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 구글 제미나이에 “로맨스와 관련한 이미지를 만들어줘”라는 지시어를 입력해 생성한 이미지.
학교에서 교사 생활하며 살림을 책임지고 아이를 키우느라 자기를 돌볼 시간이 없었던 한 교사는 오스카 와일드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평생에 걸친 로맨스의 시작이다”라는 문장을 보고 자기 삶에서 놓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자기 자신이었다. 다른 사람을 돌보고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느라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방식으로 살고 싶은 사람인지, 자기를 사랑하기를 잊어버린 것이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로맨스의 시작이라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로맨스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이 말을 늘 기억했다가 적당한 순간에 사람들에게 말해주곤 했다. ‘로맨스’ 없는 삶이란 얼마나 밋밋하고 싱거운가. 사람들은 이 말에 멋지다고 곧잘 반응했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 말을 들려줬다. “어때 멋지지?” 그런데 돌아오는 반응이 충격적이었다. 이전의 학생들이 보였던 반응과 완전히 달랐다. 얼굴이 뻣뻣하게 굳으면서 멈칫거렸다. 그리고 한 학생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연애를 못할 것이란 말씀인가요? 연애를 못하니까 혼자서 잘 살아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예언이신가요?”
순간 학생들을 엄습한 공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가 근무하는 학교의 학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한다. 공부에 전념하느라 연애하는 학생이 별로 없다. 일본 애니메이션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럴 여유가 학생들의 마음속에 없다. 그래서 학생들끼리도 우리가 대학 간다고 연애할 수 있을까라는 자조적인 대화를 주고받는다고 한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로맨스의 출발점이라고 했지만 그 말이 남을 사랑하는 것, 즉 연애할 가능성이 없으니 자기나 사랑하라는 말로 들린 것이다. 자기에 대한 사랑과 로맨스가 연결되지 않고 양자선택의 문제로 받아들여진다.

일본 애니메이션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텔레비전 화면 갈무리.
연애뿐만이 아니다. 많은 교사와 학부모가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친한데 친하지 않은 사이’다. 겉으로 보면 매우 친한데 친한 사이라면 서로 알고 있고 나누어야 하는 것을 나누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점심이면 꼭 같이 밥을 먹는 ‘커플’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연속해서 강의에 나오지 않길래 수업 중간 휴식 시간에 수업에 나온 학생에게 물어봤다. “○○씨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아세요? 지난주에도 수업에 나오지 않았잖아요.”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둘이 점심을 같이 먹기는 하지만 그 정도까지 친한 사이는 아니라고 한다. 나오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가보다 생각하는 거지, 굳이 걱정하고 물어보는 그런 사이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 이야기를 ‘어른’들에게 들려주면 하나같이 같은 반응을 보인다. “친하지도 않은데 왜 같이 밥을 먹어?” 반면 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비슷한 사례를 많이 들려준다. 담임이 된 다음에 같은 반 친구들끼리 잘 지내자고 말했더니 어떤 학생이 정색하며 “같은 반이라고 해서 친구인 것은 아니다”라고 해서 당황했다는 이야기도 한다.
제법 오래 학생들을 가르치며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이럴 때는 더 물어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이 친한 사이 아니었어요?”라고 물어보는 것 자체가 무례하고 침해에 해당하는 일이다. 그 말에는 친구라면 당연히 걱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뜻이 담겼고 그것은 윤리적 비난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학생들이 굳이 ‘친구’라고 서로를 말하지 않는 이유는 이런 고전적인 윤리적 비난을 이미 너무 많이 당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관계에는 너무 무거운 윤리가 규정돼 있다.
대학에 들어와 연애를 하면 그 반대의 경우가 많이 생긴다. 고등학교 때는 자기가 연애하지 못할까봐 걱정이지만 대학에 들어오면 연애가 너무 피곤하다는 것을 실감하며 살아간다. 한 학생은 어느 날 일방적으로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받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너무 힘들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연인 없이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눕자마자 너무 편했다고 한다. 실랑이를 포함해 그 지겹고 소모적인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다시는 이런 지긋지긋한 것을 반복하고 싶지 않더란다. 그 뒤로도 몇 번 연애했지만 침대에 누웠을 때의 그 편안함을 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관계 공포’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사람은 모두 연결된 존재라고 하지만 그 연결은 짐이기도 하다. 관계가 맺어지는 순간 이름이 붙고 이름에는 언제나 그에 걸맞게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한다는 덕목으로서의 의무 조항이 붙는다. 그 대부분은 자기의 감정과 이익을 통제해야 하는 고통을 유발한다. 관계는 고통이다. 내가 주인으로서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착취하는 관계가 아닌 이상 관계는 고통이다.
‘손절사회’의 저자 이승연씨가 말하듯 자신에게 고통을 일으키는 일체의 것과 손절하고 자기를 돌보고 치유해야 하는 ‘치유 요법 문화’의 관점에서 보면 관계 자체가 자아에게 해가 되는 의심스러운 것이다. 이 문화에서는 자아가 아니라 관계를 의심해야 한다. 여기서는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는 말로 관계를 윤리화하는 진보/좌파의 언어가 대중에게 받아들여질 여지가 극히 적다. 오히려 관계로부터 (규정되는 도덕적 의무에서) 자아를 해방하는 ‘자유’의 언어가 더 매력적이다. 여기에 개인이든 국가든 종교든 극우가 전면화한 ‘자기보존’ 이외의 덕목(virtue) 따위가 들어설 여지는 없다.
관계에 대한 의심은 동시대인의 현실적 경험이기도 하다. 관계에 대한 동시대인의 가장 기초적인 감정은 ‘배신’에 대한 토로다. 더할 나위 없이 튼튼했던 관계가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배신’의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개인적 관계뿐만이 아니다. 정치에서도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배신’이다. 상대를 배신자로 낙인찍는 것이 매우 효율적인 정치 수법이 되었고, 배신을 응징하고 복수하는 것이 정치의 가장 중요한 동기이자 목적이 되었다. 감정사회학자 에바 일루즈의 말처럼, 이런 세상에서는 신의를 저버린 자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의를 기대하고 믿은 자가 어리석은 자가 된다.
관계가 자아를 삼킬지 모른다고 의심하는 것과 언제 배신과 외면이 될지 모르는 관계의 가변성에 대한 불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다른 사람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생존과 보존에서 매우 필요한 ‘위로’다. 상실이 인간의 숙명이기 때문에 위로 없이 인간은 버틸 수 없다. 위로는 상실된 것을 메워주지는 못하지만, 상실한 자가 버티게 하는 디딤돌이다.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하는 위로라고 하더라도 상실한 자에게 깨닫게 하는 것이 있다. 상실로 세계가 무너졌지만, 위로는 남은 것이 있음을 보게 해서 상실에 함몰되지 않게 한다. 위로는 남은 세계에 대한 ‘윤리적 각성’을 일으킨다.
바로 이 점에서 위로 역시 위험하고 위협적인 것이 되었다. 인간은 위로 없이는 상실을 버틸 수 없지만, 남은 것들에 대한 윤리적 각성과 살아가기를 촉구하는 위로는 부담이 되는 것을 넘어 ‘자아’의 영역에 위협이 되기도 한다. 앞에서 학생들이 자기에 대한 사랑과 로맨스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처럼, 자아의 영역과 위로의 관계는 양립할 수 없이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문제가 되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독특한 세계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자아와 관계가 긴장을 넘어 양립 불가가 된 것 말이다.
그 결과 관계 공포의 시대에 사람의 위로만큼 곤혹스러워진 것이 없다. 위로하는 이에게나, 위로받는 이에게나 마찬가지다. 상실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위로는 필요하지만 인간의 위로는 지나치게 차갑거나 뜨겁다. 위로하는 이는 이것이 혹 위로랍시고 함부로 침해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해야 하고, 위로받는 이는 거부가 아닌지 고민해야 한다. 침해일까 망설이다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하고, 거부가 아닐까 주저하다 침해를 감수해야 한다. 관계 공포의 시대에 위로만큼 난처해진 것이 없다. 이 양립 불가에서 인간은 ‘자아’를 선택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위로보다는 자아의 ‘고립’을 선택한다.
그러나 위로는 제거될 수 없다. 끊임없이 상실을 경험하고 상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인간에게 위로는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양립 불가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에게 위로를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 위로에 대한 이야기에 압도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반려동물이다. 반려동물을 통해 위로받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 대중문화부터 사회적 참사를 다룬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주인공이 반려동물에게서 위로받는 이야기가 많아지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사회적 재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서사와 참사 전시에서도 마찬가지다.(이 전시에 출품된 작품은 다음 링크를 통해 온라인으로 감상할 수 있다. https://1661-2014.org/2026exhibition) 나를 살아가게 하는 것은 주변 ‘친구’들의 위로보다는, 상실의 고통 속에서 잊어버리고 있다가 마주하게 된 반려동물의 눈망울이다. 그와 함께 다시 산책하러 나가야 한다는 것이 나를 살아가게 한다. 인간보다 반려동물의 눈과 만나며 윤리적 존재로 각성하는 이야기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
위로가 인간에게서 동물로 이동한 것은 문제가 아니다. 반려동물과의 관계가 앞에서 이야기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평생에 걸친 로맨스를 다시 시도하는 새로운 시작점이 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우리는 언어를 공유한다는 명분으로 함부로 내 마음을 다 안다고 말하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는 그 따뜻한 위로와 관계에 감사하지만 지쳤다. 나아가 자아의 경계에 대한 위협으로 여긴다. 그래서 공유하는 ‘언어’가 없기에 결코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는 반려동물이라는 타자와의 관계로 ‘탈주’했다. 이 관계에서는 나도 타자가 될 수 있다. 여기서 나와 반려동물 모두에게서 타자성과 공존하는 법을 배우고 연습한다면 인간은 자아에 대한 사랑과 로맨스가 양자택일이 아니라는 것, 그 둘이 함께 무대에 오르는 멋진 이야기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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