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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로 편의점 문턱 낮췄으나…“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

2023년 장애인 인권 디딤돌 판결, 주목할 판결 요약
등록 2023-11-04 15:19 수정 2023-11-09 23:00
장애여성자립생활센터 ‘파란’ 회원이 2017년 12월5일 오후 서울 양천구 한 편의점 턱을 넘지 못해 휠체어를 탄 채로 매장 밖에서 직원을 부르고 있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장애여성자립생활센터 ‘파란’ 회원이 2017년 12월5일 오후 서울 양천구 한 편의점 턱을 넘지 못해 휠체어를 탄 채로 매장 밖에서 직원을 부르고 있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현실의 여러 벽 앞에 부딪힌 장애인은 고민 끝에 법을 통한 권리구제에 나서지만, 또다시 좌절을 경험할 때가 많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인권센터는 법원 판결들을 모니터링해, 장애인의 실질적 권리구제가 얼마큼 진보하고 후퇴하는지, 우리 사회에 어떤 과제를 남기는지 파악한다. 장애인 인권 디딤돌·걸림돌 판결 선정위원회는 2023년 장애인 인권 ‘걸림돌 판결’ ‘디딤돌 판결’ ‘주목할 판결’을 선정했다. “한 편의 판결문은 그저 종이 몇 장이지만 그 속에는 한 사람의 삶이 있으며, 흩어져 있는 판결들을 따라가다보면 장애인 인권의 현주소가 보인다.”(노태호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소장)
*아래는 줄인 내용으로, 자세한 사항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디딤돌 판결
91평 넘어야 경사로 설치 의무였다니… 휠체어·유아차도 편의점 이용할 수 있게
(서울중앙지방법원 2018가합524424)

장애인, 휠체어를 타는 노인, 유아차를 끄는 부모에겐 동네 편의점에 못 들어가는 일상이 익숙하다. 입구에 경사로가 없어서다. 실제로 법이 이를 방관해왔다. 지에스(GS)리테일 쪽은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보면 ‘바닥 면적 300㎡(약 91평) 미만의 공중이용시설은 일률적으로 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면제한다’는 내용을 근거로 경사로 설치 의무가 없다고 주장해왔다.

장애인·영유아 부모들은 2018년 4월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91평이 넘는 편의점은 거의 없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시설에 편의시설 설치 의무가 면제돼 장애인 접근권을 심각하게 제한’한다고 봤다. 또 ‘GS리테일의 직영 편의점 66곳 가운데 편의시설이 설치된 50곳을 제외한 나머지 편의점 중 2009년 4월11일 이후 신축·증축된 편의점에 대해 1년 이내 접근로, 출입구 확보 등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표경민 법무법인 디라이트 변호사는 “기존 법령을 위헌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편의시설 설치 의무가 있는 편의점 범위를 대폭 확대 해석했다는 점에서 매우 전향적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강송욱 법무법인 디라이트 변호사는 “300㎡에서 50㎡로 시행령을 다시 만들었지만, 국외 어느 나라에도 면적을 기준으로 하는 곳은 없다. 폐지되는 게 옳다”며 “수차례 인권침해로 지적됐으나 개선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하다 쓰러진 공무원 가족에게 받은 휴직급여 토해내란 국가, 헌재가 제동
(헌법재판소 2020헌가8)

20년 넘게 검찰공무원이었던 ㅁ씨는 근무 중 저산소성 뇌손상으로 쓰러졌다. 아내와 자녀는 당장 병원비와 생활비 부담이 생겼다. 보통 쓰러진 공무원이 그렇게 하듯, 2년간 휴직을 내고 휴직급여를 받기로 했다. ㅁ씨 상황이 좋지 않자 가족과 직장 사이에 ‘명예퇴직’ 논의가 오갔다. 문제는 은행에 가면서 발생했다. 아내는 남편이 직접 금융거래를 할 수 없는 상태라, 장애인의 자기결정권 존중을 위해 도입된 ‘성년후견제도’를 통해 남편을 대리해 금융거래하려 했다. 그런데 성년후견개시가 되자마자 검찰총장은 ㅁ씨를 당연퇴직 처리했다. 휴직급여, 공무원 단체보험료 등도 환수한다고 했다. 국가공무원법상 당연퇴직 사유 중 하나로 ‘피성년후견인’(성년후견개시의 심판을 받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은 이를 몰랐고, 설명해준 사람도 없었다.

헌법재판소는 제동을 걸었다. 성년후견이 개시되지 않은, 동일한 정신적 장애가 발생한 국가공무원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사익 제한이 과도’하며, ‘정신적 제약을 극복해 후견이 종료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임한결 변호사는 “무성의하게 도입된 피성년후견인에 대한 권리 박탈적 입법에 대해 위헌을 선언했다”고 평가했다.

‘잠정 적용’ 말 꼬투리로 헌재 판결 외면한 구청
(광주지방법원 2021구합13704/2021구합13698)

뇌병변장애로 왼쪽이 마비된 ㅂ씨는 뇌혈관성 질환 등 노인성 질병이 있었다. 65살 미만이지만 노인성 질병을 가진 그는, 노인장기요양보험법상 `노인 등'에 해당한다. 그는 노인장기요양보험법에 따라 주 5일, 하루 3시간의 방문요양을 받았다. 하지만 장애인을 위한 활동지원서비스는 하루 최대 16시간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2021년 6월 사회복지서비스 변경 신청을 했다. 헌법재판소가 2020년 12월 ‘65세 미만의 노인성 질병을 가진 장애인의 경우, 활동지원서비스 신청 자격을 제한하는 현행법’에 대해 ‘평등원칙에 위배된다’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기에, 바꿀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광주 서구청은 이를 거부했다. 헌재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2022년 12월31일 시한으로 입법자의 개선입법이 있을 때까지 잠정적용’을 명했기 때문이다. 이에 해당 거부처분에 대한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광주 서구청의 처분이 ‘적용 중지된 법률에 근거한 위법’으로 취소돼야 한다고 봤다. 김윤진 재단법인 동천 변호사는 “장기요양급여와 활동지원급여는 큰 차이가 있다”며 “행정청은 헌법불합치 결정 취지나 장애인권 보장을 고려하지 않고, 형식적·기계적 논리에 따른 처분 하자를 지적했다”고 평가했다.

주목할 판결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 장애인 위한 판결문 쓴 판사
(서울행정법원 2021구합89381)

서울행정법원 제11부(재판장 강우찬)는 사상 최초로 장애인을 위한 ‘쉬운 판결문’을 썼다. 청각장애인 ㅅ씨가 강동구청장을 상대로 장애인 일자리사업 불합격처분 취소를 청구했는데, ㅅ씨가 판결문을 알기 쉬운 용어로 써달라고 요청하자 쉬운 말로 정리한 것이다. 예를 들어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는 식으로 괄호 안에 쉬운 말을 썼다. 이례적으로 삽화도 삽입해 이해를 도왔다. 김형수 총장은 “장애인 당사자가 비록 패소하긴 했으나 장애인의 정보 접근과 사법 접근 향상을 위해 재판부가 특별히 노력한 것을 충분히 높이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다만 ㅅ씨가 ‘수어통역 시간이 필요한데 동일한 면접 시간을 배분받은 것은 차별’, ‘중증장애인은 한 명도 합격하지 못한바, 처음부터 중증 청각장애인을 채용하지 않을 의도로 차별한 것은 위법하다’고 주장한 것과 관련해, 재판부는 ‘수어통역 등을 거쳐야 하는 청각장애인임을 감안하더라도 각자에게 주어진 면접 20분이라는 시간이 부족하지 않아서 위법한 차별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김형수 총장은 “그동안 장애인 선발에서의 통계와 수어통역 지원이 충분했는지 살피지 않은 점은 아쉽다”고 평가했다.

알코올중독·정신질환자 강제입원 트라우마… 병원 입장 기계적 판결?
(서울남부지방법원 2020가단8924)

정신병원이 환자를 강제로 데려가는 과정에서 환자가 다친다면, 병원에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조현병과 알코올중독이 있는 ㅇ씨의 동생들은 2018년 2월 주취 상태인 ㅇ씨를 D병원에 입원시키기 위해, 병원 인력과 차량을 요청했다. 문제는 직원 2명이 ㅇ씨를 강제로 데려가면서 발생했다. 단독주택 3층에서 2층쯤 내려왔을 때 발버둥치던 ㅇ씨가 미끄러졌는데, 난간을 통해 1층 도로로 추락했다. 양쪽 발꿈치뼈 골절상을 입었고, 발목관절운동 저하로 후유장애가 남았다. 이에 ㅇ씨는 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했다. 법원은 ‘입원에 동의한 ㅇ씨를 부축해 구급차량으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신체를 완전히 결박하지 아니해 돌출행동을 막지 못했다고 하여 업무상 과실을 인정할 수 없다’고 봤다.

제철웅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알코올중독·우울증 등 환자를 돌보는 가족이 힘들어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강제입원 과정이 이들(환자)에겐 정서적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며 “이미 수차례 강제 장기입원 경험이 있는 ㅇ씨가 정신병원 입원을 거부할 것임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데 계단을 내려오는 것은 매우 비전문가적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제 교수는 “선진국은 중독환자 또는 정신질환자의 트라우마 정보를 이해한 상태에서 접근하는 것이 직업윤리로 확산되는 것과 비교할 때, 우리나라 전문가는 이들을 기계적으로 대한다는 것이 판결에서 드러난다”고 말했다.

일할 때 손 전혀 쓸 수 없는 장애인의 삶을 헤아리다
(대전지방법원 2020구단102022)

ㅈ씨는 2015년 4월17일 교통사고를 당했다. 손을 아예 못 쓰게 됐다. 국민연금공단에 장애연금을 청구해야 했다. 문제는 장애인 당사자의 삶과 ‘판정’ 사이의 괴리에 있었다. 의학적 분석으로 장애를 판단하는 국민연금공단은 네 손가락을 모두 못 쓰게 된 것은 인정했지만, 엄지손가락은 그렇지 않다고 보고 장애등급을 4급 9호로 결정했다. ㅈ씨는 엄지손가락 운동 가능 범위도 정상 범위의 50%에 미달한다며 3급 8호에 해당한다며 결정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ㅈ씨의 실질적 움직임을 들여다보고 청구를 인용했다. ‘엄지손가락 그 자체로는 수동 및 능동 운동에 의해 구부림이 가능’했지만 ‘엄지손가락을 구부리려고 할 때 두 번째 손가락과 맞닿게 돼 제3자가 개입해 젖히지 않으면 구부리는 것이 구조적·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강송욱 법무법인 디라이트 변호사는 “장애 판정과 관련해 제도적 기준이 정한 범위 내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획일적이고 의료적인 판단 기준인 고시에서 벗어나 장애를 평가하는, 장애인권 신장에 기여하는 의미를 갖는 판결”로 봤다.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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