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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성별, 선호의 이분법 너머

등록 2025-10-02 21:34 수정 2025-10-07 17:00
일러스트레이션 슬로우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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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아니라서 아쉽다는 예비 부모들을 종종 본다. 그때마다 좀 낯설다. 내가 1980년대생이라 그렇다. 특정 성별이 세상에 나올 확률이 급격히 줄어드는 바람에 급기야는 태아 성별 고지가 불법이 돼버린 그 80년대. 딸을 낳고 싶다는 부모들을 보면 ‘세상이 변하긴 변했구나’ 싶다. 그런데 K는 아들이면 좋겠다고 했다. 딸을 반기지 않는 이를 오랜만에 만났다. 이 또한 낯설다.

새삼스럽긴 해도 K가 무슨 마음인지 모를 수 없다. ‘세상 무서운지 모르고 여자애가’ 할 때의 그 여자애가 세상에 나온다. 여자로 태어난 이들은 여자로 사는 고단함을 안다. 내 자녀가 고단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니 성별이 달라야 한다.

그렇지만 이미 출산을 앞두고 있는데? 대화는 서툰 위로로 이어진다. “아들은 소용없다잖아. 엄마는 딸 없으면 안 된다더라.”

‘딸 없으면 안 돼’, 부모 중심의 언설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을 두고 출처를 떠올린다. 딸은 그래도 엄마를 데리고 어디를 가니까. 딸은 그래도 엄마 하소연을 들어주니까. 딸은 그래도 아플 때 죽이라도 사 들고 오니까. 우리 엄마에게서 듣던 말.

“그거 애한테 좋은 게 아니라, 부모한테 좋은 거잖아요.”

K의 말에 나는 잠자코 끄덕인다. 돌봄에 더 적합하다고 사회적으로 믿어지는 성별이 태어난다. 태어난 아이는 가족의 돌봄노동을 도맡아 하고 있는 특정 성별의 부모를 거들고 때로 어깨를 내준다. 그렇게 모녀 관계가 돈독하다는 아름다운 결말이면 좋으련만, K-딸들은 그런 결말과 쉽게 만나지 못한다.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의 저자 이소진이 언급했듯, 20대 여성들의 자살 생각 원인 중 하나는 ‘돌봄 위험’이다. 양육, 집안일, 병구완에 더해 감정 돌봄까지. 자신에게 몰려오는 역할의 압박이 여성들을 죽음으로 이끈다. 이 책에서 돌봄 위험을 다룬 장의 제목은 ‘가부장적 가족이 착취하는 딸의 시간’이다.

‘딸만 고단한가!’ 하겠지만, 그 반대편에 양상이 다른 죽음이 있다. 50~60대 남성의 고독사. 남성의 고독사 비율은 여성과 견줘 5배나 높다. 그리고 50~60대 남성이 전체 고독사 사망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연령대를 보여주는 지표이자, 성별로 파고들어 가면 이들을 고립되게 한 취약점을 알 수 있다. ‘관계 맺음과 일상 관리’의 미숙함. 어떤 성별은 돌봄에 대한 압박감으로 목숨을 끊는데, 어떤 성별은 자기 돌봄이 되지 않아 홀로 죽어간다. 딸과 아들. 이 둘 중 딱히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없다. 딸을 선호하는 아빠들이 생겼다고 해서 세상이 변할 순 없는 노릇이다.

“몰라요, 그 애가 말해주지 않아서”

암울하다. 그렇지만 아직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아니야. 성별은 정해지지 않았어.”

불현듯 떠올린 건 케이트 본스타인. 행위예술가이자 트랜스 페미니즘 운동가인 본스타인의 저서 ‘젠더 무법자’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아들이야, 딸이야?

“몰라요. 아직 그 애가 말해주지 않아서.”

그래, 아이의 성별은 정해지지 않았다. 그건 그 아이의 몫이다. 자신의 (지정) 성별을 받아들일지 다른 정체성을 찾을지는 그가 결정한다. ‘딸이라서/아들이라서’라는 말 앞에 그럴 여지는 남겨둬야 한다.

곧 다가올 명절. 딸 노릇을 해야 하는 딸들과 아들 노릇을 해야 하는 아들들과 딸 노릇을 해야 하는 아들들과 아들 노릇을 해야 하는 딸들, 자식 노릇이 뭔가 싶은 누군가의 자녀들, 누군가의 자녀일 수 없는 이들이 맞이해야 하는, 그 명절이 올해는 조금이나마 새삼스럽길 바란다.

 

희정 기록노동자·‘죽은 다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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