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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시설을 노인보호센터로 바꾸면서 ‘탈시설’이라고?

주목할 만한 판결_노인주간보호 시설로 바꾸려는 사업자에 제동 건 판결 ‘일방적인 장애인 거주시설 폐지는 탈시설이 아니다’(수원지방법원 2021구합75208)
등록 2023-11-03 18:07 수정 2023-11-09 00:02

현실의 여러 벽 앞에 부딪힌 장애인은 고민 끝에 법을 통한 권리구제에 나서지만, 또다시 좌절을 경험할 때가 많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인권센터는 법원 판결들을 모니터링해, 장애인의 실질적 권리구제가 얼마만큼 진보하고 후퇴하는지, 우리 사회에 어떤 과제를 남기는지 파악한다. 장애인권 디딤돌·걸림돌 판결 선정위원회는 아래 판결을 포함해 장애인 인권 ‘걸림돌 판결’ 6개, ‘디딤돌 판결’ 4개, ‘주목할 판결’ 4개를 선정했다. “한 편의 판결문은 그저 종이 몇 장이지만 그 속에는 한 사람의 삶이 있으며, 흩어져 있는 판결들을 따라가다보면 장애인 인권의 현주소가 보인다.”(노태호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소장)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살고 있는 발달장애인들이 1일 국회 앞에서 탈시설과 지원의 필요성에 대해 주장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살고 있는 발달장애인들이 1일 국회 앞에서 탈시설과 지원의 필요성에 대해 주장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여러 장애인 정책 가운데 ‘중증장애인의 탈시설 및 지역사회 자립’은 선뜻 의견을 내기 어려운 사안이다. 탈시설을 꿈꾸는 장애인과 그것을 반대하는 지인의 의견 차이, 지역 복지 서비스 주체와 시설 운영 주체의 이익 갈등, 권리와 재정의 적절한 균형이 요구되는 상황에서의 이념 갈등이 혼재됐기 때문이다.

탈시설, 지역사회 자립을 둘러싼 충돌

오랜 시간 우리 사회는 효율성의 논리 아래 중증장애시민을 통제하려 집단 거주시설 중심의 서비스 전달 체계를 고수하고, 중증장애인 돌봄 정책 예산을 거주시설 설치와 유지에 집중 편성했다. 그러나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을 비롯해 유럽, 미국, 오세아니아 등의 여러 선진국가에서는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포용 중심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장애를 가진 시민의 존엄과 권리를 염두에 둔다면 더는 집단 수용 통제를 고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설과 지역사회로 나누는 이원화 정책이 서비스 전달에 단절적이며 큰 비용을 유발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세계적 흐름에 따라 정부는 2020년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 로드맵’을 발표하고, 중증장애인 대상 서비스의 현장을 폐쇄·격리·단절·제약의 한계를 지닌 수용시설이 아닌 일상 공간으로 단계적으로 이전할 계획을 밝혔다.

그러나 탈시설과 지역사회 자립지원 과정을 둘러싸고 여러 우려가 제기된다. 수용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조치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자칫 주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방식으로 이행되는 게 아닐지 하는 우려는 탈시설과 자립생활에 관한 여러 왜곡을 낳는 실정이다. 모두가 안전하고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자유를 보장받는 탈시설 정책의 이행은 이 오해를 해소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최근 참고할 만한 사법부의 판결이 나와 이를 소개하려 한다. 비록 본 판결은 그 자체로 장애인의 탈시설 및 지역사회 자립 권리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아 한계가 명확하지만, 장애인 탈시설과 자립생활의 권리를 다방면에서 숙고하는 하나의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탈시설은 ‘사업자의 시설 폐지’ ‘가족의 돌봄 부담’ 아냐

장애인 거주시설을 운영하는 사업자가 재정상의 이유로 시설을 폐지하고 노인주간보호로 신규 사업을 계획하며 탈시설을 주장했다면 그것은 탈시설일까 아닐까.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사연은 이렇다.

사회복지법인 A는 운영 중인 장애인 거주시설 폐지를 자진신고하며 세 가지 이유를 주장했다. 첫째, 장애인 탈시설 정책에 대한 동의. 둘째, 재정 한계로 1인당 최소 생활공간 마련의 어려움. 셋째, 노인주간보호센터로의 사업모델 변경. A는 비록 탈시설 정책에 동의한다고 밝혔으나, 사실상 재정·손익과 관련한 경제적 판단으로 시설 폐지를 추구한 듯하다. 신고를 담당하는 관할 지방자치단체는 네 차례 걸쳐 A에 입소자에게 충분하고 현실적인 안내·동의·계획 등을 공유할 것을 요구했으나, 끝내 그것이 불충분하다고 보아 신고를 반려했다. 이에 소송이 제기됐다. A는 지자체의 반려 처분이 과도하고, 요구 사안이 과하다고 주장했다. 재판부 또한 A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현 시설에 거주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한, 일방적인 시설 폐지는 이뤄질 수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A가 주장하는 시설 폐지를 적법한 탈시설로 보지 않았다. 비록 A가 정부 탈시설 정책에 동참하려 시설을 폐지한다고 주장했을지언정, 그것은 탈시설이 아니다. 탈시설은 중증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존엄과 권리를 누리도록 하는 목적에서 이해돼야지, 사업 재정상 어려움 혹은 사업모델 전환을 위한 수단으로 주장될 수 없다.

또한 재판부는 일방적 시설 폐지가 가족의 돌봄 부담으로 이어지는 것을 우려했다. 중증장애인의 주거·돌봄·참여 등을 지원하는 장애인 탈시설 정책은 가족의 돌봄 부담을 전제하지 않고, 국가의 적극적 의무와 책임에서 비롯해야 한다. 탈시설은 ‘탈가족돌봄’, 즉 지역사회 내 공적 지원 체계의 마련을 의미한다.

일방적인 시설 폐지를 탈시설로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본 판결은 동시에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재판부가 시설 퇴소 과정에서 ‘장애인 당사자의 의견’이 아닌 ‘보호자의 동의’만을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점이다. 거주시설 입소 장애인 중 상당수가 원치 않게 입소했고, 단지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약 없는 평생을 한 공간에 머물러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따라서 시설 퇴소 뒤 대안을 추구하는 과정은 삶의 무게를 오롯이 감당하는 당사자의 입장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사법부는 중증장애인의 입장이 아닌 ‘보호자’ 입장만을 염려한다. 보호자일지언정 타인의 결정 아래 평생 수용되는 운명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결정이다.

국가의 적극적 책임 묻지 않은 한계

둘째, 재판부는 ‘행정부의 탈시설 지원의 의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시설 퇴소 뒤 주거 대안을 마련하는 문제를 모두 운영자의 책임으로 봤다. 탈시설과 지역사회 자립은 공적 돌봄 체계 마련, 공공임대주택 확보, 의사결정 지원제도의 보완 등 국가가 적극적인 의무를 실천함으로써 수행될 수 있다. 그러나 법원은 거주시설 폐지 뒤 주거 대안을 마련하는 모든 절차를 사실상 사업자의 책임만으로 떠넘기고 말았다. 주권자의 존엄과 행복을 위한 헌법상 권리가 실현될 수 있도록, 국가가 적극 지원하고 협조할 의무를 다해야 함을 망각하면 안 된다.

본 판결은 장애인 탈시설이 사업의 언어가 아닌 권리의 언어라는 점을 일깨우는 데 함의가 있다. 비단 사업 변경을 이유로 사업자가 일방적으로 시설 폐지를 결정하는 것은 탈시설이라 볼 수 없고, 시설 퇴소 뒤 지역사회 이전 계획을 체계적으로 성립해야 한다는 과제를 엿볼 수 있는 판결이다. 그러나 일방적인 보호자 중심주의 문제와 더불어 대안 마련에 국가의 적극적인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판결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 이에, 장애인권 디딤돌·걸림돌 판결 선정위원회는 사회에 득이 되는 ‘디딤돌’ 혹은 사회에 해가 되는 ‘걸림돌’ 판결이 아닌, ‘주목할 만한 판결’로 결정했다.

변재원 작가·소수자정책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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