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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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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1조, 이것이 이 시대 인간의 조건

작업·창작의 세계가 홀로 하는 일이라는 ‘착각’, 서로 의존하며 또 어떻게 그 의존을 갚고 살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완성돼
등록 2022-10-30 04:08 수정 2022-11-02 14:52
노동이든 창작이든 ‘홀로’ 뭔가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위험하다. 서로 의지하는 인간에게 2인1조는 삶의 기본 조건이다. 작은집건축학교에서 실습하는 교육생들. 류우종 기자

노동이든 창작이든 ‘홀로’ 뭔가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위험하다. 서로 의지하는 인간에게 2인1조는 삶의 기본 조건이다. 작은집건축학교에서 실습하는 교육생들. 류우종 기자

“정말 후회했어요. 내가 노동인권을 강의하고 강조하는 사람인데 왜 이 사람의 작업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았을까 후회했죠. 그가 회복되고 나서 다시 공사에 들어가면서는 2인1조로 작업하지 않으면 나는 이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선언했어요. 사람을 구하지 못하면 아들과 함께 작업해야 한다고 했죠. 다행히 지금은 그렇게 작업하고 있습니다.”(A)

지역에서 생태적 삶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찾아

이번 학기 ‘작품연구’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함께 다녀온 답사의 마지막은 혼자서 3년째 집을 짓고 있는 B와의 만남이었다. 학생들은 홀로 집짓기를 하며 그가 배우고 생각한 것에 완전히 매료돼 듣고 있었다. 만화를 그리고 공연을 연출하는 학생들에게 그의 집짓기는 자기가 수행하고 싶은 바로 작품 창작에 대한 이야기였다. 상품이나 제품이 아니라 작품 창작에 대한 갈망을 가진 학생들에게 그가 집을 짓기로 결심한 이유부터 집을 지어가는 과정 전체가 매혹적인 이야기였다.

그 가운데 B가 얼마 전 작업하다 낙상해서 오랫동안 자리보전한 이야기가 나왔다. B의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한 학생들은 너무 안타까워 같이 한숨을 쉬었다. 그때 B의 파트너인 A가 앞의 말을 했다. 2인1조였다면! 순간 학생들은 ‘창작(작업)의 세계’에서 어떤 다른 세계로 빠져나왔다. A의 말은 창작의 고통과 외로움, 즐거움과 더할 나위 없는 환희와는 전혀 다른 냉정한 세계로 그들을 소환했다. ‘노동’의 세계였다. 창작자들이 ‘창작/작업’이라는 이름으로 간과하다가 언젠가는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위험에서 그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직시해야 하는 세계였다.

창작과 노동의 세계를 동시에 대면한다는 점에서 답사는 성공적이었다. 철학자 해나 아렌트의 개념을 빌려오면 우리가 이야기에서 구축해야 하는 인물은 작업하는 존재이자 노동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행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입체적 인물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삶의 현장을 알아야 한다. 거기 노동과 작업, 그리고 행위가 어떻게 얽혀 위험과 보람, 기쁨과 슬픔을 만들어내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노동과 작업, 그리고 행위 사이에서 ‘살아 있는’ 혹은 그 간극과의 괴리로 괴로워하거나 모순에 의해 죽어가는 인물을 구축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선택한 것이 지역에서 생태적 삶을 고민하며 살아가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삶에서 내가 학생들이 보고 듣고 느끼게 하고 싶었던 것은 함께 살아가는 것에서 반드시 인간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윤리’ 문제였다. 함께 산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삶이며, 누군가가 나에게 의지하는 삶이다. 이것은 때로 무엇을 죽이고 먹는 문제이며 무엇을 죽여서 먹고 먹이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의존’의 문제를 회피할 수 없다면 인간은 아무리 덜 의존하고 살더라도 반드시 생각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윤리다. 어떻게 의존하며 또 어떻게 그 의존을 갚고 살 것인가를 생각함으로써 인간은 인간이 된다.

가을에 베어져도 벼가 건강했으면

답사에서 만난 이들은 이 윤리 문제를 자기 삶의 중심에 두고 항상 고민했기에 학생들이 꼭 만났으면 했다. 평생을 농부로, 살아 있는 것을 덜 해치면서 살아가되 불가피하게 해치는 존재에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온 한 농부는 학생들을 만나는 조건으로 사진 찍는 것을 거부했다. 당신은 남기는 삶을 최소화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생태농법으로 벼농사를 짓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벼와 벼 사이에는 바람이 통해야 하고 벼의 뿌리까지 햇볕이 통해야 해요. 그래야 벼가 건강하게 자랍니다. 농부들은 가을걷이할 때 구두를 던져 그 구두가 떨어지지 않고 다 자란 벼 위에 걸쳐지면 농사가 잘됐다고 말해요. 하지만 그렇게 자란 벼들 사이에는 바람이 통하지 않아요. 햇볕을 받지 못해 벼가 잘 쓰러져요. 저는 내가 키우는 벼가 가을에 베어지더라도 건강했으면 해요. 바람을 쐬고 볕을 쬐면서요.”

농부의 이 말은 즉각 나에게 철학자 김영민의 동무론을 생각나게 했다. 김영민은 동무를 ‘同無’, 즉 같은 것이 없는 사이라고 말했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남이가”의 동무는 절대적으로 부패하는 사이다. 양적 성장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대다수 사람은 겉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허약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관계가 너무 빽빽해서 자기 발밑이 햇볕 한번 제대로 쪼여본 적 없다는 걸 알지 못한다. 이것은 동무의 관계가 아니다.

같은 것이 없는 동무란 서로에 대해 ‘서늘한 관계’를 지킨다. 서늘하다는 말은 그저 서로에게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며 싸늘하다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더구나 서로 거리를 유지하기에 결국 모든 존재는 각자로서 외롭다는 말도 아니다. 오히려 서늘하다는 것은 서로에 대한 염려이며 배려이며 돌봄이다. 내 동무가 썩을 수 있음을 염려하여 그의 바닥까지 온전히 햇볕을 쬐고 바람을 맞도록 거리를 유지해주는 사이다. 말씀을 전해준 농부에게 벼농사란 벼들이 서로 동무가 되게 보살피는 일이었다.

이렇게 관계를 돌보는 일, 이를 아렌트식으로 말한다면 아마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벼가 빽빽이 들어찬 논도 하나의 세계다. 그 세계는 오로지 상품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반면 듬성듬성 있어 대량생산은 불가능하지만 태풍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는 벼가 자라는 논은 또 다른 세계다. 작품을 구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세계를 설정하기’라면 그것은 존재 사이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정하고 그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하고 혹은 파괴하는 것으로서의 ‘행위’가 될 터이다. 학생들의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은 서로에게 어떤 행위를 하고 그 행위는 어떤 관계를 만들고 세계를 형성하는가. 혹은 창작자로서 어떤 세계를 제시하고 싶으며 그 세계에서 등장인물들은 적합하게 행동하며 관계를 형성하는가를 생각할 수 있었다.

집이 넓고 큰 이유, ‘환대’하기 위해서

B가 홀로 짓는 집도 이렇게 세계를 짓는 ‘행위’였다. 그는 자신이 툇마루를 다른 집들보다 더 넓게 지은 이유는 동네 사람들이 언제든 지나가다가 쉬고 싶을 때 들어와 앉고 잠도 잘 수 있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설계했다고 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만화를 그리다가 지치고 무너질 것 같으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했다. 쉬어가도 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 지은 집이라면서. 자기 집을 그저 내준다는 이런 환대와 초대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기에 학생들은 모두 놀라며 감사했다.

아렌트가 말한 세계를 짓는 활동으로서의 행위에는 환대가 포함된다. 내가 짓는 세계에 다른 이를 초대하는 것이다. 내 세계에 초대하는 것이자 동시에 내가 짓는 행위에 초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초대는 함께 세계를 짓는 행위를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그 집은 ‘공동의 집’이 된다. 홀로 지은 집에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짓는 것부터 함께 하며 그 집에 함께 머무르자는 초대가 ‘환대’이다. 초대와 환대가 아닌 배제와 축출이 세계의 원리가 된 시대에 환대가 서구 철학자를 중심으로 세계의 새로운 원리이자 윤리로 제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점에서 2인1조는 인간의 활동인 노동, 작업(창작), 행위 그 어떤 것으로 보더라도 인간의 조건 자체라 할 수 있다. 행위는 말 그대로 공통의 집을 짓는 공동의 행동이기 때문에 최소 조건이 2인1조가 될 것이다. 작업(창작)은 고독한 창작자 혼자만의 과정인 것처럼 보이지만 끊임없이 피드백해주면서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고 독선과 독단에 빠지지 않게 하는 동무가 필요하다. 그것이 비록 공동창작의 이름으로 제출되지 않고 저자/창작자 혼자의 이름으로 나가더라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들의 서문에는 자기 창작에 서늘한 바람을 불게 해준 사람들의 이름이 감사의 글로 항상 붙어 있지 않은가? 홀로 집을 지은 B도 학생들에게 강조해서 말했다. “절대 이 집은 혼자 지은 것이 아닙니다. 홀로 집을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른 모든 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작업/창작 세계가 혼자의 일이라는 말이야말로 착각이며 창작자를 위험에 빠뜨린다.

마지막으로 노동에서 2인1조가 필요한 것은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인간 활동의 세계에서 ‘홀로’란 없으며,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이 ‘홀로’를 강요할 때 인간은 위험에 빠진다. 한편에서는 창작은 고독한 것이라 기만하며 창작자를 위험에 빠뜨린다.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을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으로 여겨 노동자들이 서로를 위험에서 보호하는 ‘행위’를 제거해버리고 ‘홀로’ 노동하게 한다.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서로가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위험에 빠졌을 때 즉시 작업을 멈추고 사람을 먼저 구하는 일, 이것이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가 구축하고 지켜야 하는 ‘세계’다. (물론 그 세계를 사회가 보호해야 한다.) 2인1조가 돼야 노동은 다시 서로를 보호하는 행위가 되며 활동적 삶의 현장이 된다.

행위 역량을 빼앗고 세계를 파괴하는 ‘홀로’의 강요

서울지하철 구의역에서 벌어진 참사부터 충남 태안화력발전소를 거쳐 에스피시(SPC)에서 벌어진 일(2인1조가 아니라 혼자 일하다가 숨진 상황)은 노동을 일회용으로 착취하는 것을 통해 노동자에게서 행위 역량을 박탈하고 그들의 세계를 파괴한 필연적 결과이다. 가장 근본적인 ‘구조적 악’이 있다면 사람에게서 세계를 빼앗고 파괴하는 짓일 것이다. 서로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세계를 도모하는 인간의 활동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조건 자체가 파괴된다. 오히려 그것을 성가신 비용으로 여긴다. 세계가 파괴되고 고립된 인간이어야지만 쉽게 소비하고 일회용으로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A는 B의 사고 이후 B의 노동/작업(창작)/행위의 세계가 계속 혼자 하는 것이면 그 집이 완성되더라도 결코 그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지금 많은 이가 ‘그렇게 만들어진 빵이라면 더 이상 사 먹지 않겠다’고 나섰다. 이것은 참담하게 돌아가신 분의 억울한 죽음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요구다. 그냥 불매운동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을 만들고 지키기 위한 윤리적 행동이다.

참담한 죽음들과 그 죽음 앞에서 저 빵은 먹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말한다. 2인1조. 이것이 이 시대 인간의 조건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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