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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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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의 곁에 있다는 것

난민과 연대하다 상처받은 이들이 환멸에 먹히지 않기를
등록 2021-09-05 00:04 수정 2021-09-10 11:13
2021년 8월 아프가니스탄 현지인 조력자와 가족들이 임시생활 시설인 충북 진천군 국가공무원 인재개발원으로 입소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2021년 8월 아프가니스탄 현지인 조력자와 가족들이 임시생활 시설인 충북 진천군 국가공무원 인재개발원으로 입소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사회학자 오찬호의 <경향신문> 칼럼이 화제였다. ‘아프간 난민, 한국 오지 마라’라는 제목의 그 칼럼은 한국 사회가 난민을 얼마나 타자화해 바라보고 있으며 그 결과 난민에 대해 배타적인 것을 넘어 적대적인 사회임을 ‘폭로’했다. 그리고 그 ‘증거’가 바로 이 칼럼에 달릴 댓글들이라는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끝을 맺었고 그 예언은 당연히 실현됐다.

환멸하고 환호하고… 난민의 자리는 어디인가

이 칼럼을 보고 많은 사람이 환호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국 사회의 배타성은 익히 알았다 하더라도 이번 아프가니스탄 난민 사태에 대해 달리는 반응과 댓글을 보는 것은 ‘인간적으로’ 괴로웠다. 한 친구는 그나마 없던 인류애마저 박살 났다고 토로할 정도로 댓글들은 참담했다. 그런 반응에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이 칼럼은 정말 마음속에서 터져나오려는 말을 그대로 하고 있었기에 ‘체기’가 내려가는 것같이 속이 시원한 글이었다.

그 글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한 친구가 단호하지만 조심스럽게 다른 느낌과 생각을 말해줬다. ‘자리’라는 말을 사용해 그 글에서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을 이야기했다. 저런 말을 하는 ‘자리’는 어디이며, 저 ‘자리’에 난민의 ‘자리’는 어디인지를 물었다. 제법 오래전 쓴 책에 ‘자리’라는 말로 이 사회를 성찰해본 적이 있었기에 친구의 말은 오찬호 선생의 글에 환호하는 내 감정의 자리를 돌아보게 했다.

그 글에 대한 나의 환호는 명백하게 상처받은 사람으로서의 감정이었다. 난민 문제에 적대적인 한국 사회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사람들의 마음이 자국 중심주의로 흐른다는 것도 잘 알았다. 인터넷에서의 글쓰기란 것이 얼마나 극단적인 언어를 파괴적으로 사용하는지도 잘 알았다. 그럼에도 난민에 대한 인터넷 댓글을 읽는 것은 인간성과 존엄이 훼손되고 파괴되는 경험이었다. 오찬호 선생의 글은 난민의 곁에 있으려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환멸’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대변하는 글이었다.

그 친구는 그 환멸의 감정이 만들어지고 표현되고 사라지는 곳에서 아프간 난민의 자리는 어디였는지를 물었다. 과연 난민의 자리는 있는가. 인터넷 댓글을 읽으며 느낀 환멸은 당연히 이 사회가 가진 지독한 이주민 혐오와 자국 중심주의가 만드는 뺄셈의 정치에 기인한다. 말은 자국 중심주의라고 하지만 ‘자국’을 내세우는 이 뺄셈의 정치가 사실은 끊임없이 지원해야 하는 사람들(약자)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며 ‘자국민’에서 빼버린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이를테면 “난민에게 쓸 돈이 있으면 자국민에게 써라”는 말은 그 대상이 자국민이 되면 “HIV/AIDS 감염인에게 쓸 세금이 있으면 더 가난한 사람에게 써라”는 말로, 그리고 그 말은 다시 “일하지 않고 빈둥빈둥 노는 빈민에게 지원하느니 일한다고 고생하는 자영업자들을 지원하라”는 말이 되고 다시 그 말은 “자기 살자고 하는 자영업자를 왜 지원하냐. 그 돈이 있으면 나한테 줘라”는 말로 귀결된다. ‘사회’라는 것을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연대’라는 말이 들어설 여지가 하나도 없는 이 뺄셈의 정치에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2018년 6월 예멘 난민들이 구직 신청을 하려고 대기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2018년 6월 예멘 난민들이 구직 신청을 하려고 대기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난민이여, 더 좋은 텐트는 없다

따라서 오찬호 선생의 글을 통해 표출된 내 감정은 나에게 상처를 준 이 ‘사회를 파괴하는 자들’에게 돌려주는 말이었고 그들로부터 받은 모욕을 갚는 데서 오는 통쾌함이었다. 문제는 이 통쾌함을 느낄 때 ‘인간적’인 내가 대면하는 것은 난민이 아니라 ‘비인간적’인 한국 사회라는 점이다. 난민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오직 환멸감에 상처받은 나와 그런 나에게 상처를 준 한국 사회만 남는다.

여기에 그 친구가 던졌던 질문이 의미를 갖는다. 난민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두 시선, 그 두 시선의 부딪침 속에 난민의 자리는 있는가? 혹여 자리가 있다면 이 시선이 부딪치는 자리에서 난민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난민이 하는 말은 누구에게 들리기는 하는가? 만일 여기서 난민은 할 수 있는 말이 없고, 말해봤자 들리지도 않는다면 난민에 대한 비인간적/파괴적 말에 상처받은 ‘인간적’인 나는 어느 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듣고 있는가?

이즈음 한국도 ‘지옥’이라는 또 하나의 글을 읽었다. 시리아인 압둘 와합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쓴 글이다. ‘시리아 난민이 아프간 난민에게 보내는 메시지’라는 제목의 이 글은 먼저 난민으로 살아가는 그가 이제 난민이 된 그들에게 이곳의 진실을 알려주며 어떤 각오로 살아야 하는지 말한다. “정치인의 대상”이 될 것이며 무엇보다 난민캠프에 학교와 보건소가 지어지는 것을 기뻐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더 좋은 텐트는 없다면서 더 좋은 천막을 구하지 말고 친선대사와 사진을 찍지 말라고 충고한다.

압둘 와합의 글을 읽을 때 나는 부끄러워진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곳이 내 자리가 된다. 이 자리는 다른 한국인에게 상처받는 것이 강조되는 자리가 아니다. 내가 내상을 받는 두 번째 사건, 그 두 번째 사건에서 난민이 발생하며 만들어진 그들의 곁이라는 첫 번째 자리로 돌아온다. 압둘 와합의 글을 읽을 때 나는 ‘상처받은 자’가 아니라 고통받는 이의 얼굴을 바라봐야 하는 고통의 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내가 내상을 입은 두 번째 사건에 의해 만들어진 자리를 부정함이 없이 말이다.)

따뜻하게 난민을 환대하자는 말이나, 여기는 우리 땅이니 낯선 존재인 너는 이곳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는 차가운 말이나 둘 다 저곳은 지옥이고 이곳은 아니라고 전제할 때 나오는 말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난민의 입장에서 볼 때 과연 이곳은 안전한 삶의 터전인가.(물론 여기가 저기와 ‘같은’ 지옥이라고 과장해서도 안 되지만 말이다.) 여기는 과연 난민이 신발을 벗고 자도 안심할 수 있는 안전한 곳인가?

근본적인 상처를 받는 연대자들

선뜻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저 멀리 중동이나 아프리카에서 온 난민이 아니라 탈북자들의 경험이 이것을 잘 이야기한다. 탈북 뒤 손에 쥐어진 얼마 안 되는 돈을 사기당하고, 노동 착취를 당하고, 인간관계에서 배신당하는 숱한 이야기가 있다. 급기야 도로 돌아가겠다고 나서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국인에게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땅이 ‘이방인’에게 우호적일 리 없다.

그렇기에 여기가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것, 특히 이방인에게 적대적인 곳이라는 점을 말하는 건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건 필요한 일이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연대하는 자들이 상처받는 두 번째 사건이 벌어진다. 따라서 이들이 누구로부터 어떻게 상처받는지 드러내는 것도 필요하다. 두 개의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난민의 상처가 더 크고 깊다고 해서 그들과 함께하는 이들이 입는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 앞에서 ‘침묵돼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시선이야말로 난민을 타자화하는 시선일 것이다.

두 개의 사건이 있다. 이곳의 냉혹함 때문에 두 개의 사건이 발생한다. 첫 번째 사건은 난민이 겪는 고통의 곁이 내 자리라는 것이고 두 번째 사건에서는 그들 곁에서 내가 겪는 고통이다. 문제는 여기서 고통이 곁에 머물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통의 곁에서 ‘연대’하는 자이지만 환멸을 느낄 정도가 되면 내 상처와 고통, 그 고통이 내가 선 자리인 ‘곁’을 압도한다. 그 결과 ‘고통의 곁’은 ‘곁의 고통’이 되고 그것이 앞에 나서게 되면 곁을 밀쳐낸다. 두 번째 자리만 남고 첫 번째는 사라진다.

이것이 고통의 가장 큰 특징이다. 고통은 그것이 당사자의 고통이건, 곁의 고통이건 그 자체로 절대적이다. 내가 입는 상처는 다른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대신할 수 없으며 고통을 느끼는 그 시간만큼은 내 존재 전체를 장악한다. 그렇기에 고통의 곁을 지키려 하지만 그 곁에서 내가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면 곁의 자리는 사라지고 내가 고통의 당사자가 된다. 곁을 지키는 숱한 사람이 비일비재하게 겪는 일이다.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을 밀어내고 내가 그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이 돼버린다. 무엇보다 고통의 곁을 지키는 이들이 경계해야 하는 일이다.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일

고통의 곁에 함께하는 일은 당연히 상처받는 일이다. 고통의 당사자와는 전혀 다른 내상을 입는 두 번째 사건이 발생한다. 이 구별되는 사건에서 그 상처가 결코 첫 번째 사건의 당사자가 받는 고통보다 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백하자면 사실 더 근본적인 상처일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상처는 인간됨(Humanity)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는 것이며 존엄이라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가치를 잃어버리는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이후 남는 것은 인간에 대한 냉소와 환멸밖에 없다. 이 내상을 입은 이들에게 평생을 인간됨에 대해 환멸을 느끼며 사는 것만큼 삶에 대한 모멸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겸손하게’ 고통의 자리를 난민에게 내주고 내 고통은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두 개의 사건이 있을 때 그 두 사건이 서로를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곁이라는 자리는 한쪽을 억압하는 쪽으로 미끄러지기 참 쉽다. 고통의 곁을 지키는 과정에서 오는 상처는 내 자리를 망각하게 한다. 그 망각은 첫 번째 고통의 당사자 자리도 치워버린다. 반대의 경우도 많다. 그렇기에 고통의 곁을 지키면서 상처받는 사람의 자리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 내 고통을 무시하지도, 그렇다고 그 고통에 매몰되지도 않으면서, 즉 ‘곁의 고통’을 억누르지 않으면서 동시에 ‘고통의 곁’이라는 자리를 지키는 것 말이다. 그것이 지금 자리가 없어진 난민들에게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일이며 그것이 ‘곁’의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난민의 곁에 서려는 이들이 환멸에 먹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쩌면 저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난민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난민 곁에 서려는 이들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세상과 인간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것, 그거야말로 저들이 가장 바라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것은 저 환멸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난민이 마주할 ‘환멸’과 그에 대한 염려를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상처받은 자들’의 연대를 향해서 말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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