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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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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베네치아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이창동 감독 ‘가능한 사랑’ 23일 극장 개봉
전도연·설경구·조인성·조여정 주연… 해고, 노동과 계급 문제 다뤄
등록 2026-09-23 09:33수정 2026-09-23 20:03
영화 ‘가능한 사랑’은 이창동 감독의 8년 만의 신작으로, 2026년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넷플릭스 제공.

영화 ‘가능한 사랑’은 이창동 감독의 8년 만의 신작으로, 2026년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넷플릭스 제공.


도시화 과정에서 정체성을 잃고 해체되는 가족과 개인을 누아르의 외피에 녹여낸 ‘초록물고기’(1997), 역사의 광풍 속에 희생된 개인의 삶을 다룬 ‘박하사탕’(2000), 사회의 위선과 냉대 속 약자들의 사랑을 그려낸 ‘오아시스’(2002), 아들을 잃은 엄마의 모습을 통해 탐구한 용서와 구원의 이야기 ‘밀양’(2007), 아름다운 예술이 사회의 악과 비극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되물은 ‘시’(2010), 청년세대가 안고 있는 무력감과 분노, 계급적 불평등을 미스터리로 풀어낸 ‘버닝’(2018)까지….

한국 영화의 거장 이창동 감독은 그간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천착하며 다층적인 결을 가진 스토리를 통해 관객에게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작업을 해왔다. 그런 그가 8년 만에 내놓은 신작 ‘가능한 사랑’(극장 2026년 9월23일 개봉·넷플릭스 11월6일 공개)은 이런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더 밀도가 높고 촘촘해진 구성을 자랑한다. 지금의 현실과 좀 더 맞닿아 있고, 그래서 관객의 감도도 더 높다.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베니스국제영화제가 그에게 ‘은사자상’(심사위원대상)을 안긴 이유가 짐작된다. 이번 작품에서 이창동 감독은 해고 노동자와 그의 아내, 그리고 다큐멘터리 감독과 그의 남편까지 네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우리 사회가 마주한 노동과 계급의 문제, 타인의 고통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자의 직업윤리, 각자가 갈구하는 욕망의 문제 등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들을 여러 갈래로 정교하게 직조해낸다.

 

영화 ‘가능한 사랑’의 한 장면. 이 작품은 해고 노동자인 호석과 그의 아내 미옥, 이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찍으려 하는 감독 예지와 그 남편 상우의 이야기 속에서 사회적 계급 차이와 창작자의 윤리 등 다층적 문제를 곱씹게 한다. 넷플릭스 제공

영화 ‘가능한 사랑’의 한 장면. 이 작품은 해고 노동자인 호석과 그의 아내 미옥, 이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찍으려 하는 감독 예지와 그 남편 상우의 이야기 속에서 사회적 계급 차이와 창작자의 윤리 등 다층적 문제를 곱씹게 한다. 넷플릭스 제공


 

해고노동자 통해 노동과 계급 문제 다뤄

호석(설경구)은 대기업 생산직 해고 노동자다. 사모펀드가 인수한 회사는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처음엔 정리해고의 칼날을 피한 ‘산 자’와 피하지 못한 ‘죽은 자’가 뭉쳐 ‘옥쇄파업’으로 맞서 싸운다. 그러나 공권력은 이들을 철저히 짓밟았고, 호석은 동료들의 외면 속에 큰 부상을 입고 구속까지 당한다. 아내 미옥(전도연)은 그런 남편의 치유를 바라며 아들 철이까지 포함한 가족을 지켜내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여기에 이들의 얘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찍으려는 예지(조여정)가 등장한다. ‘무늬만 압구정 출신’인 예지와 달리 남편 상우(조인성)는 대대로 부자인 집안에서 자랐고 지금은 대형 사모펀드를 운용한다. 몸에 밴 여유와 훈련된 매너를 장착한 그는 ‘독립영화’를 찍는 예지를 위해 자잘한 부탁을 기꺼이 들어준다.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고 심리치료와 다큐 촬영을 마뜩잖아 하는 호석을 설득하려는 예지를 위해 가족끼리 식사자리도 갖고 미옥을 촬영장까지 데려다주는 수고도 마다치 않는다.

촬영을 하면서 예지는 미옥과 점차 가까워진다. 그러나 카메라는 순간순간 둘의 계급적 차이를 드러낸다. ‘함께 파업했던 남편 동료의 장례식에 입고 갈 검은 옷이 마땅치 않은’ 미옥과 ‘500만원 넘는 명품 가방과 옷을 아무렇지 않게 걸치는’ 예지가 같은 사회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계급으로 묶일 순 없다. 자신의 아픔을 돌볼 겨를조차 없이 생계를 위해 새 직장을 찾은 호석과 삶의 풍요 속에서 자연스럽게 장착된 센스와 예의, 넘치는 시간적 여유를 가진 상우도 결코 같을 순 없다.

다큐를 향한 예지의 열정은 진심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큐를 찍으려면 ‘그들의 삶으로 들어가 함께 호흡해야 한다’며 성의를 다하는 예지의 태도를 상우는 “메소드 연기”라고 표현한다. “그 사람들과 너는 다른데, 같다고 생각한다. 그런 네가 좋다”고 말한다. 예지는 “나는 그들을 사랑하려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과연 사회적 계급 차이를 뛰어넘어 예지는 미옥과 호석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걸까?

영화 ‘가능한 사랑’은 이창동 감독의 8년 만의 신작으로, 2026년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넷플릭스 제공.

영화 ‘가능한 사랑’은 이창동 감독의 8년 만의 신작으로, 2026년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넷플릭스 제공.


 

파업과 폭력진압… 2009년 쌍용차 사태 연상

 

‘가능한 사랑’은 예지가 미옥과 호석을 인터뷰하는 장면 사이사이 둘의 어린 시절과 연애 시절, 2009년 쌍용차 사태를 연상할 수밖에 없는 파업과 폭력진압, 그것이 남긴 상흔 등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넣는다. 영화는 특히 호석과 같은 회사 소속 해고 노동자와 가족들의 집단 심리 상담 장면에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보수언론이 ‘노동귀족’으로 호명됐지만, 해고·파업을 거친 뒤 어느새 친구들에게조차 ‘빨갱이’라고 불리는 사람, 예전엔 가족처럼 지냈던 동료들과 같은 엘리베이터조차 타기 힘겹다는 사람, 옥쇄파업 때 모든 동료·가족과 ‘함께’여서 너무나 과분하게 행복했기에 지금의 고통이 그 행복에 대한 대가라며 우는 사람….

이창동 감독은 2026년 9월21일 서울 씨지브이(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시사회 뒤 기자간담회에서 “예지가 찍는 해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실제 다큐처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자기 일을 잃어버림으로써 삶이 파괴되고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마음속 텅 빈 자아를 느끼는 해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이 감독은 쌍용차 사태가 벌어진 뒤 충격을 받아 영화화할 결심을 했었지만 포기한 경험을 털어놓으며 “10년 전엔 내가 이 이야기를 정직하게 할 자격이 있는가 확신이 없었다. 이후 다큐 감독 부부라는 설정을 더하자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낼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어 “타인의 삶을 소비하거나 영화의 재료로 사용하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지금도 쉽게 답을 찾지 못한 문제”라고 덧붙였다.

이 감독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 안은 캐릭터는 예지라 할 수 있다. 남편의 든든한 자본을 두고 지원 프로젝트를 따낸 예지에 대해 스태프가 뒷말을 하는 장면은 감독이 영화진흥위원회 중예산 영화지원 사업 공모를 따냈을 때 나왔던 ‘신예 감독과 저예산 작품의 기회 박탈 논란’에 대한 자기 고백과도 같다. 여기에 코로나19를 거치며 어려워진 시장 탓에 추가 투자의 어려움을 겪으며 결국 거대 자본을 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를 통해 제작하게 된 상황까지 겹쳐져 이 영화의 운명이 더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 ‘가능한 사랑’은 해고 노동자인 호석과 그의 아내 미옥, 이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찍으려 하는 감독 예지와 그 남편 상우의 이야기 속에서 사회적 계급 차이와 창작자의 윤리 등 다층적 문제를 곱씹게 한다. 넷플릭스 제공

영화 ‘가능한 사랑’은 해고 노동자인 호석과 그의 아내 미옥, 이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찍으려 하는 감독 예지와 그 남편 상우의 이야기 속에서 사회적 계급 차이와 창작자의 윤리 등 다층적 문제를 곱씹게 한다. 넷플릭스 제공


 

이창동 “해고 노동자 이야기 들려주고 싶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두 부부와 미옥·호석의 아이 철이까지 함께 상우의 별장으로 휴가를 가면서 벌어지는 후반부다. 스스로가 만든 감옥에서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감정을 분출하는 호석, 별장에 딸린 해변까지 소유한 듯 ‘자유’로울 수 있는 상우가 치닫는 욕구, 숨기고픈 타인의 아픔과 절규까지 앵글에 담고 싶은 예지의 욕심, 자신의 혼란스러움과 불편함의 정체를 마주하는 미옥의 깨달음까지. 감독은 아슬아슬한 넷의 욕망을 줄타기하듯 강렬한 방식으로 그려내며 관계의 파국과 전복을 향해 달려간다. 검증된 배우들의 연기력이 폭발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영화는 다층적 해석이 가능한 여러 겹의 이야기와 메타포를 품고 있다. 노동의 가치가 사라진 시대, 양극화와 계급적 불평등, 타인의 고통을 착취하지 않는 창작자의 윤리 등 그 어떤 지점에 기대 읽어내도 깊이 있는 관람이 가능하다. 감독은 섣부른 결론이나 쉬운 답을 꺼내 들며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그저 진중하지만 날카로운 물음표를 던지며 관객에게 “함께 생각해보자”고 권할 뿐이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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