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세기 네덜란드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 위키미디어 코먼스
‘정동’ 논의가 생각보다 길어졌다. 이건 불가피한 작업이기도 했는데 무엇보다 최근 인문·사회과학 영역에서 제출되는 상당수 연구가 감정·정서 대신에 ‘정동’을 핵심 개념으로 사용하면서 종종 혼동이나 오해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극우 관련 연구에서도 이는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극우·극단주의, 포퓰리즘, 탈진실 현상 등에서 개념적 도구로 ‘정동’을 택하는가 아니면 감정을 택하는가는 분석 과정만이 아니라 실천적 대안에서도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글은 몇 가지 이유에서 ‘정동’ 개념을 기각하고 감정(또는 정서, 정념) 개념을 채택했다.
아이작 뉴턴은 어느 편지에서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멀리 볼 수 있다면, 그것은 거인의 어깨에 섰기 때문”이라고 했다.1 극우 현상, 정확히는 극우 감정이라는 문제를 더 멀리 보기 위해서, 이제 우리는 또 한 명의 지적 거인의 어깨에 올라탄다. 그의 이름은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바뤼흐 스피노자)다.
스피노자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활동한 철학자로, 서양철학사에서 합리주의 철학자로 분류된다. 대표작으로 ‘에티카’(윤리학), ‘신학정치론’ 등이 있다. 스피노자는 위대한 지성이 즐비한 서양철학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우뚝 선 거인 중 하나다. 언젠가 철학자 질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가리켜 “철학자들의 왕” “신학으로부터 철학을 구출한 철학자들의 그리스도”라고 말한 바 있다.2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스피노자가 “마음과 몸의 문제에 대해 오늘날의 연구자들이 내놓고 있는 해답을 예측”했고 “이성과 감정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결합시켰다”고 평가한다.3
여기서는 주로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담긴 그의 독창적인 정서(affect) 이론을 바탕으로 대체 인간 존재에게 감정이란 무엇인지, 감정에 예속된 인간이 어떻게 감정을 배제하지 않고도 이성적 인식에 다다를 수 있는지, 그리고 감정이 어떻게 극우 이념 같은 이데올로기와 연결되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참고로 철학 및 철학사에서 스피노자의 ‘affect’(라틴어 affectus)는 ‘정동’이 아니라 ‘정서’ 또는 ‘감정’이 표준 번역이며 이 글은 그것을 준용한다.
스피노자 이전까지 철학자 대부분은 육체가 정신보다 열등하고, 욕망이나 감정은 이성의 방해물이라 여겼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육체가 정신보다 열등하거나 욕망이나 감정에 이성이 대립된다고 보지 않았다. 스피노자에게 인간의 본질은 욕망과 정서였다. 이 말은 곧, 인간은 그저 다양한 욕망을 조율할 수 있을 뿐 결코 욕망을 초월해 이성으로 곧바로 접근할 수 없다는 의미다. 기쁨과 슬픔 같은 일상 감정들, 즉 정서는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자기 역량이 증대하거나 감소할 때 나타나는 신체의 변용(affection)이자 그 변용에 대한 관념’이다.4
여기서 잠시 앞의 글에 언급된 샹탈 무페로 돌아가자. 무페는 스피노자를 인용하면서 ‘정동’(affect), 곧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정서를 역시 스피노자가 말한 변용(affection)이라는 개념과 명확히 구별한다. 그러면서 무페는 변용을 “담론적인 것과 정동적인 것이 구체적인 동일화 형태를 만들어가면서 접합되는 실천”, 즉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실천(practice)으로 설명한다.5
그러나 변용은 정서와 다른 것, 혹은 정서(‘정동’)를 유발하는 행위 같은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가 말한 변용은 ‘외부 물체가 인간 신체에 일으킨 작용’이다. 예를 들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우리 신체엔 즐거움이라는 감각적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변용이다.(참고로 변용의 결과 신체에 나타난 흔적으로서 이미지에 대한 관념이 바로 ‘상상’이다. 이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설명할 것이다.) 다시 말해 변용은 주체의 능동적 실천 같은 것이 아니라 담백하게 ‘정서 작용과 그 관념’을 뜻할 뿐이다. 그러니까 무페는 스피노자의 단순한 정의에서 지나치게 자의적인 의미를 추출한 것이다. 이는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실천적 목표를 위해서, “담론적인 것”을 ‘정동’과 어떤 식으로든 접합해야 하는 이론적 필요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변용을 정의하는 대목(‘에티카’, 3부 정의 3)은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료하다. 스피노자 정서론의 ‘실천적 함의’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스피노자의 ‘에티카’(강영계 옮김, 서광사 펴냄, 2007) 표지.
17세기 책인 ‘에티카’가 21세기인 지금까지도 감동을 주는 까닭은, 그것이 불가능성 속에서 가능성을 찾아내려 했던 집념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급진적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20대 중반에 자신이 속한 유대인 공동체에서 추방당했는데, 당시 스피노자에게 내려진 파문 선고문은 전례 없이 끔찍한 저주로 가득 차 있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저주했던 그 저주로 그를 저주한다. 엘리사가 소년들을 저주했던 그 저주로 그를 저주한다. 율법 책에 쓰여 있는 모든 징벌로 그를 저주한다. 그는 낮에 저주받을 것이며 밤에 저주받을 것이다. 누울 때 저주받을 것이며, 일어날 때 저주받을 것이다. 나갈 때 저주받을 것이며, 들어올 때 저주받을 것이다. 주가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주의 분노와 그의 질투가 그를 태울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 쓰인 모든 저주가 그를 덮칠 것이다. 그리고 주가 하늘 아래로부터 그의 이름을 없앨 것이다. 그리고 이 율법 책에 쓰여 있는 계약의 모든 저주에 따라, 주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과 악에 속한 그를 떼어놓을 것이다.”6
스피노자는 이 파문으로 공동체의 모든 공식적 관계로부터 단절당한다. 이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일상적으로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 그는 인간 사회가 얼마나 정념과 악의로 가득 차 있는지를 누구보다 절절히 겪어본 사람이었다. 어쩌면 스피노자가 철학사에 가장 빛나는 ‘이성의 철학자’이자 합리론의 대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터무니없는 비이성에 의해 삶의 경로가 비틀려버려서일지 모른다. 만약 평범한 사람이라면 자신을 저주한 세상을 같이 저주하면서 광기로 물들어갔거나, 아니면 이성의 빛으로 정념이라는 어둠을 몰아내야 한다고 역설했을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달랐다. 그는 감정에 비해 절망적일 정도로 무기력한 이성을 말하면서도, 그 불가능해 보이는 이성의 길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예속을 “정서의 통제에 대한 무능력”으로 정의한다.7 쉽게 말해 인간은 노예 같은 존재인데 그 이유는 감정에 속절없이 휘둘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 스피노자는 인간이 욕망이나 감정을 초월할 수 있다고 보지도 않았다.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정서는 존재를 보존하는 역량, 곧 ‘코나투스’(conatus)이기에 인간이 살아 있는 한 그 조건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럼 인간은 영원히 ‘감정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그렇지는 않다. 스피노자는 분명 이성주의자였지만 이성 만능론자는 아니었다. 그는 또한 인간이 이성에 얼마나 도달하기 어려운지 누구보다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에티카’라는 저술은 얼핏 모순처럼 보인다. 인간의 근원적 존재 조건인 정서·감정이 얼마나 강력한 힘인지를 집요하게 분석하면서, 끝에 가서는 그 예속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기 때문이다.
‘불가능성 속의 가능성 찾기’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러한 시도는, 이 글이 처음부터 터 잡은 이론적 시좌(視座)이기도 했다. 연재 첫 회는 “체화된 차별·혐오의 정서야말로 극우의 가장 거대한 에너지원”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연재 11회에서는, “이성과 합리성만으로 극우 현상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정서와 감정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지만 “감정을 분석의 중심에 놓되 해결 방안에서 이성적 목표를 향해야 하므로 어쩔 수 없이 모순으로 보이는 과제를 떠안게 된다”고 적었다.
이는 단지 극우 현상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과학 연구에 해당된다. 인간의 인식 및 실천에서 감정·서사·당파성 등 이른바 ‘주관적’ 요소를 분리하기란 불가능하다. 감정·서사·당파성 ‘바깥’의 불편부당한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완벽히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진리의 지평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진리가 주관적이라는 식으로 무한 상대주의의 악순환에 빠져들어서도 안 된다. 인간은 주관성의 한계를 비판하더라도 탈주관성이 아니라 주관성 속에서, 즉 ‘내재적으로’ 진리의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의 조건을 물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지극히 ‘좁은 회랑’으로 진입해야 한다. 요컨대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잠정적이고 맥락적인 진리, 그리고 책임 있는 실천의 규준을 점진적으로 고안해갈 수밖에 없다.
다시 스피노자로 돌아가보자. 스피노자는 이성을 통해 감정을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목숨만큼 사랑하던 연인과 이별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슬픔에 빠져 식음을 전폐하는 그에게 ‘정신 차리고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조언해봤자 전혀 먹히지 않을 것이다. 즉, 감정은 이성으로 극복될 수 없다. 스피노자는 그 이치를 이렇게 표현한다.
“정서는 그것과 반대되는 정서, 그리고 억제되어야 할 정서보다 더 강한 정서에 의지하지 않고는 억제될 수도 없고 제거될 수도 없다.”8
요컨대 감정은 이성이 아니라 다른 더 강한 감정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이별의 슬픔은 냉철한 현실감각이 아니라 새로운 사랑의 기쁨을 통해서야 비로소 잊힐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일상에서 부정적 감정이 더 강한 긍정적 감정에 ‘덮이면서’ 사라지는 것을 종종 경험한다. 여기까지는 우리의 상식과 직관에 부합한다. 정말로 흥미로운 건 그다음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이성으로 감정을 통제할 수 없음에도 인간이 더 높은 차원의 지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유하자면 감정의 극복이 ‘이이제이’나 ‘이독제독’을 넘어 ‘환골탈태’나 ‘상전벽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다음 회에서는 감정에 예속된 인간이 어떻게 이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역시 스피노자의 텍스트를 통해 살펴본다.
1. Newton, I. (1675), ‘Letter from Sir Isaac Newton to Robert Hooke’, Historical Society of Pennsylvania, Retrieved 7 June 2018
2. 질 들뢰즈, 박기순 옮김, ‘스피노자의 철학’, 민음사, 2001
3. 안토니오 다마지오, 임지원 옮김, ‘스피노자의 뇌’, 사이언스북스, 2007
4.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강영계 옮김, ‘에티카’, 3부 정의 3, 서광사, 153쪽, 2007
5. 샹탈 무페, 이승원 옮김,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문학세계사, 113~114쪽, 117쪽, 2019
6. 진태원,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 그린비, 25쪽, 2022
7.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강영계 옮김, ‘에티카’, 4부 서문, 서광사, 241쪽, 2007
8.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강영계 옮김, ‘에티카’, 4부 정리 7, 서광사, 2007
박권일 미디어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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