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아스트로), 아이스크림(아이오아이), 돌고래(엔믹스), 정육면체(엔시티), 가운뎃손가락(에픽하이)…. 저마다 다른 모양과 색깔을 지닌 두 뼘 정도 길이 엘이디(LED) 조명이 달린 수천~수만 개의 막대봉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을 밝히고 있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케이팝(K-POP) 아이돌 응원봉을 든 모습이다. 영하의 겨울밤, 다양한 모습의 응원봉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외쳤다. “윤석열을 탄핵하라!”
12·3 내란 사태 이후 일어난 대규모 시민 집회 현장에서 촛불 대신 응원봉이 주인공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전에도 집회 때 간간이 보였던 응원봉은 2024년 12월4일부터 매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리고 있는, 내란죄 피의자인 대통령 윤석열 탄핵을 촉구하는 집회 때부터 규모가 수천 개 단위로 불어났다. 이후 주최 쪽 추산 100만 명(경찰 추산 10만 명)이 참여한 12월7일 국회 앞 집회에서는 수만 개의 응원봉이 하늘을 수놓으며 장관을 이뤘다. 집회 연단에서는 각기 들고 온 응원봉을 소개하는 시간도 있었다. 자신이 든 아이돌 응원봉이 소개될 때마다 시민들은 환호했다. 케이팝 음악에 맞춰 응원봉을 흔들었고, 케이팝 콘서트장처럼 바뀌었다. 케이팝 팬덤이 익숙한 10대부터 엠제트(MZ) 세대, 그중에서도 여성이 집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생긴 변화다.
집회 ‘플레이리스트’도 엠제트 세대가 든 응원봉에 걸맞게 바뀌고 있다. 12월7일 탄핵소추안이 국민의힘 의원들의 퇴장으로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하고 투표 불성립되자, 집회 현장은 일순간 얼어붙었다. 이 분위기를 살려낸 것은 로제의 ‘아파트’ 등 케이팝 음악이었다.
이날 집회에서는 최신 아이돌 음악 에스파의 ‘위플래시’(Whiplash)부터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빅뱅의 ‘삐딱하게’ 등 중년 세대도 가사를 알 법한 케이팝 음악이 나오면 곧 ‘떼창’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기존 민중가요들이 어우러져 세대를 아우르는 광경을 보였다. 12월14일 대규모 탄핵 집회를 앞두고는 아예 온라인으로 ‘플레이리스트’를 신청받고 있다. 12월9일 집회에서 만난 이수현(22)씨는 “기성세대가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여겼던 2030 젊은이가 집회에 많이 나온 것을 보고 케이팝 음악이 주가 되도록 배려해주신 느낌이고, 그래서 연대감이 든다”고 했다.
응원봉은 특히 엠제트 세대 여성들을 집회 현장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이나래(33)씨는 12월6일과 7일 밤새워 국회의사당 앞을 지켰고, 그 이후로도 시간 날 때마다 집회에서 “윤석열 탄핵”을 외치며 응원봉을 흔들었다. 그는 “계엄령 터진 날 실시간으로 인터넷을 봤다. 계엄 다음날 집회에 나가기가 무서웠는데, 응원봉을 들면 안정되지 않을까 해서 가지고 나왔다. 색색깔 응원봉을 들고 온 사람을 보고 안심됐다”며 “응원봉을 흔들고 케이팝 노래를 트는 문화로 사람들이 시위를 유쾌하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즐겁게 유쾌한 시위를 해서 ‘너도 나와볼 만해. 그렇게 어려운 거 아니야’라고 허들을 낮추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2030 여성의 집회 참여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서울시와 케이티(KT)는 공공빅데이터와 통신데이터로 시간대별로 인구 데이터를 집계한다. 데이터를 보면, 12월7일 집회로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린 오후 5시 현재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의 생활인구는 37만3천명으로 집계됐다. 윤석열 퇴진 촉구 집회로 인해 생활인구는 직전 주보다 27만7500명 증가했다. 이 시각 외에 집회에 참여했던 이들도 있으므로, 집회 참여자 수는 이 숫자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생활인구를 성별과 연령대별로 구분해보면, 20대 여성이 가장 많았다. 25~29살 여성이 3만2100명, 20~24살 여성이 3만1200명이이나 됐다. 그다음으로 많은 집단은 50대 남성과 30대 여성(4만500명)이었다.
영하의 날씨에 새벽까지 이어진 집회. 아이돌 ‘덕질’을 경험한 청년들에게는 오히려 ‘단련된’ 일이었다. “아이돌 그룹 온앤오프 팬이에요. 아이돌이 음악방송을 하려면 사전녹화를 하는데, 밤이나 새벽에 밖에서 대기해야 해서 이런 일에 단련된 거죠. (그때 경험으로) 또 우비를 챙겼어요. 비가 안 오더라도, 담요보다 우비를 덮고 있으면 가볍고 좋거든요. 뜨거운 물을 보온병 넣어서 챙겼고 핫팩도 가져왔어요.”(이나래씨)
‘응원봉’ 집회에서는 연대의 마음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선결제’로 전달되기도 한다. 주로 케이팝 문화의 소통 창구인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해서다. “제가 국회 앞 카페에 커피와 디저트를 100만원어치를 선결제해뒀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누군가 소셜미디어 계정에 올리면 시민들이 이를 이용하는 형태다.
응원봉의 응원 당사자였던 케이팝 스타들도 응원봉 집회를 지지했다. 걸그룹 아이즈원 출신 가수 이채연은 12월7일 팬들과의 소통 플랫폼에서 윤 대통령 탄핵 촉구 촛불집회와 관련해 “정치 얘기할 위치가 아니라고? 정치 얘기할 수 있는 위치는 어떤 위치인데?”라며 “우리 더 나은 세상에서 살자. 그런 세상에서 맘껏 사랑하자”고 했다. 가수 정세운은 팬카페에 12월8일 “행봉(응원봉) 들고 흔드는 손이 언제 어디서든 얼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글을 남기며 기프티콘과 핫팩을 선물하기도 했다.
물론 ‘응원봉 시위’에는 유쾌함만 있는 건 아니다. 이들은 응원봉 시위를 즐기면서도 엄중하고 강하게 내란 사태를 규탄한다. 전국 각지의 집회 현장에서도 ‘케이팝·응원봉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탄핵 표결을 거부한 국민의힘 ‘표밭’, 영남권 집회에서 ‘딸들’이 화제를 모았다. 특히 12월7일 열린 부산 시내의 집회 연단에 오른 여고생 연설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18년 동안 부산에 살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 이 여고생은 “막 걸음마를 뗀 사촌 동생들과 남동생이 먼 훗날 역사책에 쓰인 이 순간을 배우며 자신에게 물었을 때 부끄럽지 않게 ‘당당하게 그 자리에 나가 말했다’고 알려주기 위해 나오게 됐다”며 “현 정권을 보고 5개월 전 학교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배웠던 저와 제 친구들은 분노했다. (…) 대통령이 고3보다 삼권분립을 모르면 어떡하냐”라고 외쳤다. 그가 “국민의힘 의원들은 당의 배신자가 되는 것이 아닌 국민의 배신자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고 목소리 높이자, 모여든 시민의 박수갈채가 나왔다.
대구·경북에서는 “티케이(TK·대구경북) 콘크리트, 티케이 딸이 부순다”라는 챌린지가 등장했다. 대구여성의전화 ‘2030페미니스트’ 모임의 한 회원이 직접 쓴 대자보는 “우리는 보수의 텃밭이 아니다”라며 “티케이의 콘크리트는 티케이의 딸들에 의해 부서질 것이다. 몇 년이 걸려도 반드시 부서질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현장에는 10대 여성도 2030 여성 못지않은 수로 참여했다. 대입 수능을 마치고 국회 앞 집회에 왔다는 전지안(18·가명)씨는 12월9일 “‘계엄보다는 입시가 중요하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집회에 가면 다치지 않느냐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무게감을 가지고 생각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빨리 대통령 탄핵으로 가는 게 맞는다”고 말했다.
응원봉, 케이팝, ‘딸들’의 외침. 바뀌는 집회 양상을 두고 문화 연구자 안희제 작가(‘망설이는 사랑’ 저자)는 정치판에서는 ‘팬덤정치’라고 부정적으로 얘기되던 팬덤이 오히려 광장의 변화를 끌어내고 있다는 데 주목했다. 그는 “젊은 여성들이 응원봉을 들고나왔다는 것은 세대교체 이상의 의미가 있다”며 “특히 ‘빠순이’라는 말로 멸시당하던 아이돌 여성 팬들에 대한 특정 이미지로부터 광장 내부의 혁명이 시작됐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응원봉이 ‘꺼지지 않는 촛불’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응원봉을 선택한 건 단순 아티스트를 응원하기 위한 물건이 아니라 꺼지지 않는 불빛으로써 든 거잖아요. (…) 착각하면 안 돼요. 우린 그곳에 팬으로서 간 게 아닙니다.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참석한 거예요.”(엑스 @plavelove717)
10대부터 30대 여성들이 광장에 나온 것은 일상화된 여성혐오에 맞서기 위해서이고, 이 여성혐오를 조장해온 것이 윤석열 정부라는 점과도 맞닿는다. 윤석열 정부는 출발부터가 ‘여성가족부 폐지’가 공약이었을 정도로 여성 인권을 후퇴시켰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복길 칼럼니스트는 “윤석열 대통령이 탄생하는 과정을 저희가(여성들이) 봐왔다. 그런 부분이 확실히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했다.
‘여성혐오’를 조장하는 대통령이 일으킨 내란 사태는, 일상화된 여성혐오에 싸워온 2030 여성을 또다시 광장으로 불러모았다. “K팝의 주 향유자인 2030 여성은, 사회 정의에 대한 가장 선명한 감수성과 분노를 가진 계층입니다. 페미니즘 리부트(온라인 공간에서 촉발된 페미니즘 대중화 흐름) 이후 강남역 살인사건, 불법촬영과 딥페이크 등 신종 성범죄, 교제 살인 등 끝없이 발생하는 남성 지배적 가부장제 사회의 폐단에 전력으로 맞서 싸워왔어요. 성소수자 인권, 환경, 동물권 등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점에 대해 치열하게 생각하고, 공부하고, 논의를 발전시켜온 당사자인 거죠. 이들이 사회 정의가 크게 위협받은 이때 광장으로 나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봐요.”(최이삭 케이팝 칼럼니스트·활동가)
8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집회 때에도 여성의 참여도는 높았지만, 그때와 달라진 분위기를 느낀다는 의견도 있다. 케이팝과 응원봉은 당시에도 현장에 일부 있었다. 2016년 탄핵 집회를 두고 김진태 의원이 “촛불은 바람 불면 꺼지기 쉽다”고 발언한 것이 파문을 일으키며, 엘이디 촛불이 유행할 때 응원봉도 집회 현장에 나왔다. 하지만 지금처럼 집회의 상징이 되지는 않았다. 안희제 작가는 “8년 전 촛불집회에 대해서는 여성 참여자 성추행 등 문제가 있었다”며 “현재 많은 여성이 응원봉을 들고나온다는 것은 (집회가) ‘콘서트’나 ‘팬미팅’처럼 계속하고 싶은 행동이라는 걸 말한다. 사람들이 집회라는 공간에 다시 오고 싶고 편안하고 안전한 공간으로 만들어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했다.
최이삭 칼럼니스트는 “여의도에서 응원봉을 든 2030 여성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집회의 손님”이 아니라고 말한다. “2016년 탄핵 집회 초기 박근혜 전 대통령은 ‘저잣거리 아낙네' ‘강남 아줌마' 등 대통령의 책무와는 아무 상관 없는 여성혐오적 조롱을 받는 일이 잦았어요. 여기에 이삼십 대 여성은 탄핵의 맥락과 여성혐오를 분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여성혐오적 가사가 있는 디제이디오시의 ‘수취인분명' 공연에 반대도 했습니다. 이 목소리가 학생과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들이 차별받지 않는 집회, 한층 민주적인 집회를 만드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때 나섰던 여성들이, 그 목소리가 지금까지 이어지는 거죠.”
실제로 국회 앞 집회 현장에서는 여성뿐 아니라 성소수자·장애인 등 소수자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나온다. 12월9일 집회 현장에서 한 청년 성소수자는 시민 발언대에 올라 “윤 정부의 안티페미니즘 성소수자 혐오가 인권을 산산이 조각냈다”며 “저는 법적 여성으로 성별 정정도 받고 싶은데, ‘계엄 독재’ 때문에 제 꿈을 접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라고 외쳤다. 시민들은 ‘맞습니다’라고 지지했다.
매일 밤 이어지는 집회에서 응원봉은 여러 플랫폼으로 퍼져나가며 연대의 발을 넓힌다. 12월11일 당근마켓에서는 ‘집회 참석에 한해 엔시티 응원봉을 무료로 대여합니다’라는 글도 찾아볼 수 있다. 조도가 높고 정육면체 모양이어서 ‘탄핵’ 문구를 삽입하기 좋은 이 응원봉을 찾는 이가 많아서다. 12월9일 집회에 참여한 전수빈(22)씨도 “우리가 다른 아이돌을 좋아하지만, 원하는 것은 같다고 생각한다”며 “응원봉이 유대감을 만들어준다”고 했다.
응원봉을 비롯한 아이돌 응원도구는 원래는 과거에는 팬들을 가르는 요소였는데, 이번 집회 현장에서는 되레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며 연대하는 도구가 됐다. 이 점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의미가 크다. “과거 1세대 아이돌 때 아이돌 응원도구는 풍선 색깔로 싸우고, 서로를 배격하는 용도로 쓰이던 적도 있었어요. (…) 요즘의 팬들은 민감하게 선을 그어요. ‘기획사에서 비윤리적인 콘텐츠가 나온다’ ‘아이돌이 비윤리적인 짓을 했다’ ‘아이돌이 회사로 인해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들을 경계하죠. 그러면서 그 아이돌을 응원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응원봉을 흔들며) ‘내가 (저 아이돌을) 좋아하는 나의 마음을 응원하는구나’라는 인식이 있는 것 같아요.” 2018년부터 케이팝 디제잉 파티인 ‘슬픔의 케이팝 파티’를 기획하고, 이후 이 파티를 집회 현장(2022년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산업노조 파리바게뜨지회 임종린 지회장의 단식투쟁 현장)에서도 열었던 복길 칼럼니스트의 말이다.
12월14일 밤 탄핵안 재표결을 앞두고 열릴 국회 앞 집회에서도 ‘나를 응원하는 나의 마음’들은 꺼지지 않고, 수만 개가 켜질 예정이다.
박준용 기자 juney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