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회사 사장의 억울함과 직장인의 서러움, 여성의 차별감과 예술가의 모욕감, 팬덤의 분노. 민희진이 이 모든 정서에 대해 충분한 논거를 제시했다곤 할 수 없다. 팩트와 증거보다는 감정과 해석으로 그것들을 제시한 편인데, 그럼에도 이토록 해상도 높게 공감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대중에게 그런 경험이 너무나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말과 글은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가. 사람을 설득하는 글을 쓰고 말하는 입장에서 어떤 높은 벽에 부딪힐 때마다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답은 언제나 회의적이다. 이른바 ‘중립 기어를 박은’ 사람들에겐 말이라도 걸어볼 수 있겠지만, 이미 입장을 결정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겐 그들을 설득하려는 모든 말이 의심의 대상이 된다. 오늘날의 세계를 지배하는 주된 정서는 불신과 의심이기 때문이다.
민희진 어도어 대표의 기자회견은 그 불신과 의심을 이겨낸 대표적 사례로 역사책에 등재될 만하다. 기자회견의 관행을 철저히 무시한 그의 퍼포먼스는 사람들의 마음을 드라마틱하게 흔들었고, 민희진은 불과 2시간 사이에 적어도 대중의 여론에서만큼은 말 그대로 ‘개같이 부활’했다. 흔한 일이 아니므로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짐작해보는 건 나름대로 유의미한 일일 듯하다.
사람들은 왜 마음을 바꾸기로 했을까. 민희진의 무엇이 사람들 마음을 바꿔냈을까. 기자회견 직전까지 민희진은 방어해야 하는 입장으로 내몰려 있었다. 하이브가 먼저 민희진을 쳤다. ‘경영권 탈취’라는 강렬한 단어를 전면에 내걸고 어도어에 대한 감사를 실시할 것이라고 언론에 발표했다. ‘하이브 자본으로 뉴진스를 대성공시킨 민희진이, 뉴진스를 독점하기 위한 모종의 음모를 꾸미다 적발됐다’는 스토리라인은 적어도 케이(K)팝에 익숙한 대중에게는 발생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은 충격적인 사건을 곧장 떠올리게 했다. 2023년 6월부터 시작된 걸그룹 피프티 피프티의 전속계약 분쟁이 그것이다. 이미 같은 종류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하이브는 많은 얘기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사태의 심각성을 부각할 수 있었다.
여론전에서 ‘선빵 필승’은 하나의 법칙이다. 먼저 불신의 대상으로 지목된 사람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투입해야 한다. 해명이 늦어질수록 불신은 더 쌓인다. 언론은 의혹에 의혹을 붙이는 식으로 사건을 키운다. 이번 사건에서도 하이브의 발표부터 민희진 기자회견까지 사흘 동안 민희진을 향한 의혹을 확정해줄 온갖 보도가 쏟아졌다. 과거 민희진의 인터뷰에서 논란이 될 만한 발언들을 재조명하거나 익명 기반 커뮤니티 ‘블라인드’ 등에 올라온 민희진에 대한 내부자의 비판적 언급이 수면 위로 올랐다. 탈취 정황이 담겼다는 문건을 공개하고 어도어 경영진끼리 나눈 채팅 기록도 폭로했다.
이런 상태에서 기자회견이 예고됐다. 기자회견을 기다리는 대중은 이미 기자회견을 ‘해명의 장’이 아닌 ‘변명의 장’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유튜브 실시간 채팅창에는 시작도 하기 전에 민희진을 향한 조롱이 가득했다. 캐주얼한 복장에 메이크업하지 않은 맨얼굴의 민희진이 기자회견장에 나타나자 이번에는 ‘선즙필승’을 예측하는 채팅이 쏟아졌다. 냉소적인 대중은 이런 상황에서 열리는 기자회견은 딱 두 종류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대한 정중하게 차려입고 나와 준비된 입장문을 읊는 기자회견과 최대한 추레하게 입고 나와 준비된 눈물을 흘리는 기자회견. 민희진의 기자회견은 후자일 것이라고, 여론은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단정 지은 셈이다.
그렇게 시작된 기자회견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준비된 입장문도 눈물도 아니었다. 극도로 직설적인 ‘토크쇼’였다. 단순히 경영권 탈취 의혹에 관해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뉴진스를 만들기까지의 여정을 쭉 읊었다. 에스엠(SM)을 나오게 된 이유와 하이브에 들어온 맥락, 뉴진스의 기획 과정과 데뷔 이후 지금까지 이야기들이 사적 대화와 공적 발화 사이를 거침없이 오가며 풀려나왔다. 그 과정에서 온갖 비속어가 튀어나오기도 했다. 이야기가 30분째를 넘어가던 즈음부터 그는 더 이상 해명하고 방어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이브와 경영진의 잘못을 폭로하고 사과를 요구하는 공격자 입장에 섰다. 민희진을 향해 쉴 새 없이 손가락질하던 시청자들이 자세를 고쳐 앉기 시작한 순간이다.
민희진의 기자회견이 이토록 드라마틱한 결과를 만들어낸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물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그가 갖는 독특한 위치성과 그에 따른 말하기 전략의 유효성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요컨대 실무자·기획자 정체성이 뚜렷한 여성 경영자의 다수파 전략이다.
잘 알려진바, 그는 SM에 공채로 입사해 등기이사 자리까지 오른 전설적인 인물이다. 고속 승진을 가능케 한 것은 물론 그의 타고난 기획력과 실무력이었다. SM을 퇴사하고 하이브에 영입됐을 때도 브랜딩 실무의 총괄자로 역할을 부여받았다. 어도어 대표로 취임해 명실상부한 최고경영자가 된 뒤에도 그는 뉴진스라는 그룹의 직접적인 산파로서 최전선에 섰다. 그에겐 여전히 실무자이자 기획자로서의 정체성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기자회견에서도 그는 이러한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냈다. 그 자신도 한 기업의 최고경영자지만, 마치 방시혁 하이브 이사회 의장과 박지원 하이브 대표의 과도한 통제와 간섭에 고통받는 일개 직장인처럼 자신을 위치시켰다. 출신부터 경영자인 사람이나 아티스트 출신의 임원들과 달리 민희진만이 갖는 위치성이다. 하이브는 경영자 대 경영자로 프레임을 잡고 공격을 가했지만, 민희진은 그 위치성을 적극 활용해 경영자 대 피고용자 문제로 프레임을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오직 수익 창출에만 혈안인 장사꾼·경영자 방시혁과 박지원이 오로지 뉴진스를 완성하는 데만 관심을 두는 장인·예술가·실무자 민희진을 찍어내는 음모를 꾸몄다’는 대체 스토리라인이 이렇게 완성됐다.
민희진이 부각한 위치성과 그에 근거해 개연성을 획득한 스토리라인은 하이브가 짠 스토리라인보다 더 많은 대중의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하이브의 스토리라인이 이끌어내는 공감자층은 수익을 중시하는 경영자와 자회사를 관리하는 모기업 경영진 정도다. 반면 민희진의 스토리라인은 하청업체(또는 자회사) 사장, 직장인, 여성, 예술가들의 공감대를 일으킨다. 또 뉴진스에 대한 팬심을 아낌없이 드러낸 대목, 아이돌 양산, 랜덤 포토카드, 팬사인회를 빌미로 한 과도한 앨범 판매 유도 행위 같은 ‘하이브의 상술’을 비판한 대목은 그를 아이돌 팬덤의 대변자처럼 느껴지게 했다. 이번 이슈의 코어 관여층인 아이돌 팬덤의 공감대까지 이끌어낸 것이다.
자회사 사장의 억울함과 직장인의 서러움, 여성의 차별감과 예술가의 모욕감, 팬덤의 분노. 민희진이 이 모든 정서에 대해 충분한 논거를 제시했다곤 할 수 없다. 팩트와 증거보다는 감정과 해석으로 그것들을 제시한 편인데, 그럼에도 이토록 해상도 높게 공감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대중에게 그런 경험이 너무나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상황인지 많은 얘길 듣지 않아도 곧장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대중처럼 입고, 대중처럼 말하며, 대중처럼 욕한 민희진이 여론전에서 하이브를 압도했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의 문제는 잠시 접어두고, ‘기자회견이 민희진과의 술자리처럼 느껴졌다’는 어느 댓글은 그의 모습이 얼마나 우리 일상과 닮아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에 반해 하이브와 방시혁·박지원의 대응은 어땠나. 그들은 스스로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았다. 비싼 변호사가 작성했을 것이 확실한 정제된 보도자료를 통해 대응했다. 기자회견 직후 하이브는 민희진의 발언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입장문을 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특유의 굴절된 해석 기제로 왜곡된 사실관계를 공적인 장소에서 발표했다.” ‘개야비한 개저씨들’이라는 직설적인 말이 ‘특유의 굴절된 해석 기제’라는 고상한 글을 제압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다. 물론 여론과 법적 판단은 다른 문제이니 마지막에 승리하는 것은 ‘정제된 방식’으로 싸운 하이브가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민희진의 기자회견은 ‘타인의 마음을 흔드는 말하기’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지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우선 민희진과 같은 입지전적 경력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그의 위치쯤은 올라가야 이런 화제성도 갖게 되는 것이다. 앞서 썼듯 대중이 그의 실력을 이미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능력주의의 생존자인 민희진은 그 자체로 설득력의 전제 조건을 충족하지만, 그렇지 못한 다수는 전제 조건에서 탈락이다. 방시혁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도 고려해야 할 요소다. 속이 시원했고 효과도 확실했음에도 공적 장소에서 이런 식의 말하기가 일반화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할 수도 없다.
민희진이 내세운 위치성에 대해서도 복합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그는 모기업 경영자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을’처럼 말했지만, 사건이 있기 전부터 블라인드 등에는 그가 부당한 지시를 일삼는 상사임을 암시하는 글들이 SM·하이브 직원 명의로 올라와 있었다. 그는 탁월한 능력으로 산업을 선도하는 기획자이지만, 산업의 협업성과 상호 의존성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는 외골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직장인의 설움을 자극했지만, 그가 평범한 직장인과는 차원이 다른 고연봉자이며 어쨌거나 경영인이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한계들에도 민희진의 역전극에서 배울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내고 곱씹는 일은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강조했듯 대중이 말로써 마음을 바꾼 것은 너무나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진영 대결과 갈등의 말하기만이 유효한 것처럼 보이는 사회에서 ‘타인의 마음을 흔드는 말하기’가 마침내 성공했다. 그 실낱같은 가능성을 어떻게든 부여잡고 싶은 마음이 절실해 이런 글을 쓴다.
강남규 <지금은 없는 시민> 저자·‘토론의 즐거움’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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