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을 진득이 좋아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책 읽는 걸 좋아했다지만 한 명의 작가에 푹 빠져서 모든 작품을 다 읽어본 적도 없다. 웹툰을 좋아하지만 그 또한 대부분 한때뿐이라고 느낀다. 요즘에는 이런 말이 있다. ‘오타쿠’와 일반인의 차이는 작품을 볼 때가 아니라 작품을 보고 나서 드러난다고. 일반인은 작품을 보고 나면 끝이지만 덕후는 작품을 보고 나면 그때가 시작이라는 말이다. 요즘 시대에는 작품을 본 뒤 2차 창작이나 자질구레한 설정 등에 빠져서 그 작품의 세계관에서 헤엄치는 사람을, 무언가를 끝에 다다를 때까지 좋아하는 사람을 오타쿠로 정의한다. 나는 언제나 오타쿠가 되고 싶었다. 요즘 뭘 좋아해, 라는 질문에 끝없이 답하는 사람이.
하린 작가의 ‘안녕, 나의 수집’은 오타쿠적 정체성을 가지고 수많은 것을 수집해온 사람이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환경 애호가’가 되면서 자신의 수집품들을 비워내는 내용이다. 주인공인 ‘무주’는 그림을 전공한 만화가로, 만화와 애니메이션과 뮤지컬 등 여러 가지 매체와 대상을 ‘덕질’해왔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덕질은 끝나면 여러 가지 굿즈를 남기기 때문에 무주는 자연스럽게 아주 많은 것을 모아서 북적거리는 공간을 만들었다.
내 취향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나 또한 침대 머리맡의 창틀에 수건을 깔아서 작은 스노볼이나 알록달록한 머리끈 같은 것을 진열하던 초등학생에서 막 청소를 끝내고 텅 빈 책상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스무 살로 성장했다. 이 때문에 점점 공간을 비워가는 무주에게 감정을 이입해서 볼 수 있었다. 이 만화의 백미는 제목이 담긴 ‘표지 컷’이다. 표지 컷에는 무주의 방이 그려져 있는데, 매 회차 비워진 물건들은 표지에서 지워진다. 회차를 거듭하며 방이 점점 비어가는 것이다. 제1화에서 발 디딜 틈 없던 무주의 방은 가장 최근 화(작성일 기준 제173화)에서는 휑할 정도로 비어 있다. 이전 화와 비교해서 무엇이 사라졌는지 다른 그림 찾기 하듯 차이점을 찾아내는 것은 이 만화를 감상할 때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재미다.
이 만화를 볼 때면 오타쿠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 마치 낯선 나라의 여행기를 보는 것처럼, 나는 무주가 하나씩 모으고 비워가는 물건들의 사연을 보며 새로운 세상과 맞닿을 수 있다. 장장 5편에 걸쳐 다뤄진 ‘아이돌 굿즈’ 편에서 나는 ‘응원 상영’이란 개념을 처음 접했다. 3D 아이돌을 덕질하는 친구들을 주로 접했던 내게 2D 아이돌을 덕질하는 방식은 깜짝 놀랄 만큼 새로웠다. 극장에서 2D 아이돌의 콘서트 영상을 틀어주면 다 같이 응원봉을 흔들며 함께 쇼를 만들어나간다니!
만화에서 비유적으로 언급된 동영상을 찾아보고 인생에서 단 한 번 가봤던 가수 권진아 콘서트 경험과 비교해봤다. 하나의 무대나 영상을 보는 수많은 대중의 몰입감은 나에게도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기억으로 자리매김하지 않았던가. 좋아하는 대상이 무엇인지에 상관없이 그것에 한없이 열광하고 이입하는 감각을 무주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볼 수 있었다.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간지러우면서도 깊이 소중한 일이다. 무주가 좋아하는 것을 보며 폴짝 뛰고,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고, 그 마음을 소중히 간직하고 갈무리해 떠나보내는 모습은 놀라울 만큼 정중하고 그래서 무엇보다 깔끔하다.
신채윤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저자
*“작은 말풍선과 등장인물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좇으며 몸과 마음이 아픈 순간을 흘려보냈다. 만화의 세계를 헤엄치며 맛봤던 슬픔과 기쁨, 내 마음을 콩콩 두드렸던 뜻깊은 장면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는 20대 작가가 인생의 절반을 봐온 웹툰의 ‘심쿵’ 장면을 추천합니다. ‘웹툰 소사이어티’는 웹툰으로 세상을 배우고 웹툰으로 이어진 것을 느낀다는 의미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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