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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사랑, 가난한 사랑

등록 2026-10-08 21:08수정 2026-10-11 08:46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무슨 일이 생겼다. 자정이 넘어 인스타그램에 새로 올라온 윤수(가명)의 영상을 본 순간 직감했다. 입술을 굳게 다문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눈동자가 어찌나 검은지 플래시를 비춰보지 않아도 동공반사가 일어나지 않음을 알 것 같았다. 몸을 이리저리 흔드는 엄마의 손길에도 미동조차 없는 텅 빈 두 눈. 영상 아래 달린 #의식불명 #산포급락이라는 해시태그가 선명했다. #내일퇴원이라는 게시물을 본 게 겨우 몇 시간 전인데. 사전 미팅 때 처음 병원에서 본 윤수 어머니의 눈빛이 떠올랐다. 울분과 체념, 고마움과 수치심이 한데 뒤엉켜 결국 울음으로 말끝을 맺는 와중에도 그는 연신 휠체어에 앉은 아들의 눈가와 입가를 닦아주었다. 악성 뇌종양으로 2년째 투병 중인 열 살 윤수는 자기 손으로 눈물조차 닦을 수 없었다.

 

영화 속 예지처럼 나는 사랑할 수 없네

 

잠옷 차림으로 노트북 앞에 앉아 마감이 네 시간쯤 남은 원고를 손보고 있던 나는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시각이면 강남 병원까지는 한 시간이 안 걸릴 테고, 가는 동안 택시 안에서 원고를 마무리하고, 피디(PD)에겐 날이 밝으면 전화를 하고, 일단 회사에 들러서…. 노트북 충전기를 가방에 넣다 말고 불쑥 떠오른 생각이 나를 멈추게 했다. 회사에 들러서… 카메라를 챙겨야 하나?

지금까지 몇 사람의 눈물을 봤을까? 촬영 중 내 앞에서 울컥한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을 나는 절반도 기억하지 못한다. 동료 피디의 뼈 있는 말에 따르면 나는 ‘즙 짜는’ 데 도가 튼 사람. 울컥하게 하는 질문을 잘 던진다는 뜻만은 아니다. 인터뷰 중 누군가 눈물을 흘릴 때, 얼마큼 기다리고, 언제 휴지를 건네주고, 어떤 타이밍에 ‘왜 눈물이 나셨어요?’ 하고 물어야 할지, 나는 언제부턴가 그 호흡을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다. 편집 없이 그대로 쭉 쓸 수 있는 20여 초.

촬영 중에는 뒤늦게 생긴 절친인 양 가능한 한 모든 사랑을 쏟지만 돌아서면 잊어야 하는 것이 이 일을 하며 보일 수 있는, 가난하기 짝이 없는 나의 사랑. 가난한 나는 영화 ‘가능한 사랑’의 주인공 예지처럼 하나의 다큐멘터리에 오래 매달릴 수 없고, 머릿속에는 늘 동시에 서너 개 프로그램과 거기에 출연하는 십수 명, 그들을 보면 떠오르는 과거의 수많은 출연자가 빙빙 돌고 있다. 밑바닥이 보일 때까지 박박 긁어도 결국 모자라고 말 사랑이라는 사실에 슬퍼하기에는, 당장 내일 또 ‘깊은 경애의 마음’을 고백하며 섭외해야 할 사람이 있다.

 

자본과도 결혼 못한 어정쩡한 동거인

 

동이 터올 때까지 나는 카메라를 챙길지 말지 결정하지 못했고, 그사이 윤수의 어머니에게 메시지가 왔다. ‘작가님, 결국 중환자실이에요. 하루 한 번 면회니 안부 계속 전할게요.’ 가을 아침 바람이 차디찼다. 따끈한 죽이라도 사가서 어머니 저 배고파요, 같이 먹어요, 하고 너스레를 떨어볼까. 담요라도 챙겨 가볼까. 뒤늦게 떠오르는 수많은 사랑의 방식은 이미 무용했다. 내가 가장 먼저 챙길지 말지 고민한 것은 윤수의 어머니도 아니고, 윤수도 아니고, 그들에 대한 나의 사랑도 아니고, 카메라였으니까. 이 정도가 나의 가능한 사랑이라는 사실에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 위선이라는 자의식을 버리고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세상과 이 일에 대한 나의 예의라고, 부득부득 우기며 다시 노트북 앞에 앉는다. 거장은 이를 두고 “자본과 결혼한 삶인지도 모른다”는 우아한 표현을 썼지만, 나는 늘 이도 저도 못하는 어정쩡한 동거인으로 살 뿐이다.

 

김영희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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