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고개 숙이고 눈물만 흘린 2020년은 아니었다. 우리 삶을 더 높고 밝은 곳으로 밀어올리기 위한 싸움 또한 지속됐다. 장애나 성적 지향, 정치 성향, 종교 등을 이유로 한 어떤 차별도 허용하지 말자며 ‘차별금지법’을,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하자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도입하려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여성을 무자비한 착취 대상으로 삼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범인들을 사법의 심판대에 올렸다.
고난과 희망이 교차한 2020년, <한겨레21> 독자에게 생생한 정보를 전한 취재원과 필자 19명이 ‘올해의 하루’를 일기 형식으로 보내왔다. _편집자주
오늘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코로나19가 퍼지기 전에는 정규직 전환의 꿈을 품고 그렇게 기다린 날인데… 운이 없었다고, 내 운명이었다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오늘은 영종도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2년 동안 살았던 자취방 물건을 치우자니 그동안 겪은 일이 스쳐 지나간다. 2018년 항공정비사의 꿈을 안고 인천공항에 들어섰다. 10년 가까이 항공정비사를 꿈꿔온 나였다. 대학에서 항공정비를 전공했고, 군대도 공군 정비병으로 다녀왔다. 계약직으로 지상조업 업무를 2년간 하면 마침내 정규직이 되어 항공정비사가 될 수 있었다. 그해 처음 영종도에서 맞은 여름은 여느 때보다 더 덥고, 뜨거웠다. 기록적인 폭염이라거나 항공기가 내뿜는 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꿈을 향해 내딛는 내 열정도 한몫했다.
2019년 말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가 퍼졌고 항공 승객이 줄자마자 회사에서 내민 것은 무급휴가 동의서다. 회사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동의서에 서명했다. 그때만 해도 금방 다시 일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점점 확산했다.
정규직 전환을 보류한다는 통보는 전자우편으로 왔다. 같이 근무하던 사람들이 술렁였다. 사정도 해보고, 상생할 방법도 물었다. 회사는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 했다.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아지길 기도했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계약기간 만료까지는 꽤 남았으니까 돌아갈 방법이 생길 거라고 믿으려 했다. 한 달, 두 달… 코로나19는 절망적인 상황으로 치달았다. 희망도 꺼져가는 촛불처럼 사그라들었다. 10년을 준비한 꿈이 무너지고 있었다. 누구를 원망해야 할까? 무엇을 잘못했을까?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모든 일이 악몽이길 바랐다. 그렇게 오늘, 근로계약 만료일이 왔다.
비어지는 집을 보며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형, 동생이라 부르며 함께 지냈던 입사 동기들이다. 같이 모여 음식을 시켜 먹고 떠들었던 이 방에 물건이 사라지니 낯설다. 정규직 전환이 미뤄졌다는 통보를 받은 날도 여기서 같이 화내고 위로했는데. 정규직 전환을 몇 달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겪은 억울함을 잘 아는 이들, 꿈이 얼마나 컸는지도 잘 아는 이들이니까. 그들도 나와 같은 처지,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짐을 다 정리하고 내가 살았던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2년 동안 따뜻한 보금자리가 돼주었고 좋은 추억을 만들어준 동네라 눈에 담고 싶었다. 우리 동네, 넙디마을은 공항에 상주하는 직원들로 늘 붐볐다.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사회 초년생이 살기 좋은 곳이었다. 북적이던 동네가 유령도시처럼 조용하다. 차가 빽빽하던 주차장은 한산했다. 그 많던 사람, 자동차는 어디로 갔을까. 그들도 나처럼 멋진 인생을 꿈꿨으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아쉬운 마음에 발걸음은 공항으로 향했다. 여행객이 되지 않으면 다시 못 갈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항공기 이착륙 소리는 예전보다 확연하게 줄었다. 탑승구와 항공기를 잇던 여객 터미널의 브리지(탑승교)가 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항공기들은 이물질 유입을 막기 위해 몸체 곳곳에 빨간 마개를 둘렀다. 한산함이 낯설기만 했다.
나는 여기서 항공기에 수화물을 싣거나 내리는 일을 했다. 비행기를 택싱라인(활주로 선)까지 끌어오는 일도 했다. 많을 때는 10명 이상이 달라붙어 항공기 한 대에 수화물을 채운다. 공항은 특수목적 사업장에 속해 일반적인 직장보다 장시간 근무를 하는 때도 잦았다. 길 때는 18시간, 짧을 때는 9시간씩 일했다.
힘들기는 했어도 좋은 기억이 많다. 항공기 브리지를 떼기 전 창가에 앉은 어린 승객이 보이면 손을 크게 흔들었다. 첫 해외여행일지 모를 아이들의 설렘에 함께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들뜬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단함이 잊혔다.
오후 3시께 공항을 나와 서울로 출발했다. 인천대교 톨게이트(요금소)를 지나는데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고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수없이 오간 인천대교 톨게이트인데 공항 직원으로 지나갈 일은 없겠구나. 톨게이트를 통과하는 게 내 꿈에 마침표를 찍는 일 같았다.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슬펐다. 울면서도 ‘이제 뭘 해서 먹고살까’ 생각했다. 꿈을 잃었다고 내 삶이 끝난 것은 아니고, 당장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사정도 못 됐다.
서울에 도착해 인천공항에 가기 전 잠깐 일했던 가구설치업 사장님에게 연락해 다시 일하고 싶다고 했다. 퇴사가 결정되기 전부터 사장님이 다시 가구 설치 일을 해보라고 조언했는데, 나는 머뭇거렸다. 어쩌면 기적이 일어나 공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기적은 없었다. 그저 꿈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모든 게 내 잘못은 아니라고 부질없이 위로하며 급한 대로 일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덧붙임. 12월11일, 공항을 떠난 지 6개월이 지났다. 코로나19 확산은 더 거세졌고, 공항으로 돌아갈 길은 더 흐릿해졌다. 긴 미래를 생각해야 했다. 지금은 자동차정비 일을 하면서 자동차정비 기능사 자격증 공부를 한다. 그러면서도 미련을 놓지 못했다. 공항이 정상화하고 다시 일할 수 있게 된다면 주저 없이 공항으로 달려갈 것 같다. 지금은 항공정비사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상관없다. 꿈을 포기한 게 아니라 잠깐 멈춘 것뿐이다, 사는 건 롤러코스터 같아서 한없이 떨어지는 것 같아도 다시 오를 때가 올 것이다, 무너질 것 같은 날, 혼자서 마음을 다잡는다.
한지완 인천공항 지상조업사 해고노동자
*한지완씨는 4월 ‘넙디마을의 젊은이들 “왜 꿈을 꿨을까”’(제1308호), 9월 ‘코로나에 감염된 경제…그때와 같은, 어쩌면 더 가혹한’(제1329호) 기사에서 코로나19로 고용 위기에 놓인 인천공항 청년 비정규직 이야기를 <한겨레21>에 들려줬습니다. 당시 기사에는 하덕민이란 가명을 썼습니다. “좀더 많은 분이 공감하고 같이 힘내면 좋겠다”며 일기와 함께 실명을 밝히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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