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성형 인공지능 ‘제미나이’에 ‘다양한 성별과 인종의 인물이 등장하는 알렉산더 테크닉 이미지를 그려달라’는 지시어를 입력해서 생성한 이미지.
말과 글에 능숙해지면 자신을 더 잘 표현할 것 같지만 실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우리의 무의식이란 교활하고 유능해서, 유려하고 단정한 언어 뒤로 자신의 마주하고 싶지 않은 면을 곧잘 숨기곤 한다.
한동안 내가 가진 여러 사회적, 심리적 문제를 언어로 돌보고 돌파해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를 비롯한 글쟁이들이 하나 마나 한 옳은 말을 반복하는 데 너무 익숙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달음 혹은 이해 자체에 중독된 느낌. 우리가 말이 부족해서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게 아닌데도.
언어적 통찰의 카타르시스를 너무 빨리 느껴버리고 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공유하는 현실을 바꿀 동력이 떨어져버리게 된다. 그냥 혼자 깨달았을 뿐인데 주어진 현실을 바꾸기도 전에 심리적 만족감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지혜로워진 “느낌”을 가졌을 뿐이지 아직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익숙한 패턴을 부수고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는 영영 그럴 것이다.
고립된 자기만의 현실에서 지혜로워지는 건 세상 밖으로 나가 잘 변화하지 않는 상대와 씨름하는 일보다 훨씬 간편하고 안전하다. 게다가 그 통찰이 아름답고 충분히 복잡하다면, 생각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훨씬 더 용이하고 만족스러워진다. 나는 그런 스도쿠 같은 말놀이를 정말 싫어한다. 스도쿠 퀴즈를 풀면 머리를 굴리며 해답을 찾아나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지만, 스도쿠 바깥 세상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나 역시 종종 스도쿠 같은 말놀이의 함정에 빠지곤 한다.
이런 몹쓸 습관을 고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외국어를 배우고 사용하면서 말과 글을 일부러 어눌하게 만들기도 하고, 나를 환영하지 않는 곳에서 버티며 평소랑은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는 법을 배우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중 요즘 가장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은 보디워크(Bodywork)다.
보디워크는 손이나 신체 개입을 통해 몸의 구조, 움직임, 긴장도를 다뤄서 신체적·정서적 균형을 회복시키려는 다양한 치료 및 이완 기법을 통칭하는 말이다. 서양의학의 물리치료와는 결이 다르게, 몸과 마음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보는 전인적(Holistic) 관점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전문 배우나 무용수가 아닌 이상 몸으로 거짓말하기는 쉽지 않으니까, 정직하게 반응하는 몸을 살펴봄으로써 오래된 습관을 자각하거나 고쳐나가는 방식이다.
나는 독일 베를린에서 보디워크를 처음 알게 되었다. 마약 카르텔을 피해, 전쟁을 피해, 성차별을 피해, 동성애 혐오를 피해 베를린으로 몰려든 사람들을 위한 치료적 보디워크가 도시 곳곳에 많았다. 외국인과 이민자가 많다보니 언어 외에 다른 방법이 필요하기도 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보디워크는 아직 낯선 분야이지만 곳곳에 센터가 생기고 있다. 우선 알렉산더 테크닉, 펠든크라이스, 바디마인드센터링(BMC) 등이 있고 요가나 타이 마사지, 일본에서 발전한 지압 마사지인 시아추도 보디워크다. 그중에서도 알렉산더 테크닉은 가장 제도화된 보디워크 중 하나다. 터치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그나마 권할 만한 보디워크이기도 하다. 알렉산더 테크닉은 몸을 움직이고 사용하는 습관적인 방식을 자각하고 재교육해서 불필요한 긴장 없이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도록 돕는 기법이다. 마사지처럼 누군가 손으로 몸을 치료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자세와 움직임 패턴을 알아차리고 바꿔나가는 학습 과정에 가깝다. 19세기 말 오스트레일리아의 배우 프레더릭 마티아스 알렉산더가 처음 만들었고, 배우나 성악가, 연주자들이 발성과 호흡, 무대 위에서의 긴장을 관리하기 위해 많이 배운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 어느 누가 자신을 축소하라는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몸의 심리적 크기뿐 아니라 실제 물리적 크기마저 더 작게, 마르게, 종잇장처럼 얇게 만드는 것이 여성스러운 아름다움으로 여겨지는 극도의 외모정병 사회에서. 게티이미지뱅크
알렉산더 테크닉 수업을 받던 어느 날 나는 교사의 지시에 따라 목표물을 향해 걸어보았다. 나도 모르게 잰걸음으로 걸었던 것 같다. 그 뒤 교사는 말로 동작의 신호를 줘서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나의 긴장 반응을 자각시키고 더 편안한 걸음을 유도했다. “정수리가 하늘로 살짝 떠오르듯 걸으세요. 목 뒤가 자유로워지면서 머리가 앞과 위로 가볍게 떠오르는 느낌으로요. 등과 어깨가 옆으로 넓어지고, 넓어진 골반에서부터 다리가 길게 뻗어 나가게요.”
주의 깊게 듣고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걷자 혼자 평소대로 걸을 때보다 몸이 길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보폭도 넓어진 느낌이었다. 그러니 목표물에 더 빨리 도달했다. 내 몸이 긴장된 상태일 때보다 커진 느낌이었다. 지켜보던 교사는 겉에서 보기에도 내 몸과 보폭이 커졌다고 했다.
길어지고 넓어지는 느낌. 그러자 내가 즉각적으로 한 생각은 “이래도 돼?”였다. “이래도 돼?”라는 생각은 내가 신체적으로 편안함을 느낄 때마다 반복해서 떠올랐다. 앉은 자세에서 교사가 천골(척추의 아래 끝부분에 있는 이등변삼각형의 뼈)에 손바닥을 갖다 대 신호를 주어 자세가 내게 더 편안한 상태가 됐을 때도 같은 생각을 자동으로 했다. “이래도 돼? 편안해도 돼?”
힘주지 않는 상태, 내가 더 길어지고 넓어지는 상태가 될 때 반복적으로 나는 누군지도 모를 상대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정말 이래도 되나요?” 마치 오랫동안 편안한 상태를 금지당한 것처럼.
그대로 말하니 교사는 대답했다. “이래도 돼요. 낯설고 어색한 느낌이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바른 자세 그리고 편안한 자세를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끼는 상태이니 계속 지시를 주어 몸이 완전히 받아들일 때까지 반복해야 합니다.”
내 몸이 언제 작아지는 느낌이 드는지 써보라고 해서 나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상호작용할 때. 특히 한국에서 일을 할 때.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 할 것 같을 때.”
그리고 내 몸이 언제 커지는 느낌이 드는지 써보라고 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베를린 거리를 걸을 때. 한바탕 자유롭게 춤을 추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서.”
수업을 반복하면서, 오랫동안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상호작용할 때 몸을 실제보다 작게 만들어왔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나대로 자연스럽게 있다면 내 크기와 내 존재감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테니까. 여자가 그렇게 드세면 아무래도 좀 비호감이니까. 도드라지면 공격의 대상이 되곤 하니까. 다름 아닌 같은 여자들에게 가장 먼저 공격받을 테니까. 불편한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 평소보다 더 많이 웃고, 부러 크기를 더 작게 하고, 더 다정하고 상냥하고 무해해 보이게, 알고도 모르는 척하느라고 진이 다 빠질 정도로 지쳤다는 걸 몸을 움직이며 천천히 알아간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 어느 누가 자신을 축소하라는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몸의 심리적 크기뿐 아니라 실제 물리적 크기마저 더 작게, 마르게, 종잇장처럼 얇게 만드는 것이 여성스러운 아름다움으로 여겨지는 극도의 ‘외모정병’ 사회에서…. 천하의 래퍼 이영지조차 스몰 걸 판타지가 있다며 노래를 부르는 이 사회에서….
아직도 헷갈린다. 공간을 차지하는 일이 정말 나쁜 건지. 어느 정도가 자기 몫의 정당한 자리이고 어느 정도가 과욕인 건지. 여성들이 자신의 성장에 쓸 수 있는 힘을 너무 오랫동안 주변을 돌보는 데만 사용해온 것은 아닌지. 그럴 때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닌지. 성장하고 싶은 마음, 더 크고 싶은 마음을 오랫동안 감추고 억압해왔기에 그런 욕망을 감추지 않는 여자가 미운 건 아닌지. 세상은 여성이 진짜로 유능해질수록, 강해질수록, 그래서 위협적인 인물이 되어갈수록 그의 존재를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여성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하여 이번 칼럼의 주제, 여성들의 “나쁜 피”는 곧 자신의 몸집을 수치스러워하는 마음이다. 자신의 재능과 가능성을 펼치기를 두려워하며 크기를 줄이는 일이 곧 사람들로부터 진정으로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하는 아둔함이다.
베를린행을 앞두고 끝없이 망설이던 나를 답답해하며 어떤 언니가 해준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 겸손함이라고 쉽게 착각해요. 진짜 겸손함은 그런 게 아니에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와 가능성을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해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겸손한 거예요.”
알렉산더 테크닉 수업에서 이 말을 몸으로 다시, 반복해서 만난다. 정수리를 바로 세우고 등이 넓어질 때마다, 몸이 편안하고 커질 때마다 올라오는 “이래도 돼?”라는 질문은, 내가 그 말을 머리로는 옳다 여기면서도 몸으로는 여전히 거부하고 있다는 증거다. 겸손과 자기 축소를 구별할 줄 모르고 걸음 하나 앉음새 하나부터 여전히 눈치 보며 누군가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다.
베를린 거리를 걸을 때, 춤추고 돌아오는 길에 몸이 커지는 걸 느꼈다고 앞서 적었던 문장을 다시 들여다본다. 장소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장소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돌려놓고 싶다. 그것은 어쩌면 허락의 문제였을지 모른다. 한국으로부터 8천㎞ 떨어진 뒤에야 내가 스스로 허락한 것, 관계 맺고 있던 모든 사람으로부터 멀어진 뒤에야 허락한 것, 그것을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허락하고 싶다. 내 몸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집이 되는 곳으로 만들면서 말이다. 그날 교사가 건넨 말 그대로, 이대로 된다고, 편안해도 된다고, 내가 가진 만큼, 딱 그만큼의 자리를 차지하고 서는 것. 그것이 요즘 내가 몸으로 다시 배우는 겸손이다.
하미나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 저자
*하미나의 나쁜 피: 공격성은 인간의 기본 특성이자 생명체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지니고 길러야 할 자질입니다. 터부시돼온 여성들의 공격성에 대해 말합니다. 4주마다 연재.
https://h21.hani.co.kr/arti/SERIES/3425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유해진 생긴 게 “북한상”…국힘 쪽 “노무현 미는자(들)” 음모론까지

정은경 “기초연금 목표수급률, 소득 기준으로 변경 필요”

DMZ 북 지뢰 1발 추가발견…강 국방 “정전협정 위반 명백”

해가 사라진 도쿄, 34일 연속 ‘비’…140년 만에 무슨 일이?

“숨쿠고 모르는 사람 많을끼라…10월항쟁 유족인 나맹키로”

역풍 우려에…민주, 조작기소 특검법 처리 국감 뒤로 연기

군 ‘DMZ 지뢰 폭발’ 엿새 만에 조사…폭발지점 뒤늦게 정정, 장병증언 흘려들어

한동훈 또 “똥별” 비하에…김병주 “작전의 ‘작’ 자도 모르면서 군 망가뜨려”

외교부 “우크라 ‘포로송환 공개’ 사과 요구에 답변 아직 없어”
![[인터뷰] 구글 떠난 연구원 “AI는 스스로 자란다, 해결책도 없다” [인터뷰] 구글 떠난 연구원 “AI는 스스로 자란다, 해결책도 없다”](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6/0929/53_17906322842319_20260928503585.jpg)
[인터뷰] 구글 떠난 연구원 “AI는 스스로 자란다, 해결책도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