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책장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지. 나도 그럴까? 여성 독립군 열전, 암의 종말, 뉴턴의 전기, 한국어학의 이해, 패턴을 소개하는 아트북, 리더의 질문법, 문학 비평집 등이 두서없이 꽂힌 내 책장을 보고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뿐이다. 그동안 별의별 아이템을 했구나.
내 옷장 역시 책장만큼이나 중구난방인데, 가장 이질적인 섹션은 ‘촬영복’으로 분류한 옷들이다. 검은색 무지 티와 얇은 소재의 체크무늬 셔츠, 주머니가 많은 바지와 조끼, 토시와 페이스 커버. 구매 기준은 명확했다. 색이 어두워 눈에 잘 띄지 않는가? 물에 젖어도 쉽게 마르는가? 흙이 묻어도 쉽게 털어낼 수 있는가? 촬영을 다니기 전에는 한 번도 장바구니에 넣지 않았던 이 ‘촬영복’들은 다른 옷들과 함께 세탁기에 들어간 적조차 없다. 출장이 끝나기 전날 밤 코인 세탁방에 들러 한꺼번에 세탁하고 통째로 캐리어에 담아 온다. 바닷물에 젖어 버석거리는 바지나 땀에 절었던 셔츠를 다른 옷과 함께 빨면 안 된다는 걸, 나는 일을 시작한 후에야 알았다.
추울 때는 두꺼운 패딩보다 얇은 옷을 여러 겹 껴입는 게 따뜻하다는 것, 더울수록 반소매보다 온몸을 덮는 옷이 필요하다는 것 역시 일하며 알게 된 새로운 사실. 부끄럽게도 나는 이 옷들을 걸친 내 몸이 꽤 마음에 들었더랬다. 저는 책상 앞에만 앉아서 뭣도 모르고 글만 끄적거리는 작가가 아니에요, 땀 흘리고 몸 쓰는 노동에 관해서 조금은 안답니다, 라고 우길 수 있을 것 같은 오만함이겠지.
여름이 끝날 무렵 이 글을 쓰며 뒤늦게 얼굴이 화끈거리는 까닭은 그 오만함 때문이다. 35도에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촬영을 나갔다가 양팔과 목덜미에 생겼던 화상은 이제 흔적조차 없다. 한 번 덴 후로는 직사광선에 대처하는 현장의 팁을 꼬박꼬박 따랐기 때문이다. 인간이 적응의 동물로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 몸 쓰는 일이라도 정보는 결국 언어화돼 전해진다. 내가 얻은 현장의 팁이라는 것도 결국 누군가에게서 주워들은 것, 누군가 내게 메시지로 보내준 구매 링크였다. 내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면? 작가님, 토시는 이게 제일 좋아요, 하고 친절하게 온라인 구매 링크를 보내주지 않았다면? 클릭 몇 번으로 그것들을 구매하지 못했다면? 나는 과연 ‘땀 흘리는 기쁨’으로 그 시간을 기억할 수 있었을까?
2026년 경기도 지역 첫 온열질환 사망자는 60대 외국인 노동자였다. 퇴근 후 차 안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그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하루 만에 사망했다. 몇 주 후, 30대 외국인 노동자가 또 숨졌다. 태양이 가장 뜨겁게 내리쬐는 오후 2시, 그는 밭일을 하던 중 몸이 좋지 않다며 휴식하러 가다 수풀에 쓰러졌고 약 28시간 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
그들은 알았을까? 모자와 토시는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라는 걸, 바짓단 아래로 땀이 뚝뚝 흘러내릴 정도가 되면 일을 멈춰야 한다는 걸, 쉴 때는 온몸을 가리던 작업복을 잠시라도 걷어내고 숨통을 틔워줘야 한다는 걸. 매년 여름 외국인 계절노동자로 한국에 들어오는 이들은 별도의 한국어능력시험을 치르지 않는다. 일터에는 말없이 몸을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린다. 누구도 그들에게 선뜻 한국어로 말을 걸지 않는다. 카메라 뒤에 서 있던 나 역시 그랬다. 모두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빨리 끝나면 좋겠다.
길었던 여름이 끝났다. 나는 살아서 그 시간을 말하고, 누군가는 그러지 못한다.
김영희 방송작가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340만원 내고 한국 일하러 왔더니…변기 없는 ‘집’과 발길질 [6411의 목소리] 340만원 내고 한국 일하러 왔더니…변기 없는 ‘집’과 발길질 [6411의 목소리]](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6/0906/53_17886877116162_20260906501694.jpg)
340만원 내고 한국 일하러 왔더니…변기 없는 ‘집’과 발길질 [6411의 목소리]

“어르신, 어떠세요” 말 거는 돌봄…요양보호사 처우 개선 ‘간병지원’ 덕분에

‘호르무즈 현지 조사단’ 파견한 정부…파병 준비 절차 착수

아파트 250m 앞 200㎿ 데이터센터라니…무안 주민 분통
![[단독] 대미투자 이달 말 첫 송금…미 웨스팅하우스 지분도 매입 [단독] 대미투자 이달 말 첫 송금…미 웨스팅하우스 지분도 매입](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6/0908/53_17888621893662_20260908503691.jpg)
[단독] 대미투자 이달 말 첫 송금…미 웨스팅하우스 지분도 매입
![이재명 정부의 위기, 지지율보다 더 심각한 것 [신진욱의 시선] 이재명 정부의 위기, 지지율보다 더 심각한 것 [신진욱의 시선]](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original/2026/0909/20260909500083.jpg)
이재명 정부의 위기, 지지율보다 더 심각한 것 [신진욱의 시선]

시민단체 “추미애, 재정 비상이라더니 12억 전세 관사 입주…자기모순”

이 대통령, 마크롱과 정상회담 “호르무즈 항행 자유 위해 긴밀히 공조”

“한동훈 검찰 내부자료 유출, 되치기 당해”…박민영에 홍준표 “참 똑똑”

5만원 신사임당·5천원 율곡 그린 한국화 거장 이종상 화백 별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