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2025년 2월8일 오후 동대구역 광장에서 열린 세이브코리아 주최 국가비상기도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회학자 하홍규에 따르면 감정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피설명항(explanandum)으로서의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설명항(explanans)으로서의 감정”이다.1 쉽게 말해 전자는 ‘사회를 통해 감정을 연구’하는 것이고, 후자는 ‘감정을 통해 사회를 연구’하는 것이다. 둘은 모두 중요할 뿐 아니라 서로 연결돼 있다. 이 글은 한국의 극우가 주제이므로 후자, 즉 한국의 극우를 감정을 통해 설명하는 작업에 좀더 방점이 찍힌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극우는 감정적이며 비이성적인 악의 세력’이라는 비난으로 귀결된다면, 굳이 공들여 분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반지성주의를 반지성주의로 대응하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황당무계한 사태에도 나름의 원인과 이유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밝혀나가는 작업은 여느 지적 작업과 마찬가지의 노력과 인내를 요구한다.
“인간의 본질은 감정이다” “인간 행위를 추동하는 것은 이성이 아닌 감정이다” “사회를 움직이는 힘은 감정이다” 같은 말은 의미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지만 한 가지 의미를 공유한다. 사회구조, 곧 권력의 작동을 감정으로 설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렇게 설명함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행동의 원리를 오직 유전자로만 설명하는 것이 오류이듯 감정으로만 환원하는 것 역시 오류일 수 있다. 문제는 양상(modality)이다. 요컨대 극우 현상을 해명하는 설명항으로서 감정이 ‘어떻게 작용하는가’가 관건이다.
당연하게도 사회는 감정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특히 공적 소통과 담론에서 감정의 역할은 제한된다. 물론 감정은 때에 따라 에밀 뒤르켐이 말하는 ‘집단적 열광’(collective effervescence)처럼 전면화한다.2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감정은 주관적이라는 이유 등으로 가치가 절하되기 쉽기 때문에 종종 은폐되거나 위장된다.
권력 현상이라는 층위에서 보면 사회를 유지하는 힘은 국가가 독점한 물리적 폭력, 그리고 법·제도 및 문화에서 나온다. 그 바탕에는 구성원에게 정당한 것으로 공유된 가치체계인 이데올로기가 있다. 강압적 수단을 쓰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목표를 따르도록 한다는 점에서, 경제학자 다론 아제모을루처럼 이데올로기를 “설득권력”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3
이데올로기는 폭력과 억압을 정당화할 뿐 아니라 갈등을 생산하거나 조율한다. 그것은 차이와 동일성을 언어화함으로써 집단을 뭉치게도 하고 다른 집단과 적대하게도 하는 구심점이 된다. 한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대체로 그 윤곽이 고정돼 있으나, 엄밀히 말해 이데올로기-들은 서로 경합한다. 때로 지배 이데올로기가 대항 이데올로기에 의해 도전받거나 교체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끝났다”는 일각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 개념은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호출돼왔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돌출한다. 권력을 둘러싼 인간 행위, 즉 정치에 영향을 끼치는 핵심 요소가 이데올로기라면 감정은 거기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나아가 감정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스피노자의 ‘상상’ 개념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을 같이 들여다봐야 한다.
스피노자에게 인식은 세 종류로서 1종 인식인 ‘상상’, 2종 인식인 ‘이성’, 3종 인식인 (신에 대한) ‘직관적 지식’으로 나뉜다. 여기서 1종 인식인 상상은 “오류의 유일한 원인”이지만 2종, 3종 인식은 “필연적으로 참”이다.4
스피노자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기가 뭘 욕망하고 무엇이 이익인지도 잘 알지만 사태의 진정한 원인은 모르며 심지어 모르면서 안다고 착각한다. 또한 인간은 외부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항상 외부 물체가 신체에 남긴 흔적, 곧 ‘신체의 변용(affection/affectio)이 만들어낸 관념’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다. 그 관념이 바로 상상(imagination/imaginatio)이다. 상상은 인간이 살아 있는 한 항상-이미 작동하면서 인간 본연의 무지와 오류를 만들어내는 원천이 된다.
한편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상상 개념을 독창적으로 전유해 밀도 높은 이데올로기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이데올로기는 항상-이미 개인을 구체적 주체로 ‘호명’(interpellation)한다고 주장하면서, ‘억압적 국가 장치’(ARE·Appareil Répressif d'État)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AIE·Appareils Idéologiques d'État) 개념을 통해 지배 시스템이 재생산되는 메커니즘을 분석했다.5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그들의 실제 존재조건에 대한 개인들의 상상적 관계의 표상’으로 정의한다. 이데올로기 속에 표상되는 것은 실재(實在)가 아니라, 실재에 대한 상상이라는 것이다. 바꿔 말해서, 지배 권력에 항상-이미 호명된 주체인 개인의 상상이 이데올로기다. 전통적 좌파에게 이데올로기는 기만·환상·허위의식 같은 것이었지만,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속임수가 아니라 주체가 존립하는 필수 조건이다. 이 때문에 설령 사회주의가 실현된다 해도 인간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론 20세기의 이데올로기 개념과 17세기의 상상 개념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또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와 같은 ‘이성으로의 상승’ 같은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바깥은 없다’는 전제 아래 이른바 ‘우발성의 유물론’으로 나아갔다. 그럼에도, 상상이라는 한계 내에서 이성을 지향한 스피노자와, 이데올로기의 한계 내에서 해방을 바라본 알튀세르는 넓은 지평에서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스피노자는 어떻게 인간이 오류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는 “부적합한 인식인 상상을 폐기하라”거나 “2종 인식인 이성을 연마하라”는 명쾌한 답 대신에 뭔가 흐리멍덩해 보이는 답을 내민다.
나는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신이 자연의 일상적 질서로 사물을 인식할 때, 말하자면 외부로부터 결정돼 사물과의 우연한 접촉으로 인해 이것저것을 관찰할 때, 정신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도, 외부 물체에 대해서도 타당한 인식이 아니라 단지 혼란한 인식만을 가진다. 그러나 내부로부터 결정돼, 곧 많은 사물을 동시에 관찰함으로써 사물의 일치, 차이, 반대를 인식할 때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정신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내부로부터 결정될 때는 정신은 내가 다음에서 제시하게 될 것과 마찬가지로 사물을 명석판명하게 관찰하기 때문이다.6
여기서 두 가지 방식, 즉 “외부로부터 결정”되는 방식과 “내부로부터 결정”되는 방식이 제시된다. 전자는 “자연의 일상적 질서로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으로서 사물을 “우연한 접촉”을 통해, ‘그저 되는대로’ 관찰하기 때문에 “혼란한 인식”으로 귀결하고 만다. 반면 후자는 “많은 사물을 동시에 관찰함으로써 그 일치, 차이, 반대를 인식”하기에 명석판명하게 관찰할 수 있다.
주목할 부분은 후자의 인식이 ‘이성’이나 ‘직관적 지식’, 곧 “필연적으로 참”이 되는 적합한 인식은 아니라는 점이다. “많은 사물을 동시에 관찰함으로써 사물의 일치, 차이, 반대를 인식”하는 것은 여전히 1종 인식인 상상에 속한다. 다시 말해 스피노자는 이성을 통해 상상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상상을 확장하고 축적해 적합한 인식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 관점의 함의는 심대하다. 이는 상상 같은 부적합한 인식으로부터 인간이 근원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과 더불어, 외부에서 이성을 도입하는 방식으로 상상을 축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인다. 상상은 이성에 의해 추방되는 게 아니라 이성으로 점차 이행하는 것이다. 또한 스피노자는 상상을 오류의 원천으로 봤지만 “그 자체가 오류는 아니”라고 밝혔다.7 자신이 상상하는 것이 실은 허구임을 알고 있을 때, 상상은 즐거움이나 기쁨과 같은 정서를 통해 역량을 증대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쉽게 말해 ‘픽션’을 ‘사실’로 착각하지만 않는다면 상상은 유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상상과 이데올로기의 관계에서 정서, 즉 감정의 위치는 어디인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는 상상은 있지만 감정이 빠져 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정서와 상상을 모두 논하지만 상상과 정서의 관계를 직접 명시한 구절이 없다. 따라서 감정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나온 논의를 종합해 거칠게나마 도식화할 필요가 있다.
먼저 상상과 정서부터 보자. ‘에티카’ 1부에 나온 상상에 대한 정의(‘신체의 변용에 대한 관념’)는, 3부 정서에 대한 설명과 상당히 유사하다. ‘에티카’ 3부 정의 3은 정서를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이라고 말한다. 즉, 역량과 관련되는 정서와 달리 상상은 역량과 무관하다는 차이가 있지만, 상상과 정서 모두 신체의 변용이 만들어낸 관념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타인들을 볼 때, 보는 행위에서 즉시 신체의 변용이 발생한다. 대상이 낯선 이라면 아무런 감정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친구라면 기쁜 감정이 일어날 것이다. 가슴 아프게 이별한 애인과 닮은 사람이라면 슬픔이 밀려올 것이다.
신체의 변용은 정서 없이 상상만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정서가 발생했다면 그것은 상상이 이미 수반된 것이다. 요컨대 ‘정서 없는 상상은 있어도 상상 없는 정서는 없다.’ 따라서 정서, 즉 감정은 필연적으로 상상의 문제가 된다. 이는 감정의 문제가 곧 이데올로기의 문제임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감정은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되는가? 다음 회에서 논의를 이어가기로 한다.
1. 하홍규, “감정, 삶, 사회 –감정 사회학 이론들”, 서울대학교국제문제연구소 편, ‘감정의 세계, 정치’, 사회평론, 2018
2. 에밀 뒤르켐, 민혜숙·노치준 옮김, ‘종교 생활의 원초적 형태’, 한길사, 2020
3. 다론 아제모을루·사이먼 존슨, 김승진 옮김, ‘권력과 진보’, 생각의힘, 2023
4.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강영계 옮김, ‘에티카’, 2부 정리 41, 서광사, 129쪽, 2007
5. 루이 알튀세르, 김동수 옮김, ‘아미엥에서의 주장’, 솔출판사, 1991
6.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강영계 옮김, ‘에티카’, 2부 정리 29 주석, 서광사, 118쪽, 2007
7.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강영계 옮김, ‘에티카’, 2부 정리 17 주석, 서광사. 108쪽, 2007
박권일 미디어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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