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한국에서 출신 대학은 일종의 사회적 계급과 같다. 서울대는 1계급, 연고대는 2계급, 서울의 상위 사립대는 3계급이고, 나머지 대학 출신들은 평민이라는 냉소적인 이야기가 흔히 회자된다.
이런 ‘사회적 특수 계급’의 등장은 사회를 질식시킨다. 대학 서열이 고정돼 대학 간 경쟁은 사라졌고, 대학 입시는 과열됐으며, 사교육은 창궐했고, 공교육은 무너져버렸다. 학부 졸업장은 좋은 직업과 높은 소득, 많은 자산(부동산)을 얻는 열쇠가 됐다. ‘사회적 특수 계급’은 점점 공고해지고 있다.
이렇게 ‘사회적 특수 계급’으로 변질된 대학을 개혁하려는 시도도 계속돼왔다. 대표적 개혁 방안은 2003년 발표된 정진상 경상대 교수의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였다. 그러나 혁신적이고 방대한 이 개혁안은 현실에서 거의 힘을 쓰지 못했다.
최근 들어 이것을 업데이트한 김종영 경희대 교수의 ‘서울대 10개 만들기’ 방안이 발표돼 화제를 일으켰다. 현실성을 높이려고 1단계 대상을 전국의 10개 거점국립대로 한정했고, 효과를 높이려고 대규모 재정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방식으로 설계했다.
‘대학 입시와 부동산값은 세종대왕이 다시 와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농담이 있다. 거꾸로 보면, 대학과 부동산 문제가 매우 중요하고, 반드시 풀어야 하는 과제라는 뜻이기도 하다. 과연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통해 ‘사회적 특수 계급’의 제도로 전락한 대학을 개혁할 수 있을까. _편집자주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서울대를 포함한 거점국립대 10곳을 국내 최고 수준의 대학으로 키워나가자는 제안이다. 많은 전문가가 이 제안에 공감이나 기대감을 표시했지만, 의문과 우려도 적잖다. ‘10개의 서울대’에 제기되는 주요 의문에 대해 질의문답 형식으로 정리해봤다.
‘서울대 10개 만들기’ 방안은 현재 1곳에 불과한 국내 최고 명문대인 서울대를 10곳으로 늘리자는 제안이다. 국립 명문대로 가는 병목을 넓혀서 입시 과열과 대학 서열화를 완화하자는 것이다. 서울대를 포함한 10개 거점국립대의 이름도 ‘서울1대학~서울10대학’으로 하자고 김종영 경희대 교수는 제안했다. 그런데 서울대가 과연 이 거점국립대 네트워크에 참여할지는 의문이다. 이미 국내 최대 규모의 정부 지원을 받는 서울대로선 크게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세정 서울대 총장은 “서울대의 공식 입장은 아직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긍정적 의견을 말했다. 오 총장은 “거점국립대에 투자해서 대학들이 상생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가장 앞선 연구 중심 대학인 서울대가 노하우를 나눌 수 있고, 다른 대학들은 서울대를 벤치마킹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 총장은 또 “서울대에 경쟁자가 생기는 것은 좋은 일이다. 카이스트가 생겼다고 서울대가 나빠졌나? 좋은 경쟁자가 생기면 서울대도 더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울대 안에서 긍정적 시각만 있는 것은 아니다. 2022년 1월7일 서울대에서 ‘거점국립대와 공동학위제’라는 토론회를 연 임도빈 행정대학원 교수는 “서울대가 참여하고 정부가 예산을 대규모로 지원한다고 지방의 국립대들이 서울대나 연고대 수준으로 올라올지는 의문이다. 서울대를 10개 만들면 ‘서울대’라는 브랜드의 희소성이 떨어져 위상이 내려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서울대가 참여하는 경우와 참여하지 않는 경우 모두를 고려하고 있다. 대규모 재정투자를 통해 9개 거점국립대를 서울대 수준으로 상향시키는 일이어서 서울대의 참여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2021년 대한민국의 대학 가운데 사립대의 비율은 84.9%, 사립대 학생의 비율은 81.6%에 이른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 이후 교육부의 예산 투입이 국립대 중심에서 전체 대학으로 확대돼 사립대 비중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2020년에는 정부 예산을 가장 많이 지원받은 5개 대학 가운데 3곳이 사립대(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였다.
따라서 김종영 교수의 제안대로 정부가 9개 거점국립대에 매년 각각 3600억원 규모의 예산을 투입한다면 사립대들이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일까? 이 방안에 사립대 재정 지원이 빠진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정진상 경상대 교수(사회학)는 “기존에 사립대에 지원하던 예산은 그대로 유지하고 추가 재정으로 거점국립대를 지원해야 한다. 기존 재정을 거점국립대에 몰아주면 사립대 반발로 이 정책을 시행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범 교육평론가도 “거점국립대에 정부 예산을 집중 투입하면 서울의 주요 사립대와의 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 처음부터 서울의 주요 사립대를 포괄하는 큰 그림으로 접근하는 것이 더 현실성이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 10개 만들기’ 방안을 제20대 대통령선거 후보들에게 제안한 김동원 국가거점국립대학교총장협의회장(전북대 총장)은 “중장기적으로는 모든 국립대와 공영형 사립대까지 지원해야 한다. 그러나 1단계에선 거점국립대 중심으로 가야 한다. 대학교육 재정을 한꺼번에 늘리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는 서울대와 서울의 주요 사립대가 대학 서열의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가 거점국립대에 집중 투자하면 서울대와 서울 주요 사립대의 위상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거점국립대가 여기에 합류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이른바 대입 ‘병목’은 조금 넓어지지만, 이들 대학과 나머지 대학의 격차는 더 커질 우려도 있다.
김종영 교수는 “이 방안은 서울대 등 거점국립대 10곳을 연구 중심 대학으로 발전시키는 계획이다. 그와 동시에 다른 국공립대는 교육 중심 대학, 지방 사립대는 직업 중심 대학으로 재편하고 네트워크를 만들려는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에서도 이런 시스템이 있는데 비교적 잘 작동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거점국립대 같은 소수 대학을 집중적으로 발전시키는 방안은 대학 개혁 효과가 제한적일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김태훈 정책부위원장은 “거점국립대 중심으로 가더라도 처음부터 다른 국공립대와 사립대에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 거점국립대 9개로는 대학 서열화 해소 효과가 작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무상화·대학평준화 추진본부’의 임재홍 연구위원장(한국방송통신대 교육학 교수)도 “현재 방안은 거점국립대 외 국립대나 지방 사립대에 대해 대책이 없다. 국립대가 부족한 상황에서 국립대에 지원을 집중하면 사립대 학생들이 소외될 수 있다”고 말했다.
2003년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 방안이 나왔을 때부터 대학 체제 개혁은 입시제도 개혁과 두 바퀴를 이루며 추진됐다. 그러나 이번 방안에선 입시제도 개혁은 나중으로 미뤄놨다. 난마와 같은 입시제도 개혁을 포함하면 대학 체제 개혁조차 어려워진다는 우려 때문이다.
김종영 교수는 “9개 거점국립대를 육성하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선 입시제도 개혁은 미뤄야 한다. 입시 문제를 둘러싼 논란으로 대학 개혁이 좌초할 수 있다. 처음부터 목표를 너무 크게 잡으면 실패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말했다. 2월15일 ‘서울대 10개 만들기’ 세미나를 개최한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그동안 입시제도를 수없이 고쳤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번엔 대학 체제를 획기적으로 바꿈으로써 거꾸로 입시 과열을 완화하고 중고교 교육을 정상화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 입시제도 개혁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김사열 국가균형발전위원장은 “학생들의 능력은 별 차이가 없는데 등급을 세분하는 방식으로 입시제도를 만들어놨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자격시험으로 전환하고 현재의 내신 9등급도 5등급 정도로 완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학교 교육이 정상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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