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실행에 오정희 소설가가 관련 있다는 것도 몰랐고, 김건희 여사가 행사장에 오는 줄도 몰랐고, 행사장에서 질질 끌려나간 사람이 송경동 시인인 줄도 몰랐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출판인들이 입 모아 말했다. 2023년 6월14일 한국 최대의 책 문화 축제인 서울국제도서전이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막을 연 첫날 오전부터 ‘3단 충격’이 현장을 강타했다. 행사장은 뒤숭숭하기 짝이 없었다. 도서전은 코로나19 이후 규모가 축소됐다가 2022년 국내외 195개 출판사와 출판단체가 참여해 기지개를 켰고, 2023년에는 국내외 530여 개사가 참석해 준비 단계부터 기대감을 끌어올렸다. 출판사 부스 신청이 조기 마감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신청이 늦었거나 비용 때문에 참가하지 못한 작은 규모의 출판사들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이상기류가 감지됐다. 도서전을 주최한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 쪽에서 예정된 행사 개막 기자간담회를 취소했고, 홍보대사로 위촉된 김애란·김인숙·오정희·천선란·최은영·편해영 소설가가 등장하는 포스터 사용도 자제해달라고 요청해왔다. 마침내 쉬쉬하던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6월14일 오전 10시, 코엑스 동문 앞에서 문화예술인들의 항의가 시작됐다.
문화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문화예술스포츠위원회, 블랙리스트이후(준), 한국작가회의, 우리만화연대 등 단체 소속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박근혜 정부 때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실행에 앞장섰던 오정희 소설가가 출판계 최대 축제인 도서전에서 ‘얼굴’인 홍보대사로 선정됐다”며 기자회견을 열고 문화체육관광부와 출협에 공개사과와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저주토끼> 정보라 작가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실행하는 데 일조한 사람들이 떳떳하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활동하는 것은 커다란 문제이기에 회원들의 의견을 공식적으로 묻고 항의하는 기자회견에 나왔다”고 말했다.
2017년부터 2018년까지 활동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위원장 도종환·신학철)가 작성한 백서를 보면, 당시 문인을 지원하는 ‘2015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사업’ 등에서 박근혜 정부가 ‘블랙리스트 문인’을 지원에서 배제하려고 집요하게 개입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사업은 문체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위)가 운영하는 문학창작지원사업으로, 작가 1인당 1000만원씩을 지원한다. 제도개선위는 예술위 위원으로 위원장 직무대행을 맡았던 오 작가가 블랙리스트의 작동 여부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블랙리스트 실행에 협조한 것으로 봤다. 오 작가는 앞서 2018년에도 국립한국문학관 설립추진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됐지만 블랙리스트 관여 문제로 문화예술계의 반발에 부닥쳐 자진 사퇴한 바 있다. 오 작가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중국인 거리> <유년의 뜰> <바람의 넋> 등을 쓴 한국 문학계의 원로다.
사달이 벌어지자 출협은 “서울국제도서전의 홍보대사가 선정 발표된 뒤 단체들의 문제제기가 있어 홍보물 완전 폐기의 어려움을 밝혔고 향후 오 작가의 추가적 노출을 자제하기로 했으며 도서전 마지막 날로 예정된 홍보대사들의 토크쇼에서도 오 작가의 참가를 취소했다”고 밝혔다. 오 작가의 ‘노출’을 막는 선에서 문제를 봉합하려 한 것이다.
설상가상 주인이 돼야 할 문화예술인들이 현장에서 끌려나가는 사태도 벌어졌다.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축사하려 참석한 개막식장에 한국작가회의 소속 송경동 시인 등의 입장이 대통령경호실 직원들에 의해 제지당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예술인이 다치고 송 시인은 강제로 연행돼 끌려나갔다. 개막식장엔 책 담당 기자들조차 출입이 금지됐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도 목격담과 작가들의 항의글이 올라왔다.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인 이랑 작가는 “북토크 프로그램에 불참하기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서정민갑 음악평론가는 “오정희는 늘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었지만 이제 오정희의 작품을 예전처럼 읽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고 썼다. 영화감독이자 시인인 유진목 작가도 “오정희 소설가는 지난 스스로의 결정을 반성하고 현재의 행보에 사과해야 한다”며 개막식에서 벌어진 폭력적 행위에 유감을 표한다고 게시물을 올렸다.
이날 개막식에 참석한 김 여사는 “문화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 미래의 인공지능 환경이 결코 책을 대체할 수 없는 이유”라는 취지의 축사를 했다. 김 여사는 퀴어 페미니즘 출판사 ‘움직씨’ 부스에 들러 유명 브로드웨이 뮤지컬 <펀 홈>의 원작자이자 레즈비언 퀴어 작가 앨리슨 벡델의 <초인적 힘의 비밀>을 구매했고 다른 부스에서도 여러 권의 책을 샀다.
서울국제도서전은 6월18일까지 코엑스에서 ‘비인간, 인간을 넘어 인간으로’라는 주제로 열린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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