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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은 정치적 질병? 아니, 정치의 본성

우리 안의 극우 18 누가 극우인가 ⑰
감정을 먹고 자라는 정치… 어떤 조건에서 감정은 정치가 되고 정당화되는가
등록 2026-01-29 21:44 수정 2026-02-04 06:45
내란죄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영장실질심사가 열린 2025년 2월1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을 둘러싼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영원 한겨레 기자 

내란죄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영장실질심사가 열린 2025년 2월1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을 둘러싼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영원 한겨레 기자 


이제 정치철학자 샹탈 무페의 ‘정동’을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무페는 1985년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함께 쓴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급진민주주의 이론가다. 2000년대 이후로 그는 라클라우와 함께 포퓰리즘 현상에 깊이 천착했다. 라클라우는 2005년 ‘포퓰리즘 이성’이라는 문제작을 발표한 바 있고, 무페는 최근 ‘좌파 포퓰리즘’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탐색하는 소책자를 잇달아 출간했다.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와 ‘녹색 민주주의 혁명을 향하여: 좌파 포퓰리즘과 정동의 힘’ 등이 그것이다.

이 글이 계속 강조하고 설명해온 것처럼, 오늘날 극우 현상은 민주주의 위기의 결과다. 또한 그것은 ‘위로부터의’ 민주주의 퇴행만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퇴행이라는 점에서 정확히 포퓰리즘의 문제다. 포퓰리즘, 곧 대중주의는 오랫동안 엘리트들, 심지어 대중 자신으로부터도 경멸당해왔다.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는 장기적으로 공동체의 미래를 망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트럼피즘과 유럽 극우 정당의 꾸준한 성장을 보면, 부정하든 긍정하든 그것이 기능부전에 빠진 대의민주주의에 어떤 식으로든 충격과 변화를 일으켰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바로 그것이 라클라우나 무페 같은 정치철학자가 포퓰리즘을 연구한 이유다.

포퓰리즘 악마화 대신 들여다봐야 할 것들

그런데 라클라우와 무페의 관점은 포퓰리즘에 대한 기성 언론이나 주류 학계의 시선과는 좀 달랐다. 과거에 비해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여전히 포퓰리즘은 많은 학자에게 일종의 병리적 현상으로 다루어진다. 즉, 포퓰리즘은 ‘정상 정치’에서 벗어난 비정상적 상황이며, (분석되고 연구될 필요는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교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클라우와 무페에게 포퓰리즘은 병리적이고 비정상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가 가능한 조건을 구성한다. 요컨대 포퓰리즘은 치료해야 할 ‘정치적 질병’이기는커녕 오히려 정치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 글은 라클라우보다는 무페의 논의에 집중할 것이다. ‘정동’을 스쳐가듯 말하지만 충동, 동일시 같은 프로이트적 개념에 초점을 맞추는 라클라우에 비해 무페는 감정, 정념, ‘정동’ 등의 개념을 더 자주, 또한 직접적으로 도입하기 때문이다. 미리 밝혀두자면, 라클라우의 ‘정동’론은 의미의 차원과 ‘정동’의 차원이 분리될 수 없음을 주장할 뿐 그것이 어떻게 그러하며 왜 중요한지를 구체적으로 해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페의 그것과 동일한 한계를 가진다.1

무페의 ‘정동’(affect)은 앞서 지지 파파카리시와 브라이언 마수미의 “정동”, 그리고 리사 펠드먼 배럿의 ‘정동’과는 또 다른 의미와 맥락을 가진다. 무페는 이렇게 말한다.

“내 성찰은 내가 정념(passion)이라 부르는 정동의 특정한 유형에 관한 것이다. 나는 ‘정념’이란 우리/그들이라는 동일화의 형태를 구성하는 과정 속 정치 영역에서의 중요한 부분인 공통(common) 정동을 의미한다고 본다. 내가 옹호하는 관점에서 보면 정념과 감정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 영역에서 우리는 항상 집단적 동일성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감정’이라는 용어는 집단적 동일성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감정이란 일반적으로 개인에게 부착된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학 분야에서 집단적인 정치적 동일성들 사이 대립을 제안하기 위해서는 공통 정동과 ‘정념’에 대해 말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2

같은 책에서 무페는 “정동은 이 의미화에 담겨지게 되면, 의미화에 힘을 부여하게 될 리비도적 힘”이며 “관념이 권력을 얻게 되는 것은 관념과 정동이 결합하게 될 때”(70쪽)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정동을 다룰 것을 외면하는 정책은 대중들로부터 공감을 얻기 힘들 것”(73쪽)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다른 책에서 무페는 “성공적인 좌파 포퓰리즘 전략 구상을 위해, 정치에서 정동이 가진 중요한 역할과 정동을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을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강조한다.3

논의를 종합하면, 우선 무페가 정치를 사유할 때 ‘집단적 동일화’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정치 과정은 기본적으로 ‘우리’와 ‘저들’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가깝다고 생각하는 무리를 동일시하는 경향성은 일상적 심리 기제이지만 ‘정치를’ 생산하고 ‘정치로부터’ 생산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집단적 동일화에서 정동이 중요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무페는 정념 또는 ‘정동’을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와 ‘저들’을 나누는 것이 정치의 과정

명료한 주장이고 취지를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무페가 ‘정동’을 “의미화에 담겨지고” “의미화에 힘을 부여하는” 것이라 규정하는 데서 명확히 알 수 있는 부분은, 그가 이데올로기 혹은 담론의 차원을 명백히 상정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무페의 ‘정동’은 이데올로기 및 담론적 층위가 사실상 증발한 파파카리시·마수미의 “정동” 개념과 상당히 다르다. 물론 좌파의 현실 개입 전략을 일관되게 사유해온 무페에게 담론이나 이데올로기 개념은 쉽게 배제하거나 포기될 수 없는 것일 테다.

그러나 한편으로 무페의 ‘정동’은 마수미의 “정동”과 중요한 공통점을 가진다. “개인에게 부착된 것”이라는 이유에서 감정 개념을 배제하고 ‘정동’에 특권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즉, 감정은 “개인에게 부착된 것”이어서 “집단적 동일성을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층위를 분석할 수 있는 개념인 정념 혹은 (공통) ‘정동’만을 중시하겠다는 게 무페의 의도로 보인다. 이를 도식화하면 ‘감정=개인적인 것’ ‘정념·‘정동’=집단적·정치적인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구별이 논리적으로 또 경험적으로 타당하냐이며, 더불어 ‘정동’과 감정을 구별해서 얻을 실익이 무엇이냐다.

정동은 정말 ‘개인 감정’과 다른가?

‘정동’의 탈개인화와 특권화는 마수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입증 책임’을 요구받는다. 즉, ‘개인에게 부착되지 않고 오직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심적 상태’란 무엇인지 밝힐 책임은 주장을 제기한 쪽에 있다. 아쉽게도 무페는 논리적 설명이나 설득력 있는 사례를 제시하지 않는다. 무페의 ‘정동’은 파파카리시가 말한 “정동”, 그러니까 ‘흥겨운 음악에 자기도 모르게 몸이 동조하는’ 현상과도 다르다. 무페의 경우 단순한 신체적 동조 현상이 아니라 정체성 형성, 집단적 동일화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페가 말하는 정념 내지 공통 ‘정동’이라는 것을 막연히 추정할 수밖에 없다. 굳이 예를 들어보자면 ‘소속감’이 있겠다. 정당, 동아리, 부족 등 다양한 종류의 ‘무리’에 속해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때로 집단행동의 강렬한 에너지가 된다는 점에서 ‘정치적’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소속감은 개인에게 부착되지 않은 것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소속감은 집단 감정이지만 개인이 실제로 느끼는 감정이며 그 양과 질 역시 개인의 인식과 경험에 따라 전혀 다르다. 더구나 무페는 ‘정동’을 감정과 구별할 것을 그렇게 강조했으면서 정작 뒤에 가서는 ‘정동’을 감정과 사실상 동일한 의미로 사용한다. 예컨대 무페는 원한(ressentiment)을 “비난받아야 할 정동”이라 주장한다. 또한 그는 원한이 “언제나 개개인이 잘못된 뭔가의 피해자가 된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구체적인 상황에 맞서는 분노의 반응에서 나온다”고 설명한다.4

이러한 “원한”이나 “분노”야말로 개인에게 부착된 감정 아닌가? 또한 그것은 특별히 정치화되기 쉬운 개인적 감정인 자부심이나 수치심과도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제1588호에서 다룬 ‘미국 극우의 감정’ 참조)

설령 개인으로는 느끼지 않지만 집단일 때만 나타나는 어떤 느낌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집단적 동일화, 정체성 형성, 나아가 정치 행위로 이어지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어쩌면 마수미나 무페가 (개인적) 감정과 구별된 특권적 개념으로서 “정동” 혹은 ‘정동’에 집착하는 이유 중 하나는, ‘개인의 느낌이 어떻게 집단 행위, 곧 정치로 연결되는가’라는 난감하고 복잡한 질문을 편리하게 우회할 수 있어서는 아닐까? 다시 말해 감정을 오로지 내밀한 사적 차원의 문제로 한쪽 구석에 치워두면, 공적 차원에 상존하는 비합리성과 비이성을 “정동” 혹은 ‘정동’이라는 이름으로 직접 분석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2025년 4월19일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인근에서 자유통일당이 연 ‘국민저항권 광화문국민대회’ 참가자들이 ‘윤 어게인’이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2025년 4월19일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인근에서 자유통일당이 연 ‘국민저항권 광화문국민대회’ 참가자들이 ‘윤 어게인’이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중요한 건 ‘개인 감정’을 확대재생산하는 조건

그러나 감정 개념을 피해 어떤 특수한 개념을 자꾸 상정하더라도 결국 도돌이표처럼 다시 감정 개념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스피노자가 일찍이 통찰했듯 정서는 인간이 서로를 모방하는 사회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정치 현상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대부분의 감정, 이를테면 분노·수치심·자부심·울분 등은 자극에 대한 무조건반사 같은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의식되고 성찰된 반응이며, 개인 차원과 집단 차원에서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가 되는 피드백 루프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핵심은 집단적 ‘정동’과 개인적 감정을 구별하는 일이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부분은, 개인의 감정을 집단적·정치적 감정으로 전환하고 다시 그것이 개인의 감정을 확대재생산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과정은 어떻게 이데올로기화/정당화되는가 같은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감정/정념/‘정동’을 의미화나 담론적 실천과 연결하려는 무페의 시도 자체는 이론으로든 정세로든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그 사유의 밀도는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무페의 ‘정동’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 일단 멈추기로 하자. 다음 회에서는 스피노자의 정서론이 왜 오늘날 극우 감정을 분석하는 데 여전히 유용할 수 있는지를 들여다본다.

박권일 미디어사회학자

1.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이승원 옮김, ‘포퓰리즘 이성’, 빨간소금, 181쪽, 2026

2. 샹탈 무페, 이승원 옮김, ‘녹색 민주주의 혁명을 향하여: 좌파 포퓰리즘과 정동의 힘’, 문학세계사, 63쪽, 2022

3. 샹탈 무페, 이승원 옮김,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문학세계사, 117쪽, 2019

4. 샹탈 무페, 이승원 옮김, ‘녹색 민주주의 혁명을 향하여: 좌파 포퓰리즘과 정동의 힘’, 문학세계사, 74~75쪽,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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