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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다움이라는 ‘잘못된 통념’ [뉴스 큐레이터]

등록 2022-09-24 14:04 수정 2022-09-24 23:26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 모습. 한겨레 김정효 기자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 모습. 한겨레 김정효 기자

성폭력 피해자의 태도를 문제 삼아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2심 판결을 대법원이 뒤집었다. 이른바 ‘피해자다움’을 강요한 하급심의 판단에 대법원이 제동을 건 게 처음은 아니지만, ‘잘못된 통념’을 지적하며 피해자의 통상적인 반응 예시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ㄱ(70)씨는 2019년 1월20일 채팅앱에서 만난 피해자 ㄴ씨를 모텔에 데려가 강제로 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은 ㄴ씨의 진술에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해 ㄱ씨에게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2심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ㄴ씨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는데다, 사건 발생 전후 태도가 피해자라고 하기엔 수긍하기 어렵다고 보고 ㄱ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2심의 판단을 다시 뒤집고 사건을 돌려보냈다. 2심 판결이 ‘잘못된 통념’에 따라 통상의 성폭력 피해자라면 마땅히 보여야 할 반응을 상정해두고 ㄴ씨가 이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진술의 합리성을 부정했다고 대법원은 판단했다.

대법원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구체적 사례를 제시했다. △피해자라도 가해자와 종전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을 느끼기도 하며 △일정 수준의 신체접촉을 용인했더라도 예상하거나 동의한 범위를 넘어서는 신체접촉을 거부할 수 있고 △피해 상황에서 명확한 판단이나 즉각적인 대응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예시를 들어 법리를 제시한 까닭은 2018년 10월 피해자다움과 관련해 “법원이 성폭력 사건을 심리할 때는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판시한 이후에도 일선 법원에서 이전과 비슷한 잣대로 선고를 내리는 일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2018년 판례는) 성폭력 사건에서 통용된 잘못된 통념을 극복하고 합리성과 경험칙의 내용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의미였다”며 “(이번 판결은) 하급심에서 예전 판결을 기준으로 계속 판단하니 범례를 구체화해서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류석우 기자 raintin@hani.co.kr

*뉴스 큐레이터는 <한겨레21>의 기자들이 이주의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뉴스를 추천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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