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아이가 아직 한글을 깨치기 전, 한동안 아이를 기만한 적 있다. 당시 아파트 상가 앞에는 500원을 넣으면 음악이 나오면서 움직이는 흔들말이 있었는데 “차지 마세요”라고 써 붙인 종이를 “고장 났어요”라고 속여 넘긴 것이다.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흔들말을 보며 아이는 번번이 애석해했지만 그도 잠시, 아이가 글을 읽으면서 더는 정보를 독점하거나 왜곡할 수 없게 됐다. 아이와 입씨름을 벌일 때마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사제들이 오랫동안 라틴어로만 성경을 보급했던 이유를 실감하곤 했다.
부모는 아이를 키우며 언어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다. 자고 일어나면 키가 크듯 하루하루 두꺼워지는 아이의 단어장을 보며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라는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에 동조하게 된다. 아이가 자라며 말을 배우고 글을 깨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지발달을 넘어 자신의 세계를 점차 확장하는 일이다. 언어를 통해 습득하는 지식의 총량이 늘어날 뿐 아니라 상호소통으로 나의 내면에 타인의 감정과 생각이 틈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맹 상태를 벗어나는 것은 단순히 계몽이나 교육의 성과에만 그치지 않고 개인이 세계에 들어설 자격을 부여하는 의례와 같다. 소설가 장정일의 말처럼 “활자는 나와 타인, 나와 사회, 나와 세계를 연결하는 가장 널찍한 길이고 창”이며 이 통로가 막히면 타인과의 소통이 두절된다.
그러나 같은 세계를 산다고 모두가 같은 언어를 쓰는 것은 아니다. 대니얼 마코비츠의 ‘엘리트 세습’에 따르면 부모의 소득과 지식수준에 따라 자녀가 배우는 언어의 질은 현저히 차이를 보인다. 전문직 부모의 세 살배기 아이는 비전문직 부모의 아이보다 2천만 개 더 많은 단어를 접하고, 49% 더 많은 단어를 안다. 한국이라고 상황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급 식재료의 명칭이나 외국 예술가 이름을 모르는 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일상에서 한 번도 듣거나 말하지 못하고 오로지 글로만 배운 어떤 단어들의 무의미함이다. 영국 노동계급 출신의 작가 대런 맥가비는 어린 시절, 슬럼가의 또래들 앞에서 ‘아름답다’는 말을 썼을 때 받았던 놀림을 생생히 기억한다.
모든 아이가 언어를 배울 때, 글이 아닌 말로도 풍부하고 다양한 단어를 접해보기를 바란다. 형용사의 용례를 직접 감각하고, 추상적인 낱말을 경험으로 이해하며, 유의어 간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해 가장 적합한 단어를 고를 수 있는 환경이 누구에게나 주어지길 바란다. 아이에게 최초의 화자이자 청자일 부모의 말은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개별 가정이 다 책임질 수 있는 문제만은 아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앙상하고 빈약한 세계를 물려받지 않도록 공적 영역의 말과 글은 더욱 섬세해야 한다. 공동체 안의 누구도 소외되거나 배제되지 않도록 가치중립적인 말이 장려돼야 한다. 본래의 의미를 왜곡하는 훼손된 말이나 차별의 언어들은 사회적 합의에 따라 사어가 돼야 할 것이다.
언어의 사회성이 더 적극적으로 발현돼야 할 때다. 지난 대선 후보 3차 티브이(TV)토론회에서 아주 몹쓸 말을 들었다. ‘말폭탄’으로 몰락을 자초한 것이야 자업자득이겠으나 이 세계에 가해진 폭격은 대체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혐오 시대의 문맹이란 바로 이런 모습일 것이다.
신성아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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