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레이션 슬로우어스
오랜 지인이 얼마 전 생활용품 전문점에 취업했다. 평생 지식노동만 해온 그에게 육체노동은 사뭇 생경했다. 짐을 나르고 분류하고 진열하고 정리하는 일상이 반복됐다.
몇 달 뒤 만난 그는 이전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체중이 줄고 근육량이 늘어 정신적으로도 한결 건강해졌다고 했다. 자기계발의 압박에 시달리던 지식노동자의 괴로움에서 해방된 그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묻어났다. 평소 술을 안 마시던 그였지만 고된 일상을 마친 뒤 시원한 맥주가 당기는 마음을 비로소 이해했다고 했다.
다시 몇 달이 흘렀다. 이번에 만난 그는 훨씬 지쳐 보였다. 끝없이 반복되는 고된 노동이 쉬울 리 없겠지만, 어떤 점이 힘든지 묻는 내게 돌아온 답변은 뜻밖이었다.
“사소한 것으로 힘들게 하는 진상 고객이 생각보다 많아.”
그의 설명은 이랬다. 특별히 윽박지르거나 과도한 요구를 하지 않더라도 사소한 행동으로 직원들의 피로를 유발하는 손님이 많다는 것이다. 예컨대 음식물을 들고 들어와 흘리는 사람, 반출 불가한 카트를 주차장까지 가져가겠다는 사람, 셀프 계산대 이용 미숙으로 도움을 요청하며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 등. 언젠가 나 역시 한 번쯤 해본 행동들이었다.
이런 작은 행동은 직원에게 한 번의 설명, 한 번의 잔일을 더 하게 만든다. 고객 응대가 길어질수록 일은 뒤로 밀린다. 문제는 이런 사소한 요청이 잦다는 데 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 하지 않던가. 사소한 일도 모이면 큰 업무 스트레스가 된다. 그가 말한 진상 고객은 다름 아닌 나였다.
한편 그와의 대화를 통해 장애인으로서 무언가를 요구하는 위치에 자주 서게 되는 나 자신을 돌아봤다. 학교 업무를 위해 갖춰져야 하는 각종 편의, 물리적·정보 접근 조치, 일상생활의 잡다한 고려사항 등 남들과 동등한 권리와 삶의 질을 누리기 위해 사회에 요구해야 하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마땅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진상 고객이 되는 것 사이의 경계는 과연 어디쯤일까?
가령 내가 교내 이동 경로에 점자 보도블록을 깔아달라고 요청하면, 대부분의 교장 선생님은 합리적인 요구로 보고 흔쾌히 수용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율 배식 식당에서 매일 내 식사를 차려달라고 요청하면 어떨까?
실제로 후자는 최근까지도 장애인 노동자에게 배치되는 근로지원인의 업무 범위를 둘러싼 주요 쟁점이었다. 그간 식사나 화장실 이용은 일상생활이라는 이유로 지원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그 때문에 많은 지인이 직장에선 화장실에 가는 것을 참거나 식사를 거르는 일이 허다했다.
2026년 1월에 와서야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은 근로지원인 업무에 ‘근무 중 생활 지원’을 포함했다. 이로써 식사나 화장실 지원을 받게 해달라는 장애인 노동자의 요구가 ‘진상 고객의 목소리’에서 정당한 권리로 승격된 셈이다.
이처럼 정당한 권리는 유난스러운 요구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남을 배려하지 않는 과도한 요구는 조심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어떤 요구를 단편적으로 진상 고객의 목소리로 함부로 치부해서도 안 된다.
권리와 진상의 경계는 결코 개인이 가진 염치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타인의 입장을 얼마나 섬세하게 고려해줄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인 동시에, 이 사회가 타인의 불편과 수고를 어디까지 안아줄 준비가 돼 있는지 묻는 관용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서로의 번거로움을 조금 더 느긋하게 품어줄 수 있다면, 권리와 ‘진상’을 가르는 그 모호한 경계도 한결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오늘 하루도 타인의 소소한 무례함을 조심스럽게 참아냈을 지인과, 저마다의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해 조금씩 목소리를 높였을 이들에게 조용히 안부를 건넨다.
김헌용 신명중 교사·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동조합 위원장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한국대사 부르고 초치 대신 “초청” 표현…우크라 “외교, 감정보다 우선”
![민주 지지율 35%, 정부 출범 뒤 최저…이 대통령 부정평가 5%p↓ [갤럽] 민주 지지율 35%, 정부 출범 뒤 최저…이 대통령 부정평가 5%p↓ [갤럽]](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6/1009/53_17915113550847_20261009500658.jpg)
민주 지지율 35%, 정부 출범 뒤 최저…이 대통령 부정평가 5%p↓ [갤럽]

‘한국 헤비메탈 1세대’ 블랙신드롬 보컬 박영철 별세…향년 61

“한동훈 장관 때, 딸 수사 국제공조 불송부…직권남용 수사감” 박균택 직격

김여정 “한국 쓰레기들…” 14시간 만에 또 의료장비 지원 비난 입장문
![[단독] 한동훈 딸 수사 ‘국제 공조 요청’, 검찰서 자체 중단 [단독] 한동훈 딸 수사 ‘국제 공조 요청’, 검찰서 자체 중단](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6/1008/53_17914280735763_20261008501403.jpg)
[단독] 한동훈 딸 수사 ‘국제 공조 요청’, 검찰서 자체 중단

직계 아니면 사망진단서도 못 뗀다…‘무연고사’ 장례 절차 간소화해야

‘남우주연상’ 유해진, 부일영화상 불참…‘암살자(들)’ 무대인사 취소
![‘당당한 주름’의 정면돌파 [유레카] ‘당당한 주름’의 정면돌파 [유레카]](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6/1007/53_17913646119387_20261007503499.jpg)
‘당당한 주름’의 정면돌파 [유레카]
![조희대는 무엇으로부터 ‘독립’ 하고 싶은가 [권김현영의 사건 이후] 조희대는 무엇으로부터 ‘독립’ 하고 싶은가 [권김현영의 사건 이후]](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6/1008/53_17914543714562_20261008503226.jpg)
조희대는 무엇으로부터 ‘독립’ 하고 싶은가 [권김현영의 사건 이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