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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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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야 힘든 일이라는 지독한 편견

‘남성 육체노동자’를 표준으로 산재 판정하니 여성의 신체노동과 정신적 고통은 외면당해
등록 2023-02-24 14:29 수정 2023-03-01 04:25
특성화고 실습생의 산재사망을 다룬 영화 <다음 소희> 중 한 장면. 영화사 제공

특성화고 실습생의 산재사망을 다룬 영화 <다음 소희> 중 한 장면. 영화사 제공

프랑스 교육과정에 ‘시민교육’이란 과목이 있다. 일터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노동권을 배운다. 하지만 한국 교육과정에선 노동자 권리와 관련한 내용은 충분히 다뤄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청년들은 노동 관련 지식이 부족한 상태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청년노동자는 일터에서 자신에게 내려지는 지시가 업무 경력을 쌓기 위한 과정인지, 아니면 육체적·정신적 노동 착취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취약한 상태에 놓이기 쉽다.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하고, 비정규직 등 불안정한 고용형태가 넘쳐나며, 위험한 업무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외주화하는 노동환경은 이런 청년노동자의 상황을 더욱 악화한다. 생계비와 일자리 지키기가 우선이 될 수밖에 없다. 건강권은 후순위로 밀려난다. 한국에서 청년노동자로 일한다는 건 결국 자기 건강을 빠른 속도로 잃는 과정이기도 하다.

여자가 하는 일은 위험하지 않다?

물론 한국에도 노동자의 건강권과 관련한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존재한다. 산업안전보건법, 산업재해보상보험법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법과 제도의 보호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있다. 배달앱 라이더 같은 ‘플랫폼 노동자’는 제도 안에 포괄되지 않는 새로운 고용형태여서, 프리랜서 등의 노동자는 산업재해 정보가 부족하거나 노동시장에서 취약한 지위 탓에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는 등 ‘산재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인다.

‘청년여성 노동자’는 이러한 사각지대에 속한 이들이다. 노동건강연대는 아름다운재단과 함께 2019년부터 ‘산재보험 사각지대 해소사업’을 통해 일하다 다치고 아프게 됐지만 산재보험을 이용하기 어려운 노동자를 찾아 긴급생계비를 지원해왔다. 이 과정에서 직종·연령·성비에 다양성이 반영되길 바랐지만 좀처럼 청년여성 노동자의 이야기는 찾기 어려웠다. 노동조합, 노동자 지원 단체, 기관, 언론 등을 통해 사업을 알렸는데 청년여성 노동자는 개별적으로 흩어진 경우가 많아 참여를 이끌어내고 대상자로 선정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흔히 산재 하면 사고로 숨지거나 건설·제조업 분야 등에서 일하는 ‘남성노동자의 업무’ 같은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는 점, 여성의 업무는 ‘위험하지 않을 것’이란 사회적 편견 등도 여성노동자의 산재 문제를 가리는 데 영향을 미친다. 기존 제도나 정책은 남성이 많이 종사하는 건설·제조업 등의 산업에 집중됐고, 정부가 내놓는 산재 통계조차 성별과 관련해서는 사고와 질병을 단순 비교하는 데 그친다. 여성노동자의 산재 실태는 남성과 어떻게 다른지, 이들의 건강권을 해치는 요인이 무엇인지 종합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여성노동자의 산재나 직업병과 관련해 그나마 다뤄지는 관심 분야는 대부분 임신·출산 등 재생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최근 청년여성의 정신건강에 대한 우려가 많이 나왔지만 이들이 왜 우울한지, 어떤 조건에서 일하고, 신체적·정신적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결하는지는 논의되지 않는다. 노동건강연대가 ‘청년여성 산재회복 지원사업’을 통해 2030 청년여성 노동자를 찾아나서고, 그들이 처한 노동환경이나 지나온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이유기도 하다.

젊은 여성노동자가 마음의 병 얻는 이유

이번 사업으로 만난 청년여성 노동자는 아프지만 제대로 된 보상도, 치료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근골격계, 정신질환 등 다양한 질병이 있지만 실제 산재보상을 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자신의 질병이 산재가 되는지 몰랐거나, 혼자 준비하기 쉽지 않은 행정 절차, 산재 인정 여부가 불명확한 상황에서 시간과 비용을 쏟기 어려운 현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하다 다치거나 아파도, 이들은 자비로 치료하거나 치료를 미루거나 그냥 ‘참고 일하는’ 걸 택했다.

확실한 것은 일터에서 산재를 신청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번 사업으로 만난 청년여성 노동자는 노동법의 사각지대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는 5명 미만 소규모 카페, 편의점, 피시(PC)방, 네일숍, 요가학원 등에서 일하며 불이익을 받는 것이 대표적이다. 월 60시간 미만 노동자는 고용·산재 보험에 가입하지 않아도 되는 조항, 주 15시간 미만 노동자는 퇴직금을 주지 않아도 되는 조항을 이용해, 해당 시간보다 짧은 초단시간 근로계약을 하거나 3.3% 소득세를 떼는 프리랜서 계약을 하는 사례도 많았다.

한 청년여성 노동자가 치과병원에서 청소하고 있다. 그는 햄버거 매장에서 밤샘노동을 하다 산업재해를 입었다. 김진수 선임기자

한 청년여성 노동자가 치과병원에서 청소하고 있다. 그는 햄버거 매장에서 밤샘노동을 하다 산업재해를 입었다. 김진수 선임기자

5명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이들도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근로계약서 작성, 임금명세서 교부, 최저임금 준수 등의 권리가 있지만 사업주는 이를 잘 지키지 않는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사업주가 무는 과태료는 50만~200만원에 불과하다. 최저임금을 위반한 사업주에 대한 처벌은 3년 이하 징역이나 2천만원 이하 벌금형이 가능하지만, 최저임금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노동자가 사업주를 고발하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현행 산재 인정 기준이 대부분 ‘남성 육체노동자의 노동’을 기준으로 삼아 청년여성 노동자는 산재 인정에 어려움을 겪는다. 예를 들어 건설업이나 광업처럼 안전모를 쓰고 추락과 절단 등의 사고를 의식적으로 조심해야 하는 작업이어야만 ‘작업장 곳곳에 위험이 도사린다'고 표현된다. 오랫동안 여성의 일은 남성의 일보다 사회·경제 발전에 도움이 덜 된다고 여겨지다보니 일터에서 여성이 겪는 문제는 사회적으로 공론화하는 일이 드물었다. 여성노동자는 성역할 고정관념을 기반으로 한 ‘감정노동’까지 추가로 요구받는 일이 많지만 이에 대한 논의도 좀처럼 나아가지 않는다. 게다가 정신질환의 경우 성희롱이나 직장 내 괴롭힘 등으로 생기는 일이 많은데 이를 입증하기조차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 때문에 여성이 더 높은 확률로 겪는 근골격계 질환, 직장 내 성희롱과 폭력, 직무 스트레스, 가정폭력, 성희롱과 성폭력, 비뇨·생식기계 질환, 여성만이 겪는 임신과 출산, 폐경 등은 건강이나 안전규제, 위험관리 등에 관한 연구에서 배제돼왔다.

10㎏ 물건을 하루 25회 이상 들어야 산재 인정

실제로 2020년 경기도 산업재해자 2만765명 가운데 남성은 2만1666명(78.4%), 여성은 5969명(21.6%)으로 남성노동자가 압도적으로 많다.(‘여성노동자 산업재해 현황과 시사점 이슈 분석’, 경기도여성가족재단) 고용노동부 통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21년 ‘업무상 질병 요양’ 판정을 받은 사람은 2만435명인데 남성이 1만6827명으로 여성(3608명)보다 약 4.6배 많다. 같은 해 경제활동인구가 남성 1569만여 명, 여성 1198만여 명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불과 1.3배 많은 점을 고려하면, 실제 산재 승인을 받은 남녀 노동자 수 차이는 지나치게 크지 않은가.

이렇듯 산재 승인율에 차이가 나는 건, 단순히 ‘여성이 위험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언뜻 ‘성 중립적으로 보이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나 산업안전보건법 규정에 맹점이 있다. 예를 들어 산업안전보건법에서 ‘근골격계 부담 작업’은 ‘하루에 25회 이상 10㎏ 이상의 물체를 무릎 아래에서 들거나 어깨 위에서 들거나 팔을 뻗은 상태에서 드는 작업’이라고 정한다. 하지만 완력이나 근력 면에서 남성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여성노동자는 10㎏보다 덜 무거운 물체를 뒤틀린 자세로 들거나 옮기는 걸 반복할 때 충분히 신체에 무리가 올 수 있는데도 현행법에 따르면 산재로 인정받지 못한다.

청년여성 노동자는 이처럼 취약한 노동환경과 여성의 특징이 반영되지 않은 산재 승인 기준 등으로 겹겹의 장벽에 둘러싸인 채 일한다. 이들의 건강권을 보호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먼저 실질적인 산재 회복을 위한 적절한 지원이 필요하다. ‘청년여성 산재회복 지원사업’으로 100만원의 생계비 지원을 받은 이들은 중단했던 치료를 받거나, 조금이라도 노동시간을 줄이려 하거나, 건강을 돌볼 조금의 여유가 생겼다고 말한다. 이렇듯 적절한 지원은 노동자가 겪는 경제적 어려움을 덜어줄 뿐만 아니라, 운동·노동 시간 변화 등 회복을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노동자가 아픈 이유는 노동 그 자체 때문

‘이것도 산재가 될 수 있다’는 인식 개선 교육도 필요하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 전부터 노동권·건강권 관련 교육 등을 통해 ‘노동자가 아픈 이유는 일터에서의 노동 때문’이란 인식이 우선돼야 한다. 또 인력·예산의 한계가 있다는 이유를 들며 노동자 건강권을 보호하지 않는 조직이나 사회적 인식이 바뀌어야만 ‘아파도 참는’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성인지 관점을 반영한 산재 정책과 제도를 마련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여성의 신체적 특성을 반영한 산재 승인 기준 개정 △산재 인정 범위 확대 △성별 분리 통계 마련 등이 필요하다. 특히 정신 건강과 관련한 문제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연구해 그 실태를 확인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안현경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공인노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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