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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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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와 열정 사이, 양극을 지양하는 정치적 상상력

첫 장편영화 ‘해피엔드’ 연출한 소라 네오 감독의 플레이리스트
등록 2025-05-08 21:24 수정 2025-05-15 10:45
영화 ‘해피엔드’의 한 장면 갈무리.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해피엔드’의 한 장면 갈무리. 영화사 진진 제공


한 영화평론가는 “왜 한국에선 이런 영화가 안 나오는지” 통탄했고, 혹자는 “그저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라고 읊조리며 ‘젊은 거장’이라 불리는 일본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를 잇는 또 한 사람으로 ‘소라 네오’를 마음에 새겼다. 고전이 될 영화, 소라 네오의 첫 장편 극영화 ‘해피엔드’가 2025년 4월30일 마침내 한국에서 개봉했다. 가까운 미래 일본 도쿄를 배경으로 고교생 절친 5인방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청춘 영화의 성격을 띠면서도 소수자를 차별하고 시민을 억압하는 체제를 조명한다. 미국 뉴욕과 일본 도쿄를 거점으로 삼아 활동하는 영상작가, 번역가이자 세계적인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의 아들로도 알려진 소라 네오(34) 감독을 4월25일 서울 종로구 가회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소라 네오의 솔직함 , 그가 낸 용기 

정성은 어떻게 이렇게 섹시한 영화를 만들 수 있죠? 인권이라는 다소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소라 네오 (웃음) 출연자들이 워낙 섹시하잖아요.

성은 그게 다가 아닌데…! 대체 어떻게?

네오 음, 정말 저 자신에게 솔직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무언가를 만들 때는, 결국 자신의 감정이나 바라보는 현실에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영화도 제 감정 깊은 곳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됐습니다.

성은 픽션이라는 형식을 통해 어떻게 솔직함에 다가갈 수 있죠? 감독님이 가장 용기 내서 드러낸 게 뭔지 궁금합니다.

네오 사실 오랫동안 말로써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서툴렀어요. 에세이나 소설로 쓸 수도 있었겠지만 그걸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보니 어렵더라고요. 하지만 어떤 시기에 굉장히 생생한 감정이 솟아올랐어요. 그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고, 픽션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잘 전달할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나를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한 바로 그 지점이 가장 큰 용기가 아니었을까, 솔직한 나로 있겠다고 한 것이 가장 큰 용기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성은 자신을 직면하는 게 힘든 작업이셨을 텐데요.

네오 사실, 정말 제대로 직면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오히려 직면을 못해서 영화로 만든 걸 수도 있죠. 진짜 마주했더라면, 굳이 영화로 만들 필요가 없었을지도 몰라요.

“멋진 저항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성은 처음 대본을 쓰기 시작한 게 8년 전이라 들었어요. 그 당시 고민이 담긴 작품일 텐데 지금은 또 다른 고민이 있으실 테죠. 요즘의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네오 처음 ‘해피엔드’를 쓰기 시작했을 때, 저는 두 가지 극단적인 감정 사이를 오갔어요. 한쪽은 허무주의였고, 다른 한쪽은 무언가를 바꾸고자 하는 열정과 희망이었죠. 지금도 여전히 그 두 극단을 오가며 살고 있어요. 절망이 커지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변화도 없잖아요. 매일 뭔가를 시도하며 살아가려 애쓰고 있어요.

성은 어떤 방법을 시도 중이신가요?

네오 구체적으로는 거리로 나가 시위에 참여하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마음이 통하는 동료들을 만나 함께 행동 계획을 세우기도 합니다. 영화 편집이 한창이던 2023년 10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이 시작되며 팔레스타인 민간인 대량 학살이 시작됐어요. 그 일에 큰 충격을 받았고, 절망감이 밀려왔죠. 그래서 요즘은 ‘무조건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 벗어난 상태예요.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일을 찾고 있는 느낌입니다.

성은 두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첫째는 영화 속 대사를 빌려 물을게요. 시위하면 세상이 바뀌나요? 둘째는 팔레스타인과 관련된 이야기인데요, 한국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네오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는 일은, 예전에 일본이 조선에 저지른 일과 비슷합니다. 이스라엘의 식민주의, 점령, 인권침해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저항하고 있어요. 하지만 많은 나라, 일본이나 한국도 무심코 이스라엘 편을 들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군수산업, 무기 거래 같은 경제적 이유 때문이죠. 그러니까 우리와도 연결된 문제예요.

성은 한국에서는 정치적 입장을 뚜렷하게 밝히는 게 멋지지 않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있어요. 주변의 시선이나 평가도 달라지는데, 당신은 괜찮으신가요?

네오 지금 세계는, 멋지고 멋지지 않고를 따질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우리 아이들 세대에는 세상이 남아 있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들으면서 좀 놀랍네요. 저에게 한국은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정말 용감하게 싸워온 나라라는 인상이 있었거든요. 특히 과거의 민주화 운동이나 데모 문화, 심지어 데모하면서 (걸그룹) ‘소녀시대’ 노래를 부르는 그런 모습도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멋진 저항을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강력한 힘에 맞서는 힘은 시, 예술, 상상력

성은 감사합니다. 저는 이 영화가 결코 프로파간다(선전)는 아니지만, 매우 세련되고 급진적인 청춘 영화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게 정말 부럽기도 했고요. 한편으로는 더 급진적이고 선두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이런 세련된 표현을 하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현실의 무게를 더욱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감독님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고 느꼈는데요, 감독님은 본인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고, 본인의 역할을 어떻게 정의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네오 저도 이 영화가 프로파간다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 제 감정에 솔직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모든 게 사실 프로파간다이기도 하죠. 우리가 매일 보는 광고도 일종의 프로파간다잖아요. 저는 모든 종류의 프로파간다에 비판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예술로 뭘 할 수 있을까란 생각을 저도 많이 하는데, 사실 모르겠어요. 다만 영화감독이라는 직업과는 별개로 지금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거예요. 한 사람에게는 그 한 사람만큼의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걸 가지고 저는 움직이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영화감독이나 예술가의 역할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저는 역시 상상력이라고 생각해요. 이건 정말로 제가 팔레스타인 예술가들이나 시인들에게서 배우는 부분인데요. 그들이 지금 전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 이를테면 미국이나 이스라엘 같은 세력에 맞서 매일 저항하고 싸울 수 있는 이유는 예술과 시,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 덕분에 해방된 팔레스타인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성은 현실을 살아내느라 무기력에 잠식돼, 상상력을 잊고 지낸 것 같아요.

네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공습으로 사망한 팔레스타인 시인 리파아트 알라리르씨에게 들은 것입니다. 그가 가자지구의 아이들, 자신의 제자들에게 했던 말을 담은 유튜브 영상이 있어요. 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어요. “너희 중에 예루살렘에 가본 사람이 있니?”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은 매우 중요한 장소인데, 가자지구 사람들은 지금 이스라엘군에 포위돼 있어 갈 수 없잖아요. 아무도 가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마치 가본 적이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어요. 왜일까요? 그건 시를 통해 읽었기 때문이고, 할아버지나 할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로 그곳을 알기 때문이에요. 그만큼 시와 이야기, 예술, 상상력은 해방과 자유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그는 말했어요. 저는 그 말에 정말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소라 네오 감독과의 인터뷰 전체 내용이 궁금하신 분은 ‘언삼곤듀' 유튜브 채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궁금한 건 당신’ 저자

소라 네오 감독. 영화사 진진 제공

소라 네오 감독. 영화사 진진 제공


소라 네오(인스타그램 @nope_sooope)의 플레이리스트

①리파아트 알라리르의 시에 관한 강의
https://youtu.be/w7PR3FgdJDY

2023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 학살이 시작되었을 때, 저는 '해피엔드'를 편집하던 중이었고, 예술에 대한 희망을 잃었습니다. 그때 사랑받는 팔레스타인 시인이자 문예창작 교수였던 리파아트 알라리르가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2023년 12월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남긴 영상을 찾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했던 말들이 다시 이야기의 희망을 주었어요.(인터뷰에서 언급된 부분은 9:19∼12:40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이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됐습니다. 죽음을 이토록 선명하고 가슴 저리게 담아낸 이미지는 처음 본 것 같아요. 이 짧은 영상은, 어쩐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직관적인 방식으로 ‘살고 죽는다는 것’의 의미를 제게 알려줍니다.

 

③오스트레일리아의 야생 캥거루 길거리 싸움
https://youtu.be/rRddLDynsCs?si=b-Erv73eb3EXlfUA

가장 좋아하는 유튜브 영상 중 하나입니다. 인생 같달까요. 이 영상에 차이콥스키 음악을 배경으로 깔 생각을 한 사람은, 요즘 웬만한 영화감독보다 영화적 직관이 더 뛰어난 것 같아요.(하하)

 

④거울을 보며 학습하는 고릴라
https://youtu.be/SH62-ln03I4?si=SQEkGtXj7-qzPdES

한국 힙합 프로듀서인 디제이(DJ) 소울스케이프의 곡 ‘Love Is A Song’을 배경으로 틀어놓고 이 영상을 보시길 추천합니다.

 

*남플리, 남들의 플레이리스트: 김수진 컬처디렉터와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가 ‘지인’에게 유튜브 영상을 추천받아, 독자에게 다시 권하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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