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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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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만에 개방된 왕의 소나무숲 [대관령 숲길]

대관령 소나무숲과 국립 대관령 치유의숲
등록 2021-05-08 16:49 수정 2021-05-20 04:36
단단한 껍질에 둘러싸여 검푸른 자태를 뽐내며 우뚝 솟아 있는 대관령 소나무숲의 황장목.

단단한 껍질에 둘러싸여 검푸른 자태를 뽐내며 우뚝 솟아 있는 대관령 소나무숲의 황장목.

코로나19 이후 자연 보전과 향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자연을 보전함으로써 누리고, 자연을 누림으로써 보전할 동기와 역량을 얻는 생태여행지에 다녀왔다. ‘생태여행’(생태관광)은 1990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개념으로, 국제생태관광협회(TIES)는 ‘자연으로 떠나는 책임 있는 여행’ ‘환경을 보전하고 지역주민 삶의 질을 보장하며 해설과 교육을 수반하는 여행’으로 정의한다.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북면 일대 산림보호구역에 있는 ‘금강소나무 숲길’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생태여행지다. 지역공동체는 자연을 보전하려고 가이드 동반 예약 탐방제를 도입했고, 여행자는 잘 보전된 자연을 누리고 알아가며, 주민들은 숲길 탐방 운영과 안내에 핵심 역할을 한다. 국내에서 이런 특징을 두루 갖춘 여행지를 찾기는 쉽지 않다. 당장 여행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용히 걷고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뿐. 지난 십수 년간 우후죽순 늘어난 걷기여행 길의 현실을 짚으며, 자연과 문화·역사 속에 파묻히기 좋은 길 10곳도 함께 소개한다._편집자주

나는 소나무숲으로 들어갔고, 소나무숲은 내 안으로 들어왔다. 한 아름을 훌쩍 넘는 소나무를 품고 있는 흙은 푹신했다. 울창한 소나무와 사이사이의 활엽수가 하늘의 푸르름을 자신들의 푸르름으로 덮고 있었다. 솔향기는 맑았고, 내 머리도 맑혔다. 20m 넘는 키의 쭉쭉 뻗은 소나무들 모습에 눈이 시원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얼굴 일부가 돼버린 마스크를 잠시 내리자 코와 입으로 솔숲의 청신한 기운이 훅 하고 들어왔다. 그렇게 나는 ‘숲며들었다’.

대관령 12개 숲길 가운데 하나

4월24일 찾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어흘리에 있는 대관령 소나무숲은 이방인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 숲은 1922~1928년 소나무 씨앗을 직접 뿌리는 ‘직파조림’ 방식으로 조성됐다. 현재 총면적은 4㎢로 축구장 571개 규모다. 1988년 문화재 복원용 목재생산림으로 지정됐고, 2000년에는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22세기를 위해 보존할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됐다. 2017년에는 경북 울진 금강소나무숲, 충북 단양 죽령옛길(낙엽송·잣나무) 등과 함께 산림청에서 지정한 ‘경영·경관형 10대 명품숲’에 선정됐다.

대관령 소나무숲길은 대관령 옛길, 선자령 순환등산로, 백두대간 마루금, 국민의숲 트레킹 코스 등 길이와 소요 시간, 난이도가 다양한 대관령 일대 12개 숲길 가운데 하나다. 2021년 5월1일 이 12개 노선, ‘대관령숲길’ 102.96㎞ 전 구간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국가숲길’로 지정됐다. 국가숲길은 ‘산림 문화·휴양에 관한 법률’에 따라 산림·생태적,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아 국가의 체계적인 운영·관리가 필요한 곳을, 산림청 심의를 거쳐 지정하는 숲길이다. 이번에 지리산둘레길, 백두대간트레일, DMZ펀치볼둘레길도 함께 지정됐다. 소나무숲길의 전체 거리는 6.3㎞다. 걷는 데 2시간30분~3시간 정도 걸린다. 난이도는 어렵지 않은 편이다. 2018년 일반에 개방됐다. 조성된 지 약 100년 만에 탐방객을 맞은 소나무숲은 사람 발길이 본격적으로 닿은 지 3년밖에 되지 않은 비교적 새로운 숲길이다.

대관령 소나무숲길 어귀에 있는 삼포암 폭포.

대관령 소나무숲길 어귀에 있는 삼포암 폭포.

삼포암 주차장(어흘리 주차장 인근)에 있는 입구를 통해 소나무숲으로 들어섰다. 이내 삼포암 폭포가 나타났다.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면 하나씩 등장하는 아담한 규모의 폭포 세 개가 경쾌하게 물줄기를 쏟아냈다. 백두대간 선자령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이곳을 거쳐 강릉 남대천으로 흐르고, 안목해변을 지나 동해로 들어가 바닷물이 된다. 삼포암 옆에는 붉은색 병꽃나무 꽃이 봄날 제철을 맞아 만개했다. 깔때기 확성기 모양의 꽃잎이 온몸이 빨개지도록 바다를 향해 가는 작은 폭포수를 열렬히 응원하는 듯했다.

경사진 숲길을 좀더 올라가니 ‘솔숲교’라 이름 붙은 나무 다리와 계단이 나왔다. 계단을 오르면 마침내 소나무숲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숲길을 안내해준 숲길등산지도사 정석준(59)씨는 “이 나무들은 한국 고유의 소나무인 황장목”이라고 소개했다. 황장목은 단단하고 우수한 재질을 인정받아 조선 시대에 궁궐과 사찰의 건축자재로 쓰였고, 왕의 관(棺)을 만들 때도 사용됐다. 100년의 세월을 견딘 커다란 소나무들은 위풍당당했다. 소나무들은 갑주(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듯, 검푸른 색의 두꺼운 껍질로 둘러싸여 있다.

좀더 걸으니, 붉은빛을 띠는 소나무들도 눈에 들어왔다. 붉은 소나무의 밑동은 검푸른 소나무와 마찬가지로 굵은 껍질로 둘러싸였지만, 2m 정도 위부터는 껍질이 얇아지며 붉은색을 띠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적황색인 심재부(나무 중심의 단단한 부분)가 크게 발달하는 황장목은 수피(나무 표면)가 붉은색을 띤다고 한다.

대관령 소나무숲길에 우뚝 솟아 있는 황장목들.

대관령 소나무숲길에 우뚝 솟아 있는 황장목들.

빽빽한 황장목 사이로 활엽수도 함께 서 있었다. 사람의 울퉁불퉁한 근육과 닮았다는 서어나무, 과거엔 창 자루, 요즘엔 야구방망이를 만드는 데 쓰이는 단단한 물푸레나무를 비롯해 소태나무, 단풍나무, 생강나무, 쪽동백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등의 활엽수가 이웃해 있다. 수종이 다양해 눈앞에 펼쳐진 솔숲 풍경은 검푸른 배경에 붉은빛과 연둣빛을 수놓은 듯했다.

이날 성산면 기온이 섭씨 16도 정도로 선선했지만 걷는 내내 등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 소나무숲길은 ‘숲길’이라는 명칭이 주는 느긋함에 빠지면 다소 버거운 길이 된다. 대관령은 고개가 험해서 다닐 때 ‘대굴대굴 크게 구르는 고개’라는 뜻의 ‘대굴령’에서 음을 빌려 ‘대관령’이 됐다고 한다. ‘대굴령’의 한 자락답게 소나무숲길은 ‘도둑재’를 포함해 가파른 경사로가 종종 나타나 느긋하게 산책하듯 다닐 수만은 없는 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내 이 길을 숲길이 아니라 ‘등산길’이라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러자 등산길이라는 말에 담긴 긴장감 덕분인지 걷는 길이 한결 수월해지는 것 같았다.

숲길에 들어선 지 1시간40분 만에 소나무숲길의 정상에 해당하는 전망대에 다다랐다. 소나무 사이로 솔내음 품은 바람이 상쾌하게 불어왔다. 전망대에서 저 멀리 올망졸망하게 자리한 강릉 시내를 굽어봤다. 전망대 옆에는 ‘대통령 쉼터’가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인 2007년 4월28일 이곳에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장소다. 노 전 대통령이 권양숙 여사와 함께 벤치에 앉아 쉬는 사진이 담긴 팻말이 우뚝 솟은 소나무 옆에 세워져 있다.

대관령 소나무숲길.

대관령 소나무숲길.

소나무숲은 고요했다. 토요일인데도 자연휴양림 주차장으로 내려올 때까지 3시간 동안 걷는 내내 마주친 사람이 10명 남짓이었다. 김정란 대관령 숲길안내센터장은 “소나무숲이 일반에 개방된 지 3년밖에 안 돼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데다, 그나마 코로나19로 인해 방문객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숲의 고요함은 고고하게 서 있는 소나무와 썩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탐방객이 많지 않고 3시간 정도의 ‘무박’ 코스여서 그런지 여느 산길에서 눈에 띄곤 하는 쓰레기는 보이지 않았다. 반면 유명한 비박(지형지물을 이용해 하룻밤을 지내는 일) 장소로 알려진 선자령 정상 인근에는 음식물 포장재와 휴지 등 온갖 쓰레기가 넘쳐난다고 한다. 정석준씨는 “쓰레기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자연에 그대로 버리고 가는 사람이 많아, 모두가 함께 향유하는 자연이 훼손되는 것이 문제”라고 꼬집었다.

치유의숲, 접근성 좋은 다양한 코스

소나무숲길을 걷기에 앞서 이날 오전, 인근에 있는 ‘국립 대관령 치유의숲’을 가족과 함께 방문했다. 2016년 조성된 치유의숲은 “면역력과 건강 증진을 위해 향기, 경관 등 산림의 다양한 치유 인자를 활용할 수 있도록 조성한 숲”(강릉시 설명)이다. 이 숲에는 ‘치유데크로드’ ‘숲속쉼터’ ‘솔향기터’ ‘물소리숲길’ 등 다양한 코스가 마련됐다. 각 코스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숲 곳곳에 평상이 설치돼 산책하며 쉴 수 있는 공간이 넉넉하다.

숲속엔 소나무와 단풍나무 사이에 연분홍 철쭉이 피어 있었다. 바닥에는 철쭉보다 먼저 피고 바람을 따라간 산벚나무의 꽃송이가 눈송이처럼 깔려 있다. 한바탕 흩날렸을 꽃보라 때를 놓친 것을 벚꽃을 좋아하는 우리 가족은 아쉬워했다.(다만, 치유의숲에 산벚나무 수는 많지 않다고 한다.)

‘국립 대관령 치유의숲’에서 우리 가족이 건식 반식욕을 하고 있다.

‘국립 대관령 치유의숲’에서 우리 가족이 건식 반식욕을 하고 있다.

우리 가족은 치유의숲에서 제공하는 맛보기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안구를 정화해주는 숲 풍경을 바라보며 건식 반식욕을 했다. 치유의숲과 어흘리 마을 주민들이 함께 개발했다는 솔방울차도 마셨다. 기운이 충전되는 느낌이었다. 새 힘을 얻은 우리 가족은 숲길 산책에 나섰다. 통증이 있는 아내는 “매일 이곳에 오면 정말 힐링이 될 것 같다”며 치유의숲의 초록빛 풍경과 맑은 계곡물 소리, 지저귀는 새 소리를 두루 동영상에 담았다. 평소 오래 걷기 힘드신 70대 어머니도 ‘치유데크로드’를 걸으며 “이렇게 깊은 산속 같은 공기와 풍경, 소리를 경험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계단이 없고 데크(자연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설치한 구조물)가 설치돼 있고, 벤치가 많아 나 같은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준 점이 참 좋다”고 기뻐하셨다. 초등학교 1학년 딸도 기분이 좋은지 깡충깡충 뛰었다.

강릉=글·사진 김규남 기자 3string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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