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함께 살던 어머니가 코로나19에 감염되면서 자가격리 생활을 시작한 진현씨가 바라본 집 밖 풍경. 진현 제공](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720/960/imgdb/original/2020/1221/9916085517358755.jpg)
2020년 8월 함께 살던 어머니가 코로나19에 감염되면서 자가격리 생활을 시작한 진현씨가 바라본 집 밖 풍경. 진현 제공
그럼에도 고개 숙이고 눈물만 흘린 2020년은 아니었다. 우리 삶을 더 높고 밝은 곳으로 밀어올리기 위한 싸움 또한 지속됐다. 장애나 성적 지향, 정치 성향, 종교 등을 이유로 한 어떤 차별도 허용하지 말자며 ‘차별금지법’을,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하자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도입하려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여성을 무자비한 착취 대상으로 삼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범인들을 사법의 심판대에 올렸다.
고난과 희망이 교차한 2020년, <한겨레21> 독자에게 생생한 정보를 전한 취재원과 필자 19명이 ‘올해의 하루’를 일기 형식으로 보내왔다. _편집자주
8월25일 화요일 오전 9시께,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함께 사는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코로나19 양성이래. 너도 밀접 접촉자라 보건소에서 연락이 갈 거래.”
순간 아찔했다. 설마설마한 일이 현실이 되리라곤 짐작조차 못했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엄마가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8월21일 금요일 저녁부터 엄마는 감기몸살이 난 것 같다고 했다. 며칠 전부터 확진자가 다시 증가하던 터라 진단 검사를 받아볼 것을 권했지만, 엄마는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거라며 검사를 망설였다. 8월24일 월요일 아침, 엄마는 평소 다니던 내과 의원에 방문했다. 의사는 그동안의 증상과 동선을 물은 뒤 도보로 이동 가능한 인근 대형병원 선별진료소로 가라고 했다. 그러나 해당 선별진료소에선 당일 검사가 불가능했다. 하루에 할 수 있는 검사 인원이 모두 찼다는 것이다.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보건소로 이동해 검사받았다. 월요일 퇴근 뒤 엄마가 낮에 검사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만일을 대비해야 했다.
말레이시아에서 거주하던 나는 코로나19 확산이 심각해지면서 2020년 3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 직장에 취업한 건 2020년 8월. 엄마가 확진될 경우 출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직장에 사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자가격리에 들어가면 그 기간에 일해야겠다고 생각해 사무실에 있는 노트북을 가져오고자 불안감을 안고 8월25일 출근했다. 엄마와 통화가 끝난 뒤 내가 가야 할 보건소에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 그리고 곧바로 회사에 가족의 감염 사실을 알리고 짐을 챙겨 사무실을 나왔다. 그 찰나에 지난 주말 방문한 쇼핑몰과 가게, 같이 시간을 보낸 친구들, 전날 같이 식사한 대표님과 임신부 동료가 떠올랐다. 나보단 내가 만났던 사람들 걱정이 앞섰다. 회사에서 나온 뒤 누구와도 어디에도 닿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검사받으러 오실 때 대중교통은 타지 말고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걸어서 이동하세요.”
보건소 안내를 따르는 일은 험난했다.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는데, 회사에서 보건소까진 대중교통으로 1시간 거리라 걸어갈 수가 없었다. 더구나 회사 노트북과 개인 노트북 두 개를 양쪽 어깨에 둘러멘 상태였다. 당시 나는 어깨 인대가 늘어나 치료받고 있었다. 난처해하는 내게 보건소 직원은 자가격리 중인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택시를 일러주었다. 해당 택시와 어렵게 전화 연결이 됐지만 배차까지 1시간 넘게 걸린다고 했다. 벤치에 앉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발만 동동 구르다 일반 택시를 잡았다. 택시에 피해가 갈까봐 마스크를 두 겹으로 끼고, 옷으로 손을 감싼 뒤 차 문을 여닫았다. 숨 쉬는 것도 미안한 순간이었다.
![진현씨 어머니가 생활치료센터에서 받은 물품들. 진현 제공](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960/720/imgdb/original/2020/1221/3416085517358088.jpg)
진현씨 어머니가 생활치료센터에서 받은 물품들. 진현 제공
보건소 건물 뒤 주차장엔 검사받으려는 대기줄이 있었다. 다른 대기자와 일정 거리를 두고 서서 방호복을 입은 분들에게 증상과 방문 이유, 접촉 경로 등을 말했다. 직원들의 친절한 말투가 고마웠다. 대기줄 끝에 있는 컨테이너 부스 안으로 들어가 검사받았다. 긴 면봉이 코와 입 깊숙이 들어왔다. 살짝 건드리는 느낌으로 조금 불편할 뿐, 생각보다 아프진 않았다. 검사가 끝나자 의료진은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말 것을 재차 당부했다. 무더운 여름날 무거운 짐을 들고 점심도 먹지 못한 채 한 시간 반쯤 꼬박 걸어 집으로 갔다.
“확진자가 많아 어머니는 며칠 집에서 기다리셔야 해요. 어머니와 사용하는 모든 생활 공간을 분리하세요.” 집으로 가는 길에 보건소에 전화해 생활 지침을 물었다. 그전까지 나는 코로나19에 걸리면 생활 지침이 빠르게 전달되고, 환자는 곧바로 병원에 입원하는 줄로만 알았다. 엄마는 66살이었지만 젊은 편이고 경증이었다. 확진자가 많은 상황이라 병상은 중증 환자에게 배정됐고, 엄마는 생활치료센터로 가야 하지만 그마저도 자리가 없어 2~3일 대기해야 한다고 했다. 나까지 감염되는 걸 예방하기 위해 화장실과 주방, 엄마와 함께 생활하던 침실까지 집 안 모든 공간을 분리해야 했다. 10평 남짓의 아파트에서 모든 공간을 따로 사용하는 건 어려웠다. 비용이 들어도 내가 따로 머물 공간이 없냐고 문의했지만 그런 곳은 우선 국외에서 온 격리자에게 배정된다고 했다.
오후 2시쯤 집에 도착하자마자 엄마 몸 상태부터 확인했다.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던 엄마는 열이 나고 어지러워 앉아 있는 것이 힘들다 했다. 소화가 안 되고 맛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며 한숨을 쉬셨다. 아픈 엄마를 안아주지도, 손잡아줄 수도 없다. 마스크를 쓴 채 2m쯤 떨어져 이야기를 나눈 뒤 옷방으로 사용하던 작은방에 들어갔다. 화장대와 옷가지가 가득해 발도 다 뻗지 못할 작은 공간이었다. 산 지 10년쯤 돼 바람도 잘 나오지 않는 선풍기 전원을 켰다. 혹시 내게 바이러스가 있다면 이웃에 폐가 될까봐 복도 쪽 창문을 여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더위를 잘 참는 편이지만 한여름 꽉 막힌 작은방에서 마스크도 벗지 않고 있으려니 땀이 멈추지 않았다. 눈물마저 핑 돌았지만 울 틈도 없었다.
발 뻗을 만큼만 방을 정리한 뒤 보건소에서 일러준 대로 락스와 각종 세제로 온 집안을 소독했다. 엄마가 화장실을 사용한 뒤엔 화장실도 소독해야 했다. 한집에서 두 명이 따로 생활하는 데 필요한 생필품과 주방을 사용하지 않고도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음식을 주문했다. 쓰레기 배출량이 많은 인터넷 쇼핑은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엄마가 생활치료센터에서 사용할 물건이나 먹을거리도 준비해야 했다. 센터 생활 안내가 생각만큼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아 코로나19를 경험한 사람들이 인터넷 블로그와 유튜브에 올린 정보를 참고했다.
![진현씨가 주민센터로부터 받은 자가격리 안내 문자. 진현 제공](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750/695/imgdb/original/2020/1221/8716085517359097.jpg)
진현씨가 주민센터로부터 받은 자가격리 안내 문자. 진현 제공
늦은 점심으로 엄마를 위해 죽을 주문했다. 음식을 전달한 뒤 다시 작은 방에 들어서자 눌러둔 감정이 올라왔다. 방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을 만큼 작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지난 주말에 만난 사람들과 가까운 지인들에게 이 상황을 알렸다. 나로 인해 누군가도 전염을 걱정하는 것이 미안했고, 나중에 우리 가족과 만나는 걸 꺼릴까봐 두려웠다. 이런 걱정과 달리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해주겠다며 위로를 건넸다. 격리 기간에 먹으라며 과일과 영양제를 보내주기도 했다. 너무나 고마웠다. 그러나 가족의 감염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여전히 부담스러웠고, 고마운 사람들도 한동안은 만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서글퍼졌다.
그러다 어려운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는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더라도 남은 가족이 살아갈 수 있도록 유서를 써두었다고 했다. 맞다. 지금 이 일이 나의 마지막으로 연결되지 않을지라도 내 생의 마지막은 예상하지 못한 때에 갑자기 올 수도 있다. 노트북을 열어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음 정리가 됐고 현실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노래를 들으며 일하기 시작했다. 힘내자, 힘내야지. 코로나19와 함께 격정적이었던 하루가 이렇게 저물었다.
8월26일 오전, 내 검사 결과는 다행히 ‘음성’이었다. 엄마도 생각보다 빨리 집 근처 생활치료센터 입소가 결정됐다. 집을 나서 구급차에 타는 엄마 모습을 베란다 너머로 지켜보는데 수군대는 동네 사람들 말이 들렸다. “확진자인가봐.” 3시간 뒤 엄마는 구급차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행정 처리에 오류가 있었다고 했다. 엄마가 나간 뒤 온 집을 소독했는데…. 그렇게 하루가 지난 뒤 엄마는 집에서 한참 먼 서울 노원구 생활치료센터로 이동했다.
엄마가 센터에 들어간 날부터 14일 동안 자가격리를 해야 했기에, 출근한 지 3주 된 직장에 양해를 구하고 거의 3주간 자가격리 생활을 했다. 엄마는 빠르게 회복해 입소 9일 만인 9월4일 집으로 돌아왔다. 감사하게도 컨디션이 조금 저하되고 혈압이 약간 높아진 것 외에 큰 후유증은 없었다. 자가격리 기간 현관문을 가득 채울 만큼 쓰레기가 쌓였다. 어쩌면 코로나19는 자연이 살고자 자신을 정화하기 위해 만든 바이러스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인간은 다시 자연에 더 많은 쓰레기를 안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끝없는 환경오염이 다음에 어떤 재앙을 만들어낼지 두려운 마음으로 쓰레기를 치웠다.
지금도 아프면 집에서 엄마와 거리두기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코로나19는 여전히, 오히려 더 가까이 우리 집에 남아 있다. 12월13일 하루 신규 확진자가 1천 명이 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전날부터 두통이 생긴 나는 수시로 체온을 재며, 집에서도 마스크를 끼고 엄마와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엄마도 8월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연신 한숨을 쉬며 괜찮다는 말을 반복한다. 우리 가족과 같은, 혹은 더 심각한 상황에 부닥친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내가 받은 따듯한 위로와 응원을 그분들에게도 보내고 싶다. 우리 모두의 일상이 회복되는 그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진현 직장인
*2020년 12월17일 기준 국내 코로나19 누적 확진자 수는 4만6453명입니다. 그들과 그 가족이 겪은 치료·격리의 경험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글을 진현씨가 보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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