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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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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인생을 즐겨” 네 말대로 살 수 있을까

[미안해, 기억할게] 이태원 희생자 이야기 ⑮김도은
‘워커홀릭’ 엄마가 ‘야물딱진’ 딸에게 건네지 못해 가슴에 맺힌 말들
“딸을 잃었는지 내 인생을 잃었는지 모르겠어요”
등록 2023-01-17 04:51 수정 2023-01-24 09:07
일러스트레이션 권민지

일러스트레이션 권민지

엄마 이미영(58)씨는 스물여덟 도은이 자신의 마지막을 지켜줄 아이라고 여겼다. 야무진 딸이었다. 짜장면이 먹고 싶다고 하면 “기다려봐. 내가 후기 다 보고 시켜줄게”라고 말했다. 발이 아프다고 하면 야근 중에도 병원을 알아본 뒤 “예약했고 돈 다 냈으니까 그냥 가면 된다”고 했다. 도은은 엄마 건강을 염려해 필라테스 학원 1년치 수강료를 끊어놓고는 운동할 때 입을 여름·가을 옷까지 따로 사줬다.

아빠 김정근(61)씨와는 더욱 각별했다. “너는 아빠를 더 좋아하잖아”라고 하면 “맞아, 난 아빠를 더 좋아해”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아빠의 지난 생일엔 ‘정근아 하고 싶은 거 다 해’ ‘딸이 최고지’라고 쓰인 장난감과 지폐가 줄줄이 나오는 ‘용돈 박스’를 선물했다. 도은은 아빠와 둘이 9박10일 유럽 여행을 가기도 했다. 서른이 되기 전에 엄마까지 셋이서 한 번 더 유럽 여행을 가기로 약속했다.

김도은씨 생일에 병원 동료들이 써준 롤링페이퍼와 추억이 담긴 사진들. 유가족 제공

김도은씨 생일에 병원 동료들이 써준 롤링페이퍼와 추억이 담긴 사진들. 유가족 제공

“이거 필요해? 이거 안 필요해?” 해줬을 텐데

엄마와 아빠는 도은을 먼저 보낼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뭘 하고 싶어도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아 헤매는 엄마 대신 도은은 ‘손발’이 돼줬다. 그랬기에 2022년 10월29일은, 엄마의 세계가 무너진 날이다. 엄마는 얼마 전 생활용품을 사러 갔다가 나이 든 모녀가 서로를 챙기는 모습을 보곤 울며 가게를 나왔다. “우리 딸이 항상 그랬는데, 내가 늙으면 ‘엄마 이거 필요해? 저건 안 필요해?’ 했을 텐데. 억장이 무너지더라고요. 도은이 내 마지막을 지켜줄 줄 알았는데, 내가 도은이 마지막을 볼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어.”

도은이는 “야물딱지고 흐트러짐이 없는 아이”였다. 사주를 보러 가면 “(딸은) 알아서 잘 사니 방 청소만 해줘도 된다”고 했다. 고등학교 땐 반장을 했고 대학을 다닐 땐 장학금을 받았다. 간호사로 병원에 다닐 땐 남들보다 30분 일찍 도착해 주변을 정리했다. 그러면서도 운동할 시간이 없다며 자전거로 출퇴근을 대신했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뜰했다. 부산에서 다닌 첫 직장을 퇴사하고 서울에 간 건 2022년 3월이었다. 서울의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8개월 만에 2천만원을 모았다. 도은은 신용카드를 쓰면 자신이 얼마를 쓰는지 모른다며 직불카드를 썼다. 그러면서 천원을 주고 산 다람쥐 모양의 지갑에 카드나 신분증을 넣고 다녔다.

도은은 인기도 많았다. 병원 동료들은 도은이 생일 때 롤링페이퍼를 만들어 “뒤에서 몰래 도와주고 감동이에요” “6층과 7층을 오고 가느라고 많이 힘들 텐데 늘 열심히 잘하는 모습 보면 대단해”라는 칭찬을 빼곡히 적었다. 그렇게 야무지고 성실한 도은이 ‘그날’ 인파에 휩쓸려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엄마는 이해할 수 없다.

실은 ‘그날’은 도은이 부산으로 오겠다고 한 날이었다. “며느리가 둘째 아이를 임신해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제가 첫아이를 봐주고 있었어요. 도은이 엄마 힘드니까 부산으로 오겠다고 해서, 1~2주 지나면 둘째 조카 나오니 11월 첫째 주에 내려와서 한 번에 보고 가라고 했어요.” 10월27일 영상통화로 그런 얘기를 했다. 그게 마지막 통화였다. 10월29일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는 친구와 놀러 간다고만 얘기했다. “놀러 간다는 건 절대 반대 안 했어요. 길을 가다 죽을 것 같았으면 부모들이 가라고 했겠어요?”

도은은 친구 세 명과 함께 이태원을 찾았다. 술집에서 모였지만 도은은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달달한 과자를 먹고 싶다”며 친구 한 명과 함께 편의점에 갔다고 한다. 남은 둘은 친구들이 한참 오지 않자 거리로 내려갔다. 그땐 이미 해밀톤호텔 옆 골목에 사람들이 뒤엉켜 있는 상태였다. 놀란 친구들은 이곳저곳을 헤매다 도은을 찾았다. 간호사였던 친구는 오래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누군가 다가와 그만하라고 했다. 구급차에 도은을 따라 타려고 하니 가족이 아니니 탈 수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도은씨가 준비했던 아빠의 생일 이벤트. 유가족 제공

도은씨가 준비했던 아빠의 생일 이벤트. 유가족 제공

참사 다음날인 2022년 10월30일 아침 엄마가 도은씨에게 보낸 문자메시지. 유가족 제공

참사 다음날인 2022년 10월30일 아침 엄마가 도은씨에게 보낸 문자메시지. 유가족 제공

병원 세 곳을 헤맨 끝에 겨우

그사이 도은과 연락이 되지 않은 엄마는 애가 탔다. 참사 이튿날 아침 8시부터 계속 도은에게 전화하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남겼다. “도은아. 엄마. 제발. 톡해라. 전화해.” 친구는 오전 10시에야 도은이 오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을 찾아 엄마와 연락이 닿았다. “어머니가 찾으셔야 해요. 저한텐 (현장에서) 아무것도 안 해줘요. 지금 빨리 도은이 어딨는지 찾으셔야 해요.”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교통편이 마땅치 않았던 가족 대신, 도은의 삼촌과 이모가 먼저 서울로 향했다. 경찰에 먼저 전화해 물어보니 처음엔 순천향대병원에 있다고 했다. 찾아보니 없어 다시 전화하니, 그다음엔 평촌 한림대성심병원에 있다고 했다. 그곳에 가보니 없어 알아봤더니 안양샘병원으로 옮겨갔다고 했다. 서울과 경기도 안양을 전전하던 삼촌과 이모는 오후 2시께에야 도은이 있는 안양샘병원에 도착했지만, 부모가 아니라는 이유로 도은을 직접 확인할 수 없었다. 엄마와 아빠는 이날 저녁 7시 겨우 도은을 확인해 10월31일 새벽 1시에야 부산으로 데리고 올 수 있었다.

도은과의 추억을 물으면 엄마는 이상하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분명 좋았던 순간이 많았는데, 너무 아파서 기억이 안 나요.” 어느 날 엄마는 멍하게 걸어다니다 넘어져서 팔을 다쳤고 붕대를 감았다. 병원을 가야 해 지하철을 탔는데 1시간30분을 앉아 있다가 병원은 가지도 못했다.

도은씨와 엄마 이미영씨가 제주도에 놀러 가서 찍은 사진. 유가족 제공

도은씨와 엄마 이미영씨가 제주도에 놀러 가서 찍은 사진. 유가족 제공

“나의 미래, 나의 전부, 너여서 행복했어”

엄마는 아빠와 도은이 유럽 여행을 갈 때 일하느라 가지 못했을 정도로 ‘워커홀릭’이었다. 그런 엄마에게 도은은 “엄마, 인생을 즐길 때도 됐어.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라고 말하곤 했다. 도은이 떠나고 나서야 엄마는 모든 일을 놔버렸다. 도은이 없으니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딸을 잃었는지 내 인생을 잃었는지 모르겠어요.” 아빠도 2주간을 앓아누웠다가 겨우 일어나 밀린 일을 하는 중이다.

가족은 도은의 삼년상을 치르기로 했다.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평소 무뚝뚝한 엄마는, 끝내 사랑한다는 말을 도은에게 건네지 못한 것이 가슴에 맺혔다. “너는 나였고, 나의 미래고, 나의 전부였어. 너여서 좋았고, 너라서 행복했어. 널 너무 많이 사랑해. 지켜주지 못해 정말 미안해. 보고 싶다. 우리 딸.” 엄마는 그날 도은이 찼던 찌그러진 팔찌를 평생 차는 것으로, 그리운 마음을 대신한다.

김가윤 <한겨레> 기자 gayoon@hani.co.kr

<한겨레21>은 참사 한 달째부터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싣는다. 추상화로 뭉뚱그려졌던 이야기를 세밀화로 다시 그려내기 위해서다.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었던 것이 수사 과정에서 어떻게 배제되고, 가족을 위한다고 만든 행정 절차가 어떻게 그들을 되레 상처 입히는지 <21>은 기록한다. 재난의 최전선에 선 가족들의 이야기는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기록하는 우리 사회의 묵직한 사료가 될 것이다. 희생자의 아름다웠던 시절과 참사 이후 못다 한 이야기를 건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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