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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열팬’과 ‘어준팬’의 악무한을 벗어나려면

우리 안의 극우 15. 누가 극우인가⑭
‘정치 감정은 이데올로기’라는 명제… ‘훌리건 정치’에 휘둘리지 않을 열쇠
등록 2025-12-22 09:38 수정 2025-12-23 18:55
‘12·3 내란 사태’를 수사한 공조수사본부가 윤석열에게 체포영장을 재집행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2025년 1월14일 밤 11시,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에 윤석열 지지자들이 드러누워 있다. 한겨레 김가윤 기자 gayoon@hani.co.kr

‘12·3 내란 사태’를 수사한 공조수사본부가 윤석열에게 체포영장을 재집행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2025년 1월14일 밤 11시,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에 윤석열 지지자들이 드러누워 있다. 한겨레 김가윤 기자 gayoon@hani.co.kr


모든 감정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감정은 사회적으로,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중요하게 논의된다. 한국인의 일상 감정인 ‘울분’을 살펴본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런데 왜 감정은 정치에서 중요한가? 단적으로 말하면, 감정의 힘이 이성적·논리적 설득보다 강해서 사람을 더 많이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감정에 대한 기능주의적 설명이라 할 수 있고 경험적으로도 타당하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면 곤란하다. 이 설명이 감정에 대한 심층적 이해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대중은 우매해서 이성적 설득이 아니라 감정적 선동에 휘둘린다’는 비난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러면 악무한적 상호 비난이 시작된다. 예컨대 김어준 방송을 열심히 보는 어떤 팬에게 윤석열 지지자는 “유튜브발 ‘가짜뉴스’와 혐중 음모론을 믿으면서 아직도 계엄을 옹호하는 한심한 무지렁이들”이다. 반대로 어떤 윤석열 팬 혹은 더불어민주당을 싫어하는 몇몇 시민에게 김어준 팬과 민주당 지지자 일부는 “이른바 ‘K값’ 선거 음모론, 세월호 항적 조작 음모론에 놀아나면서 자신이 똑똑한 줄 착각하는 멍청이들”에 불과하다.

저들 중 누가 ‘조금 덜 멍청한지’ 판가름하는 것도 의미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글의 초점은 누가 옳은지 감별하는 것이 아니라, 극우 정치를 포함한 정치적 실천에서 감정이 어떻게 그토록 강한 위력을 발휘하는지를 더 깊은 층위에서 탐구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극우 감정의 구체적 양태를 관찰하고 분류하는 경험 연구는 필수적이다. 사회학자 알리 러셀 혹실드는 미국의 극우 성향 시민을 인터뷰해 이를 탁월하게 수행한 바 있다.(‘자기 땅의 이방인들’ ‘도둑맞은 자부심’) 한국의 경우 ‘울분’이나 지위 불안 같은 감정에 대한 논의가 여기 해당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특정한 감정이 ‘어떻게’ 특정한 정치적 신념과 단단히 결속하게 되는지, 더 근본적으로는 어떻게 감정이 이데올로기화하는지, 혹은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감정화하는지 등의 질문은 여전히 공백으로 남기 때문이다.

왜 감정은 정치에 필연적인가

관건은, 단순히 감정이 중요하다거나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관찰을 넘어 우리의 정치 생활에 감정이 왜 그토록 필연적으로 수반되는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이 글에서 앞으로 제시하려는 대답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은 명제가 된다. ‘정치 감정은 이데올로기다.’ 다시 말해, 정치에서 감정의 힘은 이데올로기 효과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감정과 이데올로기를 결부하는 이런 접근은 지배권력과 집단적 저항의 동학을 추적·분석·성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이론 작업이다. 이 접근은 무엇보다 극우 감정을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광기로 치부해버리는 관점을 수용하지 않는다. 또한 이 접근은 감정을 “인식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하부구조” “무의식적 강렬함” 등의 의미를 담은 “정동”(affect)1으로 확대해석하거나, 쾌/불쾌 및 평온/흥분 같은 즉자적 신체 반응, 즉 심리학적 층위의 ‘정동’2으로 축소 해석하는 데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데올로기란 정확히 무엇인가? 이데올로기는 복잡하고 두꺼운 개념이며 그만큼 다양한 정의가 존재한다. 이데올로기는 인간 고유의 욕망인 ‘정당화’의 욕망, ‘의미화’의 욕망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여기서는 이데올로기를 ‘나와 내가 속한 세계의 정당성을 설명해주는 상상’ 정도의 의미로 이해해두자. 이로써 극우 감정 연구의 이론적 과제가 조금 또렷해졌다. 감정과 이데올로기의 관계, 즉 감정과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해명하는 것이다.

미리 밝혀두건대 이 글은 ‘정치의 탈감정화’, 즉 정치에서 감정을 배제하자는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목표다. 앞선 연재에서 정치철학자 제이슨 브레넌의 ‘유권자 3유형’ ‘호빗’ ‘벌컨’ ‘훌리건’을 살펴본 적이 있다.(제1582호·제1584호 참조) 브레넌은 현실에서 유권자 대다수는 이성적인 ‘벌컨’이 아니라 정치에 무관심한 ‘호빗’과 편견에 사로잡힌 광적인 팬인 ‘훌리건’ 사이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에 무관심하고 비이성적인 유권자가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사회를 망가뜨린다고 비판하면서, 대안으로 ‘에피스토크라시’, 즉 지식인 통치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 글은 브레넌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다시 말해 이 글은 여전히 데모크라시, 즉 민주주의를 옹호하면서도 ‘훌리건 정치’(극우·극단주의 정치도 포함된)에 맞설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려 한다. 감정 연구는 그 목표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정동” 개념을 살펴야 하는 이유

감정 연구자가 처음 맞닥뜨리는 당혹은, ‘감정’의 유의어가 많아도 너무 많다는 것이다. 정서(affect), 느낌(feeling), 정념·열정(passion), 감성(sentiment) 등등 감정과 사실상 동일하거나 유사한 의미이지만 각각 다른 학술적 맥락에서 오랫동안 연구된 개념어들이 존재한다. 2000년대 이후에는 이 ‘감정 개념군’에 또 하나가 추가됐다. 바로 “정동”(情動)이다. 감정과 이데올로기를 논의하려면 특히 “정동” 개념 살펴보기를 피해갈 수 없는데,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개념적 혼동의 문제다. 개인 심리에 초점을 두는 심리학을 별개로 치더라도 철학, 사회학, 정치철학, 문화연구 등에서 최근 극우 정치의 부상은 공통된 관심 주제다. 그런데 핵심 개념 중 유사해 보이지만 실은 전혀 다른 의미여서 종종 오해가 발생하는 개념쌍이 있다. 대표적 개념이 “정동”과 감정이다. 예컨대 “극우 정동”이라 할 때의 지시 대상과, “극우 감정”이라 할 때의 그것이 전혀 다를 수 있다. 물론 이미 두 개념을 분석한 논문이 나와 있다.3 하지만 극우 담론이나 미디어 정치에 대한 최근 연구들에서 여전히 두 개념을 혼동하거나 오용하는 일이 적지 않기에 개념 차이를 새삼 강조해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둘째, 이데올로기라는 층위의 문제다. 뒤에 상세히 논의하겠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이 글은 극우 현상을 분석하는 개념틀로서 “정동”을 기각하고 감정을 채택한다. 그 선택의 주된 이유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점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극우 감정 분석에서 핵심은 정치 감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해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정 개념으로는 이데올로기적 문제를 얼마든지 다룰 수 있지만 “정동” 개념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거나 어려워진다. 이는 “정동” 개념의 특성에 기인한다. 왜 그런지 지금부터 설명할 것이다.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유튜브 채널 갈무리.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유튜브 채널 갈무리.


“정동”이란 무엇인가

“정동”은 기존 철학적 개념인 정서(affect)와 철자가 같지만 그 내포적 의미는 전혀 다르다. 철학 개념으로서 ‘정서’, 곧 ‘affect’는 주로 스피노자의 대표작 ‘에티카’(윤리학)를 중심으로 논의됐다. 과거 스피노자 관련 저술의 몇몇 한국어 번역본이 ‘정서’ 대신 ‘감정’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이때의 정서는 사실상 감정(emotion)과 같은 의미다. 반면 최근 한국의 일부 연구자가 “정동”이라는 신조어로 번역하고 있는 ‘affect’는 2000년대 이후 인문학과 문화연구 일각에서 일어난 이른바 ‘정동적 전환’(affective turn)의 영향 아래 있는 개념으로서, 기존의 감정 또는 정서 개념과 명시적으로 구별된다.

간단히 말해 “정동”은, 기존의 감정 개념군이 설명하지 못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개념이다. 대표적 이론가로 문화연구자이자 철학자인 브라이언 마수미가 있다. 마수미에 따르면, 감정은 “개인적”이고 “틀에 박힌 것”이며 ”통념화되거나 코드화된 표현”이다. 반면에 “정동”은 “소유할 수도 인식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비판에 저항”할 수 있다.4 “정동”은 또한 “경제학보다 빠르고 확실한 경제효과를 생산”하며 “후기자본주의 체계의 실제적 조건”이며 “내적인 변수”일 뿐 아니라 “공장에 버금가는 하부구조”이다.5

마수미는 신자유주의가 본격화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시대를 “정동” 정치로의 전환기로 규정하며 이렇게 주장한다. “그(레이건)는 비(非)이데올로기적인 수단으로 이데올로기 효과들을 창출할 수 있었다. 즉, 망가짐으로써 미국의 정치적 방향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 그의 수단은 정동이었다. 다시 말해 감정과는 반대되는, 정동. 이것은 공감이나 감동적 동일화, 혹은 그와 관련한 어떠한 형태의 동일화의 문제가 아니다.”6 “정동은 이데올로기[논쟁] 이후 포스트모던 권력을 재고하는 데 있어 열쇠가 된다.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어떤 경우엔 가장 유해한 형식으로, 우리 곁에 상당 부분 건재하지만, 더 이상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는 않다.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권력이 기능하는 전 지구적 양태를 설명할 수 없다.”7

마수미가 보기에, 레이건이 보여준 미디어-이미지 정치는 비이데올로기적 수단을 통한 “정동”의 정치라는 새로운 현상이었다. 마수미는 후기자본주의에서 자본-권력의 지배 도구가 더는 이데올로기나 감정이 아니라 ‘정동’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정동” 개념은 이데올로기의 세계, 즉 의미와 당위로 가득 찬 텍스트의 세계가 끝나고 한없이 미끄러지는 기호와 이미지의 세계가 도래했음을 당당히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권력이 기능하는 전 지구적 양태를 설명할 수 없다”는 마수미의 단언은, 이른바 “이데올로기의 종언” 이후 자본-권력에 대한 저항이 더는 대항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는 잘 작동하지 않으리라는 경고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데올로기는 정말 끝났을까

마수미가 “정동”과 감정을 굳이 구별한 목적은 무엇일까? 그가 보기에 감정은 ‘주체라는 신화’를 강화하고 이를 통해 자본으로의 포획을 쉽게 한다. 다시 말해 감정은 인간을 늘 종속되게 만드는 데 비해, “정동”은 방향도 주체도 없는 에너지여서 자본은 그것을 완벽히 장악할 수 없다. 그렇게 자본이 “정동”을 놓치는 지점에서 균열이 발생하고, 바로 거기서 자본-권력에 대한 저항이 일어날 수 있다. 요컨대 마수미는 신자유주의나 이미지정치 등 새로운 지배 형식에 맞서려면, 낡은 저항 형식인 이데올로기 따위가 아니라 새로운 저항 기제, 즉 “정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동 개념은 과연 얼마나 현실을 잘 설명해주는가? 나아가서, 이데올로기 개념은 정말 시효를 다했는가? 다음 회에서는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정동” 개념을 비판하면서 감정과 이데올로기의 문제에 다가선다.

1. 브라이언 마수미, 조성훈 옮김, ‘정동의 자율’, ‘가상계’, 갈무리, 46~86쪽, 2011./ Z. Papacharissi, ‘Affective Publics: Sentiment, Technology, and Politics’, Oxford University Press, pp21~23, 2014.

2. 리사 펠드먼 배럿, 최호영 옮김,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생각연구소, 2017. 여기서의 ‘정동’(affect)은 마수미·파파카리시 등의 “정동”(affect)과 의미의 차이가 있기에 작은따옴표로 구별했다.

3. 최원, ‘정동 이론 비판: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의 쟁점을 중심으로’, 문화과학 86호, 82~112쪽, 2016./정정훈, ‘이데올로기와 어펙트, 혹은 ‘인간학적 조건’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 루이 알튀세르와 브라이언 마수미 사이의 쟁점을 중심으로’, 문화과학 90호, 403~429쪽, 2017.

4. 브라이언 마수미, 조성훈 옮김, “정동의 자율”, ‘가상계’, 갈무리, 46~86쪽, 2011. 브라이언 마수미, 조성훈 옮김, ‘정동정치’, 갈무리, 27·62쪽, 2018

5. 멜리사 그레그 외, 최성희·김지영·박혜정 옮김, ‘정동이론’, 갈무리, 87쪽, 2015

6. 브라이언 마수미, 조성훈 옮김, ‘정동의 자율’, ‘가상계’, 갈무리, 77쪽, 2011

7. 같은 책, 81쪽

박권일 미디어사회학자

□ 우리 안의 극우
https://h21.hani.co.kr/arti/SERIES/3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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