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가 다른 이와 가깝게 지내는 것을 이유로 말다툼하다 격분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에서, 여느 때보다 평안해야 할 시간에, 한때 가장 가까웠던 사람에게 죽임을 당한다. 애정싸움·질투·불화 같은 언어로 치환하며, 외면하다, 그 피해가 가시화돼서야 비로소 들여다본다. 그러나 피해자는 이미 이 세상에 없다. 그렇게 다시 죽음은 잊히고 흩어진다.
친밀한 관계에서의 여성살해는 익숙해서 오히려 낯설다. 한국여성의전화 여성폭력 상담통계(2020년 1084건)에선 피해자와 가해자가 전·현 배우자 또는 연인 관계인 경우가 42.9%(465건)를 차지하여 가장 높게 나타났다. “여성폭력의 절반 가까이가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해 발생했다”는 분석이다.
<한겨레21>은 그 폭력이 극단으로 치달아 도달한 죽음을 한데 그러모았다. 2016년 1월~2021년 11월 배우자(전·현 아내, 사실혼 관계 포함)가 죽음에 이른 사건 205건, 연인을 죽게 한 사건 142건의 판결문을 살펴봤다. 그 죽음들은 각기 다르나, 묘하게 닮아 있었다._편집자주
여느 때와 다름없는 수요일이었다. 2021년 4월28일,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김수현(26·가명)씨는 모처럼 휴가를 내고 쉬고 있었다.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부산에서 오빠와 사는 엄마 최은영(54·가명)씨가 건 전화였다. “수현아, 도어락 비밀번호 어떻게 바꾸는 거니.” 수화기 너머 엄마의 목소리는 겁에 질려 있었다.
아빠 김정우(54·가명)씨가 예고 없이 엄마 집에 찾아왔다고 했다. 엄마는 아빠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아빠는 오빠가 출근해서 집에 없는 아침 시간대를 노린 듯했다. 보조키를 잠가둔 덕분에 아빠는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 아침 8시51분 엄마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했을 때 아빠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현관문 앞에는 아빠가 두고 간 달걀만 놓여 있었다.
“피해 입은 건 없어요. 신고해서 죄송해요.” 엄마는 경찰에게 미안해했다. 경찰은 “도어락 비밀번호를 변경하고 재차 방문하면 112에 신고하시라”고 권유하고 철수했다. 그런데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꾸려면 현관문을 열어야 한다. 수현씨는 엄마를 일단 안심시키고, 인터넷에서 찾아본 비밀번호 변경 방법을 차근차근 알려줬다.
그게 엄마와의 마지막 통화였다. 7시간 뒤인 그날 오후 4시18분, 엄마는 아빠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 엄마가 사는 곳은 아파트 10층. 아빠는 11층에 내려 기다리다 모텔 청소일을 하러 집을 나서던 엄마를 덮쳤다.
2017년 살인 범죄로 숨진 피해자 10명 중 3명이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살해된 여성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언론보도를 기준으로 집계한 결과인데, 보도되지 않은 사건까지 고려하면 그 비중은 더 클 것으로 추정된다. 방문을 닫고, 커튼을 치고 벌어지는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은 그저 우발적이고 급작스럽게 벌어진, 안타까운 사건에 불과한가. 아내살해라는 극단적인 폭력에 다다르게 된 맥락과 전조 증상이 있었을 것이다. 최은영씨 죽음은 아내살해 사건의 어떤 전형을 보여준다. 2021년 11월11일과 12월9일 서울에서 수현씨를 만나고, 최씨 언니 2명과 전화로 인터뷰했다.
최씨가 이혼을 요구한 건 2021년 4월의 일이다. 30년의 결혼생활 끝에 어렵게 용기를 냈다.
폭력의 시작은 아득히 멀다. 수현씨는 “(아빠의 폭력은) 유치원 다닐 때부터 늘 그랬다”고, 수현씨 이모는 “결혼하고 2~3년 만에 사람이 변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집 밖에서는 사람 좋은 이가 집에만 들어오면 폭군으로 돌변했다. 최씨와 수현씨 남매에게 폭언을 퍼붓거나 물건을 집어 던졌다. 특히 술 마시고 귀가하는 날이면 흉기를 들고 “가스밸브를 자르겠다”고 협박하는 일이 벌어졌다. 밤새도록 최씨를 성적으로 괴롭히는 날도 많았다. 최씨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주방에 있는 칼을 숨겨놓거나 남매의 손을 잡고 집을 나와 김씨가 잠들 때까지 정처 없이 골목을 배회하는 것뿐이었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김씨의 벌이가 변변치 않을 때마다, 최씨는 닥치는 대로 일했다. 뜨거운 국밥을 이고 배달하거나, 미용일을 했다.
폭력에 이유는 없었다. “원하는 답을 하지 않는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만약 ‘너 물 마실래’ 물어봤다고 가정해봐요. 자신이 생각하는 대답은 ‘마실래’인데 만약 ‘안 마시겠다’ 혹은 ‘우유 마시겠다’고 말하면 거기에 폭발하는 사람이었어요.” 수현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을 떠올렸다. 텔레비전을 보는데 김씨가 채널을 돌리라고 말했다. “광고 끝날 때까지만 마저 보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수현씨 허벅지로 사기그릇이 날아왔다. 거실 구석으로 도망치자 밥상 위에 있던 유리그릇이 차례로 날아왔다. 수현씨는 발등을 크게 다쳐 구두를 아예 신지 못하게 됐다. 승무원의 꿈을 접었다.
그렇다고 최씨가 이혼을 적극 요구할 수도 없었다. “네가 내 눈앞에서 사라지는 순간, 네 가족 다 몰살시킬 거야. 네 친정집 언니들 다 죽여버릴 거다.” 김씨의 거듭되는 협박에 최씨는 “무섭다”는 말을 언니들에게 자주 했다. 그리고 늘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 인간은 한다면 한다. 언니야, 조심해라. 조심해라.”
수현씨는 엄마가 10년, 20년 그렇게 살다보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으리라 짐작한다. “혼자 엮여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내 언니, 오빠들, 조카들 생명까지 쥐고 위협하는데, 나 하나 살자고 그 사람들 생명을 다 넘겨주고 도망갈 수는 없죠. 엄마는 그냥 ‘나 하나 힘들고 내 가족이라도 지키자’는 생각이었어요.”
2009년으로 넘어가던 겨울, 최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술 취한 김씨가 집에 들어와 구토해놓은 바가지를 다음날이 되도록 치우지 않았다며 그 바가지 그대로 최씨에게 집어 던진 뒤의 일이었다. ‘누구 하나는 죽어야 끝나겠다’는 생각에 최씨는 고향 선산에 가서 수면제를 먹었다. 의식을 잃은 상태로 우체부에게 발견되면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2009년 두 달여 가정폭력 피해자를 위한 쉼터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김씨가 쉼터의 위치를 알아내 찾아왔다. 김씨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최씨에게 빌었다. 그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믿으려고 했다. 모아놓은 돈도, 돌아갈 곳도 없었다. 아이들은 아직 10대였다.
“부부싸움하다가 감정이 상할 수 있죠. 대등한 관계라면요. 그런데 일방적인 학대 관계는 차원이 다르죠. 식탁에서 가족끼리 밥을 먹다가 언제 어떻게 된장찌개가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인 거예요. 가해자가 언제, 무엇 때문에 화내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피해자는 항상 긴장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가해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어요. 피해자에 대한 전권이 자신한테 있다고 믿기 때문에 상대방이 생각하고 결정하고 주장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차별적 의식이 깔려 있죠. 피해자가 그 전권을 벗어나려는 순간 자신에게 사법권이 있다고 믿고 상대방을 처형시키는 거예요.”(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
‘강압적 통제’는 친밀한 관계의 배우자나 연인을 ‘통제하고 종속’시키기 위한 다양한 유형의 학대 행위가 누적돼 일종의 패턴을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반드시 신체적 폭력을 동반하는 건 아니어서 법제도나 수사기관에 포착되지 못한다. 그러나 일상적이고 지속적으로 여성을 옭아맨다. 그 피해자는 멍든 눈, 터진 입술 같은 신체적 피해를 당한 모습이라기보다는 인질에 가까운 모습이다.(‘가정폭력 범죄로서 강압적 통제의 법적 수용에 대한 고찰’, 2021년)
“위험한 사람을 체포하고 격리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위험한 사람인지 정확한 이해가 없는 상태이다보니 피해자 보호에 거듭 실패할 수밖에 없죠. 살해로 치닫지 않더라도, 일상에서의 통제 그 자체로 범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해요.”(민윤영 단국대 법학과 교수)
폭력은 반복됐다. 최씨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훌쩍 큰 남매가 용기를 줬다. 언제,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지 고민하다 부산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이혼 서류를 우편으로 보냈다. 신용불량자이던 김씨 대신 최씨 명의로 시작한 사업도 정리해 넘겨주겠다고 말했다. 김씨는 당시 결혼을 준비하던 수현씨 핑계를 대면서 이혼을 거부했다. 남매는 김씨를 적극 설득했다. “제발 엄마를 놔줘라.” “내 결혼과 부모의 이혼은 별개다.”
농약 두 병을 들고 와 “내가 혼자 죽을 줄 알았냐”이혼 서류는 김씨의 폭력성에 불을 댕겼다. 최씨가 세상을 떠나기 열흘 전인 4월19일 김씨가 최씨의 집을 찾아왔다. 태연히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왔다. 김씨는 순순히 “이혼해주겠다”고, “마지막이니까 한 번만 안아보자”고 말했다. 사실상 강제적인 성관계를 맺고 소름 끼치게 웃더니 김씨는 신발장으로 향했다. “내가 혼자 죽을 줄 알았냐.” 그의 손에는 집에 들어올 때 신발장에 숨겨놨던 농약이 들려 있었다. “이걸 마시든지 나를 따라가든지 결정해.” 최씨가 “둘 다 싫다”고 했더니 농약을 억지로 먹이려고 했다. 최씨가 발버둥치면서 농약이 다 쏟아지니 “한 병 더 있다”며 새 농약을 꺼내왔다.
친밀한 관계에서의 극단적인 폭력은 가해자의 소유·지배욕과 연결된 경우가 다수다. <한겨레21>이 2016년 1월~2021년 11월 남편(전·현 남편, 사실혼 관계 포함)에 의한 아내살해 사건 1심 판결문 205건에 나타난 가해자의 범행 동기(중복 집계)를 살펴보니, 이혼 과정에서 갈등을 겪거나 상대방의 외도를 의심하는 등 관계적 요인에 따라 벌어진 살해 사건이 절반(106건·51.7%)에 이르렀다. 그중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거나 재결합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살인을 저지른 사건은 33건(16%)으로 집계됐다.
그날의 위기는 가까스로 종료됐다. 김씨가 보낸 자살을 암시하는 문자메시지에 김씨 동생과 아들이 들이닥치면서다. 때마침 신고받은 경찰도 도착했다.
최씨는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경찰은 ‘가정폭력 위험성 조사표’를 작성해 사건처리 방향이나 긴급임시조치 필요성을 판단하게 돼 있다. 경찰은 최씨 의사와 달리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해 특수협박 혐의로 김씨를 입건했다. 긴급임시조치는 하지 않았다. 부산지방경찰청 관계자는 “시간 경과 등으로 상황이 종료돼 현행범 체포 요건을 갖추지 못했고 가해자가 생업을 이유로 임의동행을 거부했다”며 “임시숙소 이용 등 신변보호 제도를 안내했으나 피해자가 거부했다”고 말했다.
“솔직히 말은 쉽죠. 복수심으로 다시 찾아올 텐데 처벌을 원한다고 어떻게 말하겠어요. 그리고 집이 여기 있고 직장을 그만둘 수도 없고 돈도 없어요. 당장 어디로 옮겨가겠어요.” 수현씨는 반문했다.
2021년 4월19일 특수협박, 4월28일 오전 방문, 그리고 그날 오후까지 김씨는 세 번의 방문 끝에 최씨를 숨지게 했다. 반복되는 가정폭력을 끊으려면 지속적인 사례 관리와 적시 개입이 필요하다. 그러나 살인을 막을 마지막 기회였던 4월28일 오전, 경찰은 최씨가 4월19일 특수협박 사건의 피해자와 동일인임을 인지하지 못했다. 현재 112시스템은 동일한 전화번호로 신고한 경우에만 과거 신고 이력이 나타난다는 게 경찰 쪽 설명이다. 경찰이 직접 관리하는 ‘가정폭력 재발 우려 가정’으로 등록되기도 전이었다. 인수인계는 4월19일 주·야간 팀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 다였다. 인수인계 미흡으로 지구대장과 순찰팀장이 인사 조처됐다.
최씨 휴대전화에는 지구대, 경찰서, 민원실에 연달아 전화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는 통화 녹음이 남아 있다. “그 겁에 질린 목소리가 되게 마음이 아팠어요. 공포에 질려 있었으니까 엄마 판단력도 많이 흐려졌을 거예요. 피해자가 먼저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울 수 있잖아요. 뭘 해야 할지 잘 모를 수도 있고요. 그날 오전에 출동한 경찰이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가’ 한 번이라도 물어봤으면 열흘 전 특수협박 사건의 피해자라는 걸 알았을 테고 더 적극적인 조처를, 적어도 순찰이라도 한 번 더 돌 수 있지 않았을까요.”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의 시선은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먼저 가닿는다. 왜 진작 배우자를 떠나지 않았는지, 왜 국가 시스템을 이용하지 않는지 피해자에게 되묻는다. 2019년 여성가족부의 가정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배우자에게 폭력을 당하고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비율은 2.6%에 그친다. 그 이유로 ‘폭력이 심하지 않다고 생각해서’(32.5%), ‘그 순간만 넘기면 된다고 생각해서’(26.3%) 외에 ‘경찰이 도와줄 수 없을 거 같아서’(6.1%), ‘신고한다고 나아지지 않을 거 같아서’(12.1%)도 적잖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런 케이스는 대부분 비슷한 양상을 띱니다. 단순히 누군가 찾아왔다고 신고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건 이전에 큰 불안을 겪었던 서사가 있기 때문에 신고한 거잖아요. 파트너에 의한 폭력을 경찰에 신고하는 일 자체가 드물어요. 피해자가 겉으로 ‘별일 없다’고 말해도 그 이면을 살펴봐야 합니다. 물어봐야죠. 이전에도 신고한 적 있었냐,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그게 경찰이 이 범죄를 대해야 하는 기본적인 태도예요. 출동하는 거야 당연한 거고요.”(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대표)
2018년 경찰청이 여성가족부와 공동 제작·배포한 ‘가정폭력 사건대응 초기지원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지속적인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는 주체적으로 상황을 해결하기 어려울 수 있다며 외부로 드러난 신체적 피해가 크지 않더라도 가해자 폭력이 계속돼왔는지 한 번 더 세심하게 물어달라고 적혀 있다. 다른 전화번호로 접수된 신고가 동일 사건임을 인지하고 누적된 피해를 파악할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리 가족의 남은 생까지 다 빼앗았는데2021년 5월 김씨는 살인과 특수협박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김씨가 최씨를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봤다. 김씨는 계획적 범죄를 부인했다. 최씨와 몸싸움을 벌이다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남은 가족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헤맸다. 지속적인 폭력을 증명하기 위해 2009년 최씨의 쉼터 입소 기록을 수소문해 재판부에 제출했다. 2021년 9월 남매가 직접 법정 증인석에 서기도 했다. 수현씨는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김씨의 지속적인 폭력과 폭언을 증언했다. 그리고 재판부에 호소했다. “어제 오빠 생일이었는데 엄마 없이 둘이서 보냈거든요. 너무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재판 오기 전에 (납골당에 들러) 엄마를 보고 왔는데 저 가해자가 죄에 맞는 벌을 받을 수 있도록 잘 싸우고 오겠다고 약속했어요.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판사님께서 도와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검찰은 김씨에게 징역 30년을 선고해달라고 요청했다.
11월4일 부산지법 서부지원 형사1부는 김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위치추적 전자장치(전자발찌) 부착 명령을 내려달라는 청구는 기각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피해자를 살해하고 농약으로 자살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십 년간 반복된 폭력이 이러한 판단의 근거가 됐다. “술에 취하면 수시로 같이 죽자는 폭언을 했고, 가족을 위협하려고 흉기도 수차례 들었던” 평소 행실에 비춰봤을 때 4월19일의 범행은 이혼을 포기시키고 최씨를 김씨의 거주지로 데려가기 위해 겁을 준 것이었다고 본 것이다. 사건 당일인 4월28일 범행 직후 김씨가 들이켠 농약도 범행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경작하던 밭에 쓰려고 샀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계획적 살인 범행’은 살인범죄의 양형을 가중하는 특별 양형인자다.
“농약을 미리 사놓고 벨도 안 누르고 집 앞에서 숨어서 기다렸다가 나오는 사람을 덮친 건데 그게 어떻게 우발적인가요. 가해자 쪽 가족은 20년이 길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우리 엄마는 결혼생활 30년에 남아 있는 생까지 다 뺏겨버렸잖아요. 그리고 우리 가족의 남은 날들도 다 뺏겨버린 건데 그렇게 생각하면 20년도 짧게 느껴지죠.”
<한겨레21>의 아내살해 사건 1심 판결문 분석 결과, 판결문 셋 중 하나꼴(74건·36%)로 가해자의 과거 폭력이 적시됐다. 벽돌로 피해자 머리를 내리치는 등 술 마시면 피해자를 심하게 폭행하거나(수원지법 성남 2016고합○○), 다른 친척들이 보는 앞에서 피해자의 멱살을 잡아 던지거나(인천지법 2016고합○○○), 흉기로 목을 찌른 뒤 같은 수법으로 두 달 뒤 살인을 저지르거나(부산지법 2016고합○○○), 피해자가 탄 차량을 들이받았다.(대전지법 2019고합○○○) 반복적으로 점차 강화된 폭력을 저지르다가 살해로 치달은 사례들이다. 피해자 다수가 40·50대(107건·52.1%)를 차지하는 것도 지속적인 아내폭력 끝에 살인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나 살인을 ‘지속된 폭력’의 맥락 안에서 살펴보는 건 수사기관이나 재판부 재량에 달려 있다. 장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물론 유·무죄는 그 범죄행위로 판단하는 게 맞지만 범행이 이미 지속된 폭력의 상황 속에 놓여 있다면 양형을 엄밀히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남은 가족은 각자의 자리에서 “억지로라도 꾸역꾸역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최씨의 두 언니는 최씨가 살해당하기 나흘 전에 보인 마지막 모습이 자꾸 생각난다. 친척 결혼식장에서 만난 최씨는 아들이 사준 남색 원피스를 입고 한껏 밝게 웃었다. 그런 동생의 이름 앞에 ‘고’(故) 자가 붙었다. 우울증, 수면장애, 공황장애 약 없이는 일상생활이 어렵다.
수현씨는 마음껏 슬퍼할 여유도 없다. “넋 놓고 있자니 해야 할 일이 많고 싸워야 할 사람도 많아” 남은 가족을 대신해 “싸우고 따지는 일”을 감당하고 있다. 경찰의 소극적인 대처에 문제제기하느라 두세 달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지냈다. 김씨의 항소로 곧 시작될 2심 재판도 지켜봐야 한다. 폭력의 사슬을 끊을 수 있었던, 그래서 엄마를 살릴 수 있었던 그때 그날로 돌아가 싸우는 일이다. “충분히 막을 수 있었어요. 살릴 수 있었어요. 저는 그 생각이 지워지지 않아요.”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폭력적인 배우자와 결별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어떤 선택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한겨레21>의 ‘페미사이드 500건의 기록’ 특별 웹페이지(stop-femicide.hani.co.kr)에 접속해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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