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 대해 잘 모르는 다른 반 친구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친구들끼리 수다가 으레 그렇듯 대화는 종잡을 수 없이 흘렀다. ‘존엄사’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허용된 범위의 존엄사. 존엄사를 선택하는 이유. 주로 삶에 대한 희망이 없거나 더는 살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하는 거겠지. 한 친구가 말했다. “나는 큰 병에 걸리면 힘들게 치료받으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을 것 같아.” 헉, 그렇구나.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크다면 큰 병을 안고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 친구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잘 모르니까. 불과 지난해 8월까지는 나도 ‘큰 병’ 하면 말기암을 생각했고, ‘난치병’ 하면 백혈병을 떠올렸다. 내가 어디 심각하게 아픈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할 때도 저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본 TV 프로나 웹툰, 소설 등에서 ‘병’ 하면 가장 흔하게 쓰이던 소재였기 때문이다. 세상엔 수많은 병이 있고, 큰 병을 앓는다고 반드시 일상을 영위하지 못하는 건 아니며, 치료제를 찾을 길 없는 희귀난치병에 걸렸다고 365일 매일 24시간 동안 절망의 쓴맛만 느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1년 전 나처럼 생각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그 친구는 내가 큰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았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몰랐던 사람이 실수하는 것에 상처받을 필요는 없다. 실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알고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지난해 병을 진단받은 직후, 왜 이렇게 오랫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냐고 가볍게 묻는 아이가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철이었기에 특목고나 예술고를 지원하는 친구들의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다. 아마 입원하느라 장기간 결석한 나에 대해서도 비슷한 맥락으로 유추했을 것이다. 간단히 알려줬다. 내가 희귀난치병에 걸려 입원해야 했다고. 그 친구 입에서 나온 말은, “뭐? 그럼 네 인생 망했네?”였다. 아직도 그 장난스러운 어투와 올라간 입꼬리, 태도의 가벼움이 뚜렷하게 기억난다. 나는 앞뒤 생각할 겨를 없이 그 친구의 정강이를 발로 찼고(!), 키가 큰 그 친구가 정강이를 감싸쥐느라 허리를 숙이자 눈높이로 내려온 멱살을 잡고 할 수 있는 온갖 욕을 퍼부었다. 저속하고 폭력적이게 대응함으로써 같은 사람이 된 것 아니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속은 시원했다. 그 친구의 행동은 무엇보다 망하지 않았고 포기할 이유도 없는 내 인생에 대한 큰 무례였기 때문이다.
내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그 친구가 병이 아니라 다른 것-예를 들어 시험을 망친 일-이 내 인생을 망쳤다고 말했더라면, 그냥 웃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가 내 병 때문에 내 인생이 망했다고 말한 순간 이 말을 용납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는 말을 들을 때도 ‘내가 한 줄기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할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건가? 그 정도로 심각하고 불행한 상황인가? 그렇게 느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묘해지는데, 멋대로 내 운명을, 그것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판단해버리다니.
남의 인생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건, 아무리 긍정적 방향이라도 조심해야 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상황을 모르고 말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가볍게 입에 올리는 태도는 나에겐 투쟁의 대상이다. 누구든 내 인생을 함부로 판단하면 자신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소리를 했는지 알려줄 생각이다.
신채윤 고1 학생
*‘노랑클로버’는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고 있는 학생의 투병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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