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8월13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기념품점 매대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얼굴 사진으로 만든 가면이 걸려 있다. AP 연합뉴스
옥스퍼드 사전 2025년 올해의 단어는 ‘분노 낚시’(rage bait)였다. 이 단어는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감정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이른바 ‘가짜뉴스’, 개소리(“bullshit”), 음모론이 창궐하는 탈진실(post-truth) 현상은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난제이면서 동시에 극우주의나 권위주의 정치의 확산과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블라디미르 푸틴 체제의 미디어 현실에 천착해온 러시아 출신 언론인 피터 포메란체프는, 푸틴 이후의 러시아를 ‘형상변환 체제’(shapeshifting regime)라 정의한다. 이 체제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정치 형태를 연출하고 변환함으로써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진정한 대안이나 반대 세력이 형성되는 것을 막는다. 포메란체프는 저서 ‘진실은 없고 모든 것은 가능하다’에서, “크렘린의 모스크바는 아침에는 과두제처럼 느껴질 수 있고, 오후에는 민주주의, 저녁 식사 때는 군주제, 그리고 잠자리에 들 때쯤이면 전체주의 국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1
이 기괴한 통치 형태를 떠받치는 선전 도구들, 그러니까 푸틴 정부가 장악한 뉴스 미디어, 티브이(TV) 쇼, 광고는 확고한 신념이나 일관된 이념을 주입하기보다는 공포와 불안을 배경으로 감정적 위안을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포메란체프는 한 기고문에서 푸틴 체제의 미디어 전략 핵심에 다름 아닌 ‘감정’이 있다고 말한다.
“포커스 그룹 조사에서 우리는 전국적으로 사람들이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던 트라우마를 이야기할 때 가장 감정적으로 반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가혹한 침공 이후 부상을 당해 돌아온 친척들, 체르노빌 원전 재난, 소련 붕괴 후 고난을 겪은 가족의 이야기 등이다. 이러한 원망과 혼란의 감정이 러시아의 선전 도구로 이용되고 있었다. 그 선전은 크렘린 자신이 가져온 굴욕은 외면한 채, 사람들에게 지위와 위엄을 심어주려 했다. 이 선전의 힘은 역사적 진실(혹은 거짓)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적 안도에 있었다. 이런 거짓말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본질을 놓치게 된다. 저널리스트가 해야 할 일은 거짓을 정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감정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2
동시에 포메란체프는 ‘감정적 서사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탈리아 매체 ‘코리에레 델라 세라’의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9개월간 이민자 관련 뉴스에 대한 수용자의 반응을 실험한 결과를 들려준다. 그에 따르면, 이주민 문제에 대한 인포그래픽 기사나 팩트체크 기사는, 그것이 객관적 현실을 올바르게 전달함에도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데 거의 효과가 없었다. 이주민이 겪는 고난과 차별을 다룬 감성적 르포는 오히려 강한 반발을 일으켰다. 반면에 차분한 대화와 신뢰를 끌어낸 기사도 있었다. 바로 맥락(context)과 ‘큰 그림’(the bigger picture)을 보여주는 기사였다. 이 기사들은 이주민 문제의 발생 배경부터 설명하면서 중동 전쟁과 사하라사막 이남의 기근 등 근본 원인을 분석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책 개입 가능성까지 모색했다.
푸틴이 만든 선전의 위력이 감정적 보상에서 나온다는 사실, 그리고 거짓을 정정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을 보였다는 점에서, 포메란체프의 연구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다만 그가 말한 맥락과 ‘큰 그림’ 역시, 정보 전달에 그치기보다는 거대한 구조 때문에 고통과 불안을 겪는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반영하는 방식이어야 효과적일 수 있다. 사람들을 설득하고 또 움직이게 하는 것은 단순한 ‘감성팔이’, 곧 즉자적 감정에의 호소가 아니라 바로 ‘큰 그림 속의 감정’이다. ‘큰 그림 속의 감정’은 느끼는 걸 넘어 ‘의식되고 되새겨지는 감정’이다. 그것은 ‘내 감정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세계 안에 마땅히 나의 자리가 있음’을 각성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참여와 헌신을 독려한다. 이는 극우파부터 극좌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전제주의(despotism) 사회부터 민주주의 사회까지 거의 동일하게 작동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트루스소셜 계정. 연합뉴스
연재를 처음부터 읽어온 독자는 이미 알 테지만, 이 글은 극우 현상을 보는 몇 개의 명확한 관점 축을 중심으로 논의를 서로 연결하고 확장해왔다. 첫째, 극우는 위로부터의(엘리트의) 민주주의 퇴행일 뿐 아니라 아래로부터의(대중의) 민주주의 퇴행이다. 둘째, 극우를 지지하는 대중은 정치 주체일 뿐 아니라 미디어 주체다. 이 두 관점을 합치면 극우 현상은 ‘엘리트와 대중이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민주주의를 퇴행시키는 미디어-정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그리고 무엇을 통해 이들은 그렇게 행동하는가? 비용과 편익을 냉철히 계산하는 합리적 선택만으로는 현상을 설득력 있게 해명할 수 없다. 예컨대 한밤의 친위 쿠데타라는 윤석열의 ‘도박’과, 그런 자를 열광적으로 지지하며 법원을 습격한 군중을 이성과 합리성으로 해석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처럼 극우 현상의 많은 부분은 이성, 합리성, 형식논리 같은 잣대로는 그 전모를 그려낼 수 없다. 여기서 세 번째 관점 축이 도출된다. 바로 감정이다. 거듭 강조해온 것처럼 여기에서 감정은 광기의 분출이나 이성의 결여가 아니라 인간 삶의 중심에 있는 신경반응이면서 동시에 나름의 체계와 논리를 가진 담론 구성물이다. 철학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의 개념을 비틀어 표현하자면, 감정은 개인과 집단의 정치적 실천을 강력하게 추동하는 ‘포퓰리즘적 이유’다. 보통 “포퓰리즘적 이성”으로 번역된다.3
분명 감정에는 충동, 비이성, 직관적인 요소가 짙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중요한 사실은, 일상에서 경험하는 감정 대부분이 개인 안에서 불쑥 솟아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임상심리학자 리사 펠드먼 배럿은 이 사실을 두고 감정이 “사회적으로 실재한다”고 말한다. 한편 이 글은 “감정은 이데올로기적”이라고 주장한다. 두 명제의 의미와 맥락은 다르지만 큰 틀에서 관점은 다르지 않다. 감정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집단적·사회적이라는 것이다.
감정의 강한 힘이 개인과 집단의 실천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여준 기념비적 저작 중 하나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이다. 이 책에서 역사학자 에드워드 파머 톰슨은 “노동계급의 형성은 경제사적 사실 못지않게 정치사, 문화사적 사실”이며, “가장 크게 감정적인 반발을 불러일으킨 쟁점은 단순한 ‘빵’ 문제라기보다 전통적인 관습, 정의, 독립, 안정 혹은 가족경제같이 가치가 문제시되는 쟁점”이라고 밝힌다.4
이러한 이데올로기로서의 감정, 혹은 ‘사회적 실재’로서의 감정을 논의할 때 다시금 문제가 되는 것이 이른바 “정동”(affect)이다. 앞선 회에서 설명한 것처럼 “정동”은 감정과 혼용되며 적지 않은 개념상의 혼란을 초래한다. 더 치명적인 문제는 “정동”이 그 정의상 앞서 말한 ‘큰 그림 속 감정’, 즉 ‘의식되고 되새겨지는 감정’을 분석에서 제외하거나 평가 절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논의가 번잡해짐에도 불구하고 극우 감정을 이론화할 때 “정동” 개념에 관한 설명을 피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부터는 지난 회차의 논의를 이어받아 몇몇 학자의 정동 개념 용례를 살피면서 본격적으로 감정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고자 한다.
앞서 “정동” 개념의 대표적 이론가로 브라이언 마수미를 소개하고, 그가 제기하는 “정동”이란 무엇이며 기존의 감정 개념과 어떻게 다른지 간략히 설명했다. 1990년대 중반 처음 등장한 마수미의 ‘정동 이론’(affect theory)은 “정동적 전환”(affective turn)이라 불릴 정도로 광범위한 반향을 불러왔다. ‘감정’(emotion)과 명확히 구별되는 특수한 개념인 “정동”이 상당수 인문·사회과학 연구에 수용되면서 1980년대 감정노동 연구에서부터 본격화된 감정사회학 또는 신경과학적 감정 연구와 별개의 흐름이 생겨났고,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affect’를 감정(emotion)과 구별한다고 해서 이 ‘affect’가 반드시 마수미적 의미의 “정동”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샹탈 무페가 포퓰리즘을 논의하며 주요하게 도입하는 ‘affect’는(한국어판 역자가 “정동”이란 번역어를 사용하고 무페 자신이 감정(emotion)과 명확히 구별하기는 하지만) 그 의미가 마수미의 용법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한편, 신경과학·생물학 차원에서 ‘affect’를 감정과 구별하는 리사 펠드먼 배럿의 경우도 있다. 따라서 논의를 명확히 하려면 정동 개념에 관한 용례를 짚어둘 필요가 있다.
먼저 살펴볼 것은 마수미의 “정동” 개념을 그대로 이어받은 사례다. 최근 미디어 연구에서 자주 인용되는 ‘정동적 공중’(affective publics)과 ‘정동적 뉴스’(affective news)라는 개념이 있다. 미디어학자 지지 파파카리시는 트위터 같은 디지털 플랫폼에서 나타나는 뉴스와 대중의 패턴이 기존과는 다르다는 데 주목하고, 이러한 특징적 면모를 ‘정동적 공중’ 및 ‘정동적 뉴스’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가 이러한 개념을 만든 결정적 계기는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에 걸쳐 일어난 소셜미디어의 폭발적 성장과 ‘아랍의 봄’ 시위였다. 파파카리시에 따르면 ‘정동적 공중’은 “감성(sentiment)의 표현을 통해 동원되고 연결되거나 분리되는 네트워크화된 공중 형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동적 뉴스’란 ‘감성 표현이 담긴 네트워크화된 뉴스의 한 형태’로서, 개인적·주관적 스토리텔링의 결합, 뉴스 게이트키핑과 프레이밍에서 참여자의 다수성,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건에 대한 ‘정동적 조율’(affective attunement), 디지털 플랫폼, 특히 소셜미디어에서의 빠른 유통 등이 특징이다.5
파파카리시는 자기 개념의 기원이 마수미의 “정동” 개념에 있음을 여러 차례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무의식적 강렬함(intensity)의 경험” 같은 표현에서 드러나듯, 파파카리시는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에 나타난 대중의 “정서적 흐름”이 평범한 정서·감정과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특수한 층위의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면, ‘정동적 공중’ 및 ‘정동적 뉴스’ 개념은 오늘날 미디어 현실을 포괄하기에는 한계가 또렷하다. 이는 결국 마수미의 “정동” 개념 자체의 한계에서 비롯한다.
1. Peter Pomerantsev, ‘Nothing Is True and Everything Is Possible’, PublicAffairs, p67, 2014
2. Peter Pomerantsev, ‘Journalism In An Age Of Authoritarianism’, Noema Magazine, https://www.noemamag.com/journalism-in-an-age-of-authoritarianism, 2025.11.18.
3. Ernesto Laclau, ‘On Populist Reason’, Verso, 2005
4. 에드워드 파머 톰슨, 나종일·노서경·김인중·유재건·김경옥·한정숙 옮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창비, 273·283쪽, 2000
5. Zizi Papacharissi, ‘Affective Publics: Sentiment, Technology, and Politics’, Oxford University Press, pp30~63, p125, 2015
박권일 미디어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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