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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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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리의 ‘계몽’ 서사가 먹히는 이유

우리 안의 극우 22. 경제적 이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정치
대중은 왜 그것을 옳다고 믿게 됐나… 감정·서사·어휘가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방식
등록 2026-03-28 15:21 수정 2026-03-28 22:35
제20대 대통령 선거 투표일인 2022년 3월9일 오전 서울 강남구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에 마련된 기표소에서 유권자가 투표를 마치고 나오고 있다. 신소영 기자

제20대 대통령 선거 투표일인 2022년 3월9일 오전 서울 강남구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에 마련된 기표소에서 유권자가 투표를 마치고 나오고 있다. 신소영 기자


오늘날 사람들은 정치의 가장 중요한, 심지어 유일한 동기가 ‘경제적 이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유권자는 자기가 사는 지역이나 주택의 가격을 올릴 수 있는 정책이나 정당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치 행위의 이유 중 하나일 수는 있어도 가장 중요하거나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만약 모든 개인의 정치적 선택이 가져올 경제적 손익이 투명하게 드러나 있고 모든 개인이 이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고 가정할 경우, 정치의 동기는 경제적 이해로 수렴할 것이라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가정 자체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이는 ‘반사실적 가정의 오류’(counterfactual fallacy)에 해당한다.

공동체가 ‘옳음’에 합의하는 방식

사람들은 꼭 자신의 경제적 이해를 기준으로 정당을 지지하거나 투표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종종 분노, 복수심,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남의 불행은 나의 기쁨) 같은 감정에 따라 투표한다. 때로 예상되는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고 시민적 양심이나 공적 우려에 따라 행동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정치의 동기가 경제적 이해라는 주장은 지나치게 협소하다. 그보다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정치적으로 지지한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높아 보인다. 그 ‘옳다고 믿는 것’에는 당연히 자신의 경제적 이익도 포함된다.

‘옳다고 믿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정의로서도 손색없다. 그건 믿음이면서 ‘옳음’의 감각과 연결됐기에 타인과 소통하고 설득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물론 ‘옳다고 믿는 것’과 ‘옳음’은 다르다. 진리값의 층위에서 윤석열 변호인 김계리의 ‘계몽된 앎’과 지구 평평설은 그저 조롱거리, 상대할 가치도 없는 서사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 서사가 실제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주체들은 이름이 불리고(호명), 역할과 사명을 부여받고, 관습·제도·관계의 일부로서 결속돼 공동체를 형성한다. 과학철학자나 여러 지식사회학자에 따르면 진지한 학문 공동체 역시 본질적으로 특정한 믿음을 공유한 공동체로서, 다른 공동체들과 질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 개념, 과학지식사회학(SSK·Sociology of Scientific Knowledge) 일각에서 제기된 연구는 과학적 실재에 대한 합의가 항상 명석판명한 타당성 검증 절차에 의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였다. 나아가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실험실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다양한 현장 연구는 자연과학의 진리 발견이 단순히 타당성 검증 절차에서 일탈하는 정도를 넘어 일상적 실천과 관행, 과학자들끼리의 정치적 협상 또는 특정한 이념이 작동한 결과임을 경험적으로 보여줬다.1

이는 상대주의적 진리관, 예컨대 지구 평평설과 지구 구형설을 ‘공평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확립돼 있다고 믿는 지식이 생각보다 훨씬 취약하다는 뜻에 가깝다. ‘옳기 때문에 믿는’ 게 아니라 ‘믿기 때문에 옳은 사실로 인식돼버리는’ 경우는 흔하다. 믿음의 공동체는 감정의 공동체이자 정당성의 공동체다. 즉, 감정적 동일시만이 아니라 학문 공동체처럼 나름의 정당화 절차도 갖추고 있다. 몇몇 사회 이론가나 엘리트의 예단과 달리, 대중은 이데올로기에 예속되고 선동당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비판과 정당화를 수행하는 주체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다룰 것이다.) 믿는 주체들은 믿음을 반증하는 몇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고 해서 쉽게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이 어떻게, 왜 그것을 옳다고 믿게 됐는지를 더 철저히 물어야 한다.

옳아서 믿는 게 아니라 ‘믿어서 옳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루이 알튀세르는 믿음의 진리 여부에 집착하는 대신, 그 믿음이 무한히 발생하는 구조에 주목했다. 믿음 각각의 진릿값보다 중요한 층위는 믿는 주체이며, 그 주체는 호명으로 발현된다는 것이다. 다만 알튀세르가 간과했거나 과소평가한 요소가 있었다. 바로 감정이다.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는 지배권력에 호명된 주체의 상상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에게 상상이 가장 구체화하는 상황은 바로 감정을 느낄 때다. 앞서 스피노자의 논의를 통해 정식화한 바와 같이, ‘감정 없는 상상은 있어도 상상 없는 감정은 없다’. 감정은 언제나 상상을 수반하며 그것이 주체화 과정에 연결된 경우 필연적으로 이데올로기적 문제가 된다. 수치심, 자부심, 울분 같은 감정이 전형적인 예다. 결국 호명, 이데올로기, 주체를 논의할 때 감정을 핵심 요소로 다루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에서 감정은 어떤 의미와 역할을 가지는가? 철학자 김은주와 에티엔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의 ‘호명’이라는 개념적 맥락 속에서 감정을 중요한 문제로서 포착한 바 있다. 먼저, 김은주는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에 대한 정밀한 독해를 시도한다. 알튀세르가 ‘호명’의 역사적 사례로서 ‘신학정치론’에 나오는 히브리 신정을 들었기 때문이다. 히브리 신정은 예언자 모세가 고대 이집트의 노예였던 히브리 민족을 데리고 탈출해 만든 정치공동체다. 스피노자는 이 히브리 신정이 선민사상 같은 상상에 의해 정치와 종교에서 이중의 계약이 일어난 사건으로 설명했다. 알튀세르 역시 그 설명을 이어받아 상상을 중심으로 히브리 신정의 ‘호명’을 논의한다.

그런데 김은주는 여기서의 상상이, 정확히는 호명을 발생시키는 선민사상 같은 상상이 다름 아닌 감정을 통해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지배받기 싫어하면서도 스스로를 통치하지 못하는) 히브리 민중의 이런 무능력에도 불구하고 대중을 한 국가의 민족으로 통일시킨 실질적 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선민사상과 거기에 수반되는 감정 복합체, 그리고 이것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주는 일련의 법과 제도다. 스피노자는 이를 ‘비준’이라는 이름으로 계약 안에 포함시킨다. 계약 비준은 신의 외적 도움에 대한 히브리 민족의 경탄과 신에 대한 헌신이라는 감정으로 표현된다. (…) 신에 대한 이 경탄과 헌신은, 히브리 민족의 상태가 이민족(이집트인)에 대한 공통의 미움, 타인에게 지배받지 않으려는 고집(‘contumacia’)이라는 부정적 정서에서, 더 적극적인 합치로 전화됐음을 의미한다.

또 김은주는 이렇게 말한다. “선민사상을 바탕으로 히브리 민족은 개인들 간의 직접적이고 수평적인 관계를 신과의 수직적 관계를 통해 매개함으로써 경쟁, 야심 등과 같은 인간 상호 간 감정의 부정적 효과를 완충하고, 동정이나 연민처럼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감정 역시 촉진하고 안정화한다.”2

감정이 사회를 유지한다

이 주장을 정리하면, 히브리 신정이 선민사상 같은 상상에 의해 가능한 것은 맞지만 그 상상은 감정(‘감정균형’)을 통해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히브리 민족의 선민사상, 즉 신에게 선택된 민족이라는 ‘상상’은 감정과 별개인 추상적·논리적 개념이 아니라 그 자체로 특정한 감정이 공유되고 확산되는 과정이라 볼 수도 있다. 즉, 선민사상은 집단적 동질감 및 우월감을 향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당화 기제라고 볼 수도 있다.

한편, 발리바르는 상상과 감정이 불가분이라는 점을 더 직접적으로 강조한다.3 그는 “상상 속에서 대중이 구성되는 것을 스피노자는 ‘정서모방’이라 불렀다”며 이 정서모방이 사회적 관계를 분석하는 스피노자의 관점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정서모방은 스피노자의 독창적 개념으로서, 직접적 연관이나 이해관계가 없음에도 내가 대상과 비슷한 감정을 가지게 되는 현상이다. 대표적 감정으로 ‘연민’을 들 수 있다.

또한 발리바르는 감정이 지배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저항이라는 차원에서도 작동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특히 ‘공포’라는 감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대중들에 대한 그(스피노자)의 공포는 완전히 비합리적인 공포, 지성을 마비시키고 개인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들 뿐인 그러한 공포가 아니다. 그에게서 익히 볼 수 있는 이해의 노력은 이러한 공포가 저항하고 투쟁하고, 정치를 변혁하는 데 사용될 수 있게 하기에 충분하다.”4

지금까지 이데올로기와 감정을 주로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이자 구조로서 논의해왔다. 분명한 건 ‘매트릭스 모델’이든 ‘냉소적 주체 모델’이든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이든 간에, 그 모두는 이데올로기의 작동 구조를 외부 관찰자로서 인식하고 분석하는 작업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데올로기와 주체, 구체적으로는 극우주의나 극우대중을 해명하는 이론에는 꼭 구조적 관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학자 노먼 K. 덴진은 이데올로기 이론과는 다른 지적 전통인 ‘해석적 상호작용론’(interpretive interactionism)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해석적 상호작용론은 전통적 이데올로기론이 상정하는 ‘진정한 실재’나 ‘객관적 진리’ 같은 개념을 거부하고 표상·재현(representation)의 해석에 집중한다. 그래서 인간 상호작용의 필수 요소인 감정은 덴진에게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는 ‘사회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거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감정성(emotionality)에서 찾았다. “개인은 감정을 통해 타인과 연결되며 타인을 알게 된다. (…) 사회조직의 기초에 감정성이 있다.”5

극우를 해명하는 또 다른 관점

덴진은 일상에서 개인들이 말과 몸짓 등의 상징으로 소통하는 행위가 사회적 현실을 만들어간다는 관점에 선다. 이 때문에 이론가나 지식인의 인식론적 특권, 즉 그들이 대중보다 현실을 더 잘 꿰뚫어본다는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다. 굳이 현학적인 개념을 쓰지 않더라도, 대학을 나오고 학위를 가지지 않았더라도, 일상을 살아가는 생활인들은 자신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제도나 문화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자신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게 덴진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그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탁월한 질적 연구(심층 인터뷰)를 통해 이를 증명했다.

이러한 미시적 접근법은 극우 이데올로기나 극우 운동의 주체를 분석할 때 유용할 수 있다. 그들의 감정·서사·어휘에 내재적으로 접근해 어떻게 권력과 이데올로기가 자연화된 상식으로 작동하는지 보여주고, 일상에서 지배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의 정체성과 욕망을 형성하는 방식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1.Knorr-Cetina, K., ‘The manufacture of knowledge: An essay on the constructivist and contextual nature of science’, Pergamon Press, 1981/ Latour, B. & Woolgar, S., ‘Laboratory life: the construction of scientific fact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6

2. 김은주, ‘대중(multitude)의 ‘호명’에서 감정의 역할-‘신학정치론’ 히브리 신정의 사례와 알튀세르의 스피노자 독해에서 빠진 것’, ‘철학’ 139집, 219쪽, 2019

2. 김은주, ‘대중(multitude)의 ‘호명’에서 감정의 역할-‘신학정치론’ 히브리 신정의 사례와 알튀세르의 스피노자 독해에서 빠진 것’, ‘철학’ 139집, 218쪽, 2019

3. 에티엔 발리바르, 진태원 옮김, ‘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의 공포’, ‘스피노자와 정치', 그린비, p193, 2014

4. 같은 책, 206쪽

5. Denzin, N. K., ‘On Understanding Emotion’, Routledge, p146, p241, 2007

박권일 미디어사회학자

*우리 안의 극우: 오늘의 극우는 한국 사회에 이미 존재하던 문제들이 고름 터지듯 분출되는 현상이다. 이 연재는 내재적 관점에서 극우를 직시하는 연구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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