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부인과 의사는 ‘신’이었다. 결혼 뒤 6년을 노력해도 생기지 않던 아이가, 그 의사를 만나자 순식간에 생겼다. 1997년 시험관시술로 태어난 아들에 이어 딸도 의사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아들의 유전자가 친부와 일치하지 않음을 알게 됐다. ‘의사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게 부부의 주장이다. 아들이 다섯 살 되던 해, 부모에게서 나올 수 없는 혈액형을 아들이 지녔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 마음에 의사를 찾아간 부부. 하지만 의사는 영어로 된 서류를 보여주며 “시험관시술을 하면 종종 혈액형 돌연변이가 생긴다”고 부부를 안심시켰다.
성인이 된 아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려고 증빙서를 요청하자 그때부터 의사는 연락이 두절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전자 검사를 하니 불일치가 떴다. 그로부터 2년 넘게 부부는 ‘의사랑 연락이 안 된다’ ‘자연임신 가능성도 있지 않냐’며 무책임하게 대응하는 대학병원 쪽과 싸우고 있다.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 가족을 만났다.
“솔직히 우리 딸은 덮어두자고 했어요. 엄마, 아빠, 나 셋만 알고 끝내자고. 오빠에게 말하지 말자고. 그런데 애 엄마하고 제가 그게 안 되는 거예요. 그렇게 신뢰하고 의지했던 의사가 이렇게… 속였다는 게…. 이건 혈액형이 같으면 그냥 지나가는 사건이에요. 지금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같이 겉으로 얘기하지 않고 그냥 살고있는 분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제일 힘든 건 이걸 어디 가서 말할 수 없다는 거예요. 사실을 얘기하는 것만으로 명예훼손이 된다는 게 갑갑할 노릇이죠.”
딸에게 물었다. 왜 이 사건을 덮고 가고 싶었는지. “물론 잘못한 건 벌을 받아야죠. 하지만 의사를 상대로, 그것도 대학병원을 상대로 소송한다는 건 힘들고 긴 싸움이 될 텐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 의사가 나쁜 사람이었다는 것만 알게 될 텐데, 그걸 과연 우리 가족이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가 가족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데….”
딸은 스스로 큰 피해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많은 피해를 겪고 있다. 혼자 집에 못 있을 정도로 공황장애가 심해진 엄마를 위해 1년 휴학했고, ‘내가 그 병원에 가서 죽어야 이 일이 해결될까’ 생각하며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아빠의 상처를 지켜봐야 했다. 서울대를 나와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은 오빠에 대해 묻자, 동생은 갑자기 눈물을 쏟았다.
“한때 오빠를 미워했어요. 성인이 되고 나가 살면서 너무 엄마한테 전화도 안 하고 그러니까. ‘나만 엄마 딸이냐, 오빠도 전화 좀 자주 해라. 엄마는 전화 한 통으로도 행복해한다.’ 그러자 이번 설 연휴에 오빠가 꽃다발을 사 왔어요. 엄마 힘내라고. 가장 힘든 건 오빠일 텐데…, 제가 그렇게 말했던 게 미안해요.”
유전자 불일치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오빠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머릿속으론 계산하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말을 해야 엄마가 상처받지 않을지에 대해서. 이들의 상처를 누가 치유해줄 수 있을까. 긴 싸움이 끝나면 그들이 원하는 진실을 얻을 수 있을까. 결말이 어찌 됐든 가족들은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궁금한 건 당신> 저자
❶ 진실탐사그룹 셜록 취재영상(아빠 추천)
https://youtu.be/j4agpA-iUOM?si=YpYR5sbuI5rWpaOm
저희 일을 많은 분이 취재해주셨지만, <진실탐사그룹 셜록>의 박상규 기자님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진상 규명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시는 모습 정말 감사했습니다. 힘든 일을 겪으면서 한껏 예민해져 있던 우리 가족에게 큰 위로가 돼주셨어요. 박 기자님 취재 영상에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❷ 시험관 브이로그(엄마 추천)
https://youtu.be/8n2ug1A9ZQE?feature=shared
시험관시술 후기라든지, 난임 부부의 심정을 많이 찾아봤습니다. 그분들의 영상과 글을 읽으니 25년도 더 지난 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새록새록 떠오르더라고요.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비관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오히려 정말 꿈만 같았던 그때 그 심정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간절히 아이를 기다리는 모든 난임 부부에게 반드시 축복이 찾아오기를 응원합니다.
❸ 윈터-항해(딸 추천)
https://youtu.be/Z4dxNF7NfWk?feature=shared
어쩌면 저는 이 사건의 당사자는 아니지만, 가족의 상처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에게도 상당히 힘든 일이더라고요. 길어지는 싸움에 지쳐가던 찰나, 저에게 이 노래가 잠시나마 등대가 돼줬습니다.
*남플리, 남들의 플레이리스트: 김수진 컬처디렉터와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가 ‘지인’에게 유튜브 영상을 추천받아, 독자에게 다시 권하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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