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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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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치’와 ‘도파민 게임’, 종이 한 장의 차이

우리 안의 극우 10. 누가 극우인가 ⑨
능동적 시민도 정치적 효능감에만 매달릴 우려… 공론 사라지고 훌리건이 여론 좌지우지
등록 2025-10-09 21:14 수정 2025-10-15 16:11
2024년 5월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계단에서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과 당시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21대 국회가 끝나기 전에 공론화 결과에 따른 연금개혁 입법을 완수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r

2024년 5월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계단에서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과 당시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21대 국회가 끝나기 전에 공론화 결과에 따른 연금개혁 입법을 완수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r


참여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참여인가’다. 팬덤 정치, ‘훌리건’의 정치는 오늘날 정치 전반의 문제로서, 극우 정치의 양태로도 나타난다. 이는 ‘성찰 없는 열정’이 정치 행위자의 주요 동기이자 관행이 되었음을 의미하며, 합리적 정책을 방해하거나 불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소수의 ‘정치 고관여층’ 목소리만 과대 대표함으로써 ‘참여 불평등’(inequality of participation)을 강화한다. 그렇다면 팬덤 정치의 사회적 배경은 무엇일까?

사회학자 콜린 크라우치는 21세기 초 주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가 “정점”을 찍고 하강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1 그는 그 시기 “민주주의 위기”, 곧 ‘포스트민주주의’(post-democracy) 시대로 진입하고 있었다면서, 그 주된 요인이자 근거로서 소수 엘리트와 다국적기업을 중심으로 정치 제도와 담론이 재편되는 현상을 꼽았다.

 

신자유주의 전성기에 출현한 ‘노사모’

 

크라우치는 당시, 곧 2000년대 초에 주요 국가들에서 민주주의가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으며 정치에 대한 시민의 감시가 어느 때보다 강력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가 민주주의 위기를 강하게 경고한 것은 시장 논리의 공공 영역 잠식과 ‘시민권의 상업화’가 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기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전성기이던 까닭에 거의 모든 공공 영역이 ‘민영화’라는 말로 대표되는 상품 논리로 재단되고 있었고, 실제 국가가 제공하던 서비스들 상당수가 기업에 넘어가서 가격을 치솟게 했다. 그 결과 이윤은 기업이 가져가는 대신 비용은 고스란히 시민 개개인이 떠안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에 한국에서는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출현해 새로운 참여민주주의 모델에 대한 기대를 한껏 드높이고 있었다. 노사모 돌풍을 타며 대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대기업과 중소기업 대표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 시장에서 비롯되고 있다.”2

크라우치의 표현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세계사적 절정기”였음에도, 정치는 ‘사회의 시장화’를 막지 못했고 불평등은 극단적으로 심화됐다. 아니, 오히려 그런 상황을 야기한 주체가 정당과 정치 엘리트였다고 해야 적확하다. 이를 막을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수단은 시민들의 “능동적”(active)인 정치 참여였다. 크라우치에 따르면, 능동적 시민은 다시 ‘적극적·능동적 시민’(positive active citizen)과 ‘소극적·능동적 시민’(negative active citizen)으로 나뉜다. 적극적·능동적 시민은 “집단과 조직을 구성해서 함께 집단적인 정체성을 발전시키고, 이해관계에 기초한 요구를 조직화된 형태로 표방하는 민중”이다. 반면 소극적·능동적 시민은 “민주주의에 대한 소극적 접근”을 전제한다. 그것은 정치를 “본질적으로 엘리트의 사무”로 보기 때문에 “엘리트가 잘못하면 비난하고 질책”하고, “불평과 불만을 활발하게 제기”하며, “정치가들을 경쟁시켜 그중 하나를 고르는” 행위 등을 시민의 주된 역할로 본다.3

 

이상적이되 희소한 ‘벌컨’

 

‘훌리건’, 팬덤 정치는 기본적으로 ‘능동적’인 정치 참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이 크라우치가 말한 의미에서 ‘적극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크라우치의 논의는 팬덤 정치를 직접 다루지 않기 때문에 명확히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포스트민주주의’라는 문제의식을 고려하면 크라우치가 말하는 ‘적극적·능동적 시민’이란 단순히 정치에 관심이 많고, 투표를 열심히 하고, 열정적으로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응원하는 시민에 그치지 않는다. 그 시민은 말 그대로 민주주의라는 정체(政體·polity)의 핵심인 ‘인민의 자기 지배’를 관철할 역량과 의지를 가진 이들이다.

그 역량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그것은 예컨대 압도적 경쟁력을 가진 글로벌 기업이 사회 전체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할 때, 다시 말해 특정한 자본 권력이 정부 권력이나 민주공화정 자체를 위협하는 힘을 가질 때, 정당과 정치인에게 대책을 요구하고 그들이 움직이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역량이다. 여의치 않으면 시민 스스로 직접 행동으로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나설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 적극적·능동적 시민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지식은 물론이고, 진영논리와 정치적 부족주의에 휩쓸리지 않는 냉철한 판단력, 의견이 다른 동료시민과 소통할 수 있는 소양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들은 특정 정치인을 “자식을 보살피는 부모의 관점에서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팬덤(최성호)”4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인다. 평소 응원하고 지지하던 정치인일지라도, 그가 민주주의나 평등과 같은 대의를 저버린다면 적극적·능동적 시민은 권력을 정면으로 비판할 뿐 아니라 나아가 그들에 맞서 격렬히 싸우는 투사가 된다.

하지만 과연 그런 시민들은 현실에서 얼마나 될까? 이들은 지난 글(제1582호 참조)에서 정치철학자 제이슨 브레넌이 비유한 ‘벌컨’처럼 희소할 것이다. 이러한 시민을 민주시민의 이상형으로 설정할 수 있겠으나 오늘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하는 동료시민의 ‘디폴트’(기본값)로 전제하는 건 비현실적이다. 그런데 ‘벌컨’처럼 완벽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 않더라도, 비록 편견을 가졌으며 충분한 정보가 없을지라도, 시민들끼리 깊이 토론하고 합의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준다면, 다시 말해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 절차를 잘 설계하고 실행하면 이상적 민주시민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숙의민주주의의 빛과 그늘

 

실제로 숙의민주주의는 정치 참여의 질을 제고하는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방안으로 많은 기대를 받아왔다. 한국에서는 2017년 신고리 원전 1·2호기 건설 중단·재개 여부와 관련된 시민참여형 공론 조사가 본격적인 숙의민주주의 사례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사례는 몇몇 한계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받았지만, 이후 많은 사회적 갈등 상황에서 추진된 숙의민주주의 실험이 모두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정치학자 탈리 멘델버그는 민주적 숙의에 관한 실증 연구를 포괄적으로 조사한 결과, 숙의민주주의가 특정 조건 아래에서만 이상적으로 작동하며, 숙의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이론가들이 기대하는 이익이 실현된다는 증거는 많지 않다고 말한다.5

예를 들어 대표성의 문제, 과도한 비용, 집단사고(groupthink) 및 극화(polarization)로 인해 기존 편견이 오히려 강화되는 현상, 토론이 아니라 지위를 추구하는 태도, 집단의 크기가 다를 때 갈등이 중재되기보다 악화하는 경향 등 숙의의 순기능 이상으로 역기능 또한 많다.

결정적 문제는, 현실에서 대부분의 숙의민주주의가 특정 의제에 대한 간헐적 이벤트로 시도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숙의민주주의는 일상의 정치적 실천들과는 동떨어진 특수하고 예외적인 사건으로 여겨지기 쉽다. 반면 팬덤 정치는 일상적이다. 게다가 숙의민주주의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정치인과 유권자 모두에게 강력한 정치적 효능감(political efficacy)을 발생시킨다. 정치적 효능감은 ‘개인의 행위가 정치 과정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느낌’이다.6 이를테면 내 행동으로 인해 정치인·관료 같은 정치 주체가 반응한다는 감각, 속된 말로는 ‘타격감’이다.

분명 정치적 효능감은 많은 사람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이다. 그러나 효능감은 주관적·양적 지표이기에 가치와 방향이 없다. 즉 비도덕적 행위, 심지어 범죄를 저질러도 강한 효능감을 느낄 수 있다.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느낌’과 ‘세상이 실제로 바뀌는 것’은 다른 것이며, ‘세상이 더 낫게 바뀌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효능감의 가치와 방향을 제시하는 일은 비판과 성찰, 무엇보다 경청이라는 ‘효능감 낮은’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런 과정이 무시되는 순간, 정치는 가치의 경합이 아닌 그저 정치 부족들 사이의 ‘도파민 게임’이 되고 만다. 정치적 효능감이 정치 행위의 최우선 지표이거나 유일한 지표가 될 수 없는 이유다. 숙의가 정치 문화로 자리 잡기 어려운 반면, 팬덤이 순식간에 주류 정치 문화가 된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 요점은 숙의민주주의가 쓸모없거나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다. 다만 숙의민주주의의 한계 내지 공백이 곧 팬덤 정치의 활성 조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매개 조직’ 약한 사회, ‘인물 정치’ 의존 사회

 

국민의힘 김기현 의원(왼쪽부터), 윤상현 의원, 한국사 강사 전한길 씨, 나경원 의원이 2025년 3월1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미래자유연대 국민대토론회에 참석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국민의힘 김기현 의원(왼쪽부터), 윤상현 의원, 한국사 강사 전한길 씨, 나경원 의원이 2025년 3월1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미래자유연대 국민대토론회에 참석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팬덤 정치가 갈수록 확산되는 또 다른 배경 요인으로 ‘매개 약화’(mediation weakening) 현상을 꼽을 수 있다. 매개 약화는 정당, 노동조합, 사회운동, 언론 등 개인과 권력 중심부를 연결하고 매개하는 조직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매개 조직은 모래알처럼 흩어진 개인에게 소속감과 정체성을 부여하고, 그들을 대변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매개 조직이 약한 사회에서는 특정 정치인에게 과도한 기대와 역사적 소명을 부여하기 쉽다. 역량과 매력을 갖춘 정치인은 유니콘처럼 희귀하다. 그렇기에 그런 사회에서는 전혀 다른 분야에 종사하던 유명인이나 인기 스타가 어느 날 갑자기 정치에 뛰어드는 경우가 자주 일어난다. 그러나 매개 조직이 튼튼하게 뿌리내린 사회에서는 젊은 시절부터 정치적 경험을 쌓으며 성장한 인물이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에 유명인·명망가 정치, 특정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인물 정치의 폐해를 상당히 완화할 수 있다.

또한 매개 조직들은 여론(public opinion)보다 ‘공론’(public judgement)7을 형성하는 구실을 한다. 여론은 날것의 의견들의 산술적 총합이며 그래서 미디어와 엘리트들의 정보 조작에 취약하다. 하지만 공론은 논리, 윤리, 전문적 지식이라는 ‘필터’를 통해 정제되고 숙고된 공적 의견이기에 쉽게 조작되지 않는다.(여기서 ‘공론’은 숙의민주주의 이론을 주도한 정치학자 제임스 피시킨의 개념이다.) 무엇보다 매개 조직들의 가장 큰 장점은, 이러한 공론 형성 기능이 일상에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어떤 사회에서 매개 조직들이 강하고 다양할수록 공론의 질은 높아진다. 그런 사회에서는 이성과 합리성이 사회적 평판을 높이는 내기물(stakes)로 작용하기 때문에, 이성적 토론이 점점 더 활발해지게 된다. 반면 매개가 약한 사회에서는 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훌리건’들이 담론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비판이나 성찰은 그것이 아무리 정당할지라도 “내부 총질”로 간주돼 축출된다. 이런 사회에서 사회적 평판을 높이는 내기물은 정치적 효능감과 주목(attention) 그 자체가 된다.

 

1. 콜린 크라우치, 이한 옮김, ‘포스트민주주의’. 미지북스. pp3~19, 2008

2. 김의겸, ‘“우리 사회 권력 시장으로 넘어간 듯”’, 한겨레, 2005년 5월17일

3. 콜린 크라우치, 같은 책, pp22~23

4. 최성호, ‘노무현의 죽음과 비판적 지지의 신화: 문빠에 대한 철학적 변론’, 오마이뉴스, 2017년 9월18일

5. Mendelberg, T., ‘The Deliberative Citizen: Theory and Evidence’, ‘Political decision making, deliberation and participation’ 6(1), pp151~193, 2002

6. Campbell, A., Gurin, G. & Miller, W. E., ‘The Voter Decides’, Row, Peterson and Co., p183, 1954

7. Fishkin, J., ‘Democracy and Deliberation’, Yale University Press, 1991

 

박권일 미디어사회학자

한겨레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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