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자벨 위페르(오른쪽)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 ‘피아니스트’(2002)의 한 장면. 여성학·평화학 연구자 정희진은 2003년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에 기고한 글에서 “‘사랑은 여자의 일이되, 사랑의 주체는 남자’라는 이 체제의 법칙을 거부한 여자가 그녀 가슴의 내파를 견디지 못하고 자폭한 이야기”라고 이 영화를 설명했다. 영화 ‘피아니스트’ 네이버 스틸컷 갈무리
언젠가 나는 세포의 죽음을 현미경으로 촬영한 영상을 온라인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이에 매료된 적이 있다. 조직에서 떨어져나온 하나의 세포였는데, 세포막 바깥으로 조금씩 내용물이 삐져나오더니 점차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고 그러다 금방 죽고 말았다. 죽은 뒤 세포는 외부 환경과 세포 내부 환경에 구별이 없어진 상태였다. 세포의 내외부를 경계 짓는 세포막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내가 이 영상에 매료된 것은 세포의 죽음이 수많은 종교에서 말하는 일원성(비이원성)의 상태와 유사해 보였기 때문이다. 외물(外物)과 자아가 어울려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상태. 많은 구도자가 원하는 상태. 지혜로운 사람들이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상태.
그러나 생명이 있는 것에게 물아일체의 상태가 된다는 것은 죽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 혹은 이렇게도 생각의 전환이 가능했다. 한 개체의 생명력이 지속한다는 것은 언제나 바깥과 내가 구별되는 상태일 수밖에 없다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너와 나, 바깥과 내부, 객관과 주관, 물질과 정신을 구별할 수밖에 없다. 하나됨의 감각은 우리를 기쁘게 하고 고양하지만 구별됨의 감각은 살아가게 하고 살아남게 한다.
세포의 경계를 만드는 것은 세포막이 하는 일이다. 세포막은 선택적 투과성(Selective permeability)을 갖는다. 어떤 물질은 자유롭게 통과시키고, 어떤 물질은 채널을 통해 특정 이온만 골라내거나 자신의 수송체와 결합한 뒤 구조를 변형시켜 통과시킨다. 어떤 물질은 전혀 통과시키지 않는다. 완전히 닫혀 있지도, 완전히 열려 있지도 않다. 이 선택적 투과성이 세포의 생명력을 유지한다.
어떤 여성들은 너무 많이 열린 채로 산다. 이들은 ‘선택적 투과성’이 약해진 상태다. 어떤 이유에서건 ‘노’(No)라고 말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어렵다. ‘노'를 말할 때 발생하는 긴장을 버티기가 어렵다. 두 자아가 만나 부딪힐 때 반드시 해내야 하는 협상을 하기가 어렵다. 협상력의 근간이 될 심리적 자원이 현저히 부재해서다.
흔히 책임감의 영어 단어 ‘Responsibility’를 반응하는 능력(Response+Ability)으로 풀이하곤 한다. 세계의 고통과 필요에 응답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들 하고, 그것은 분명 정의롭고 윤리적인 일이지만, 내 생각에 많은 (취약한) 여성에게 이 조언은 그리 유효하지 않다. 그들은 이미 주변 환경에 너무 많이 반응하고 있다. 너무 많이 반응해서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소진되고 있다.
한 공간에 여러 명의 여성이 함께 살게 되면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피를 흘리기 시작한다. 월경 주기가 유사해지는 것이다. 여아가 남아보다 어머니의 감정 상태에 더 동조하는 경향을 띤다는 것도 잘 알려진 연구 결과다. 여아는 표정, 특히 감정적 얼굴에 더 오래 시선을 고정하는 경향이 있고, 다른 아기의 울음소리에 따라 우는 등 공감적 울음을 더 자주 보인다.
자라면서도 여성은 타인의 필요에 예민하게 반응하게끔, 친절하고 사려 깊고 다정하게 말하게끔 사회화된다. 자기 욕구를 우선시하며 이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여성은 곧잘 이기적인 사람 취급을 받으며 가까운 사람들에게 비난받기 일쑤다.
이런 성차가 생물적 요인으로 발생하는지 사회문화적으로 학습되는지는 알기 어렵다. 안다고 해서 딱히 당장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분명한 점은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외부 세계에 반응하지 않는 것도 (세포로 치자면 세포막이 꽉 막힌 상태도) 개체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지만, 반대로 외부 세계에 너무 많이 반응하는 상태도 (세포로 치자면 세포막이 투과시키지 말아야 할 것도 투과시키는 상태도) 개체의 생존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반응하는 능력은 선택적으로 발휘돼야 한다. 외부 환경에 반응하는 것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고 타자와 함께하는 아름다운 능력이지만, 이런 싱크로나이즈(Synchronize·동기화)는 개체성이 올바로 분리 및 유지된 채로 벌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한 개체는 자기 자신의 자치권과 자율성을 활용하는 법을 잃어버리고 외부 환경에 휘둘리는 상태가 된다. 자신의 느낌, 판단, 행동의 근거를 완벽하게 외주 준 상태가 되는 것이다.
잃어버렸던 자율성을 회복하는 데는 한참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자신의 자율성을 아직 만들지 못한 상태, 자기 목소리를 듣는 법을 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는 독재자처럼 군림하는 카리스마형 인물에게 휘둘리기 좋다. 한 국가의 식민지 시기가 끝나고 전체주의 독재 시대가 도래하는 것처럼.
한편 자율성을 잃어버린 두 개인이 만날 때 벌어지는 일은? 극도의 불안정성이다. 닻을 상대에게 내리고 있는데 상대도 내게 닻을 내린 상태이니까. ‘나는 네가 그렇게 해서 그렇게 한 거야’ ‘나는 네가 그렇게 해서 그렇게 한 건데?’의 무한 반복…. 근래에 타인을 나르시시스트로 명명하고 악마화하는 담론이 팽배한 것을, 나는 자신의 주체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자기보다 자아가 강한 타인에게 이끌리며 휘둘리던 사람들이 뒤늦게 자신의 주체성을 회복하고자 분노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추측하곤 한다. 우리는 상대에게 내렸던 닻을 다시 끌어올려 자신에게 내려야 한다.

이자벨 위페르(오른쪽)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 ‘피아니스트’(2002)의 한 장면. 영화 ‘피아니스트’ 네이버 스틸컷 갈무리
우리 시대의 지성 정희진 선생이 2003년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24호에 기고한 글 ‘욕망으로서의 마조히즘, 이자벨 위페르의 ‘피아니스트’’를 나는 거의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감히 말하지 못했던 여성들의 경험을 은밀히 전수해주는 비기 같다. 이 글에서 정희진 선생은 다음과 같이 쓴다.
“(취약한) 여성들은 관계가 주는 긴장, 관계를 통제(해야)하는 자기 권력을 견디지 못한다. 그의 속으로 들어가거나 그가 내 안으로 들어와, 두 사람이 한 사람이 되어, 자아 경계의 충돌과 협상이 주는 긴장이 해소되길 바란다. 여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자기를 소멸시키는 것이다. 자아를 없애려면? …사랑하는 사람의 폭력의 대상이 되어 ‘그대 가슴에 물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로부터 20년 뒤 한국의 이성애 여성들은 종종 내게 ‘자아가 없는 남성’을 만나고 싶다고 고백해온다. 자아 경계의 충돌과 협상이 주는 긴장을 견디지 못해 택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그러나 먹히는 대신 먹어버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방향을 바꾼 사냥일 뿐이다.
함께 춤추는 사랑을 상상해본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리드하다 지루해지는 춤 말고, 파트너에게 모든 것을 맡기다 춤추는 법을 잊게 되는 춤 말고, 둘이서 함께 움직이며 추는 춤. 자신의 경계를 스스로 지킬 수 있을 때, 알 수 없음과 가닿을 수 없음이 만들어내는 긴장은 위협이 아니라 관능이 되기도 하니까.
하미나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 저자
*하미나의 나쁜 피: 공격성은 인간의 기본 특성이자 생명체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지니고 길러야 할 자질입니다. 터부시돼온 여성들의 공격성에 대해 말합니다. 4주마다 연재.
https://h21.hani.co.kr/arti/SERIES/3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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