 발언’, 알렙, 299쪽,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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