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고개 숙이고 눈물만 흘린 2020년은 아니었다. 우리 삶을 더 높고 밝은 곳으로 밀어올리기 위한 싸움 또한 지속됐다. 장애나 성적 지향, 정치 성향, 종교 등을 이유로 한 어떤 차별도 허용하지 말자며 ‘차별금지법’을,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하자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도입하려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여성을 무자비한 착취 대상으로 삼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범인들을 사법의 심판대에 올렸다.
고난과 희망이 교차한 2020년, <한겨레21> 독자에게 생생한 정보를 전한 취재원과 필자 19명이 ‘올해의 하루’를 일기 형식으로 보내왔다. _편집자주
간질간질하니 미치겠다. 머리가 길어져 자꾸 목이 간지럽다. 구레나룻도 길다. 중2 딸내미는 “고이즈미 같아”라고 해댄다. 어디서 봤는지, 전 일본 총리를 닮았단다. 애엄마도 “그렇지? 똑같지?”라며 낄낄댄다.
머리를 깎은 지 석 달이 넘었다. 보통 한 달에 한 번은 깎는데, 방학이라고 미루던 차에 코로나19가 퍼져 이발관에 가기가 찜찜했다. 3월 들어, 1~2월 휴가철에 해외여행을 갔다가 돌아온 사람과 가족 사이에 확진자가 잇따랐다. 오늘 첫 사망자가 나와 뉴스는 온통 난리다. 확진자는 104명.
콧털깎이로 구레나룻을 좀 깎다 말았다. 혼자서 투덜대니 딸내미가 물었다.
“아빠, 내가 깎아줄까?”
“네가? 머리 깎을 줄 알아?”
“유튜브에서 봤어. 쉽던데.”
딸은 한 번도 내 머리를 깎아준 적이 없다. 다른 사람 머리를 깎아준 적도 없다. 케이(K)팝과 예능 프로그램만 보던 애가 유튜브 몇 번 봤다고 머리를 깎아주겠다니…. 그런데 덜컥 이렇게 말해버렸다.
“그래, 깎자.”
도저히 못 견디겠다. 어차피 코로나 탓에 학교는 내일부터 4월5일까지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길어질 게 뻔하다. 머리 모양이 좀 이상한들 볼 사람도 없다.
“진짜 깎으려고?”
그제야 애 엄마도 킥킥댄다. 그런데 무슨 가위로 깎나? 며칠 전부터 휴교라 집에만 있던 딸은 신이 났다. 먼저 고이즈미 느낌의 구레나룻부터 자르기로 했다. 키친타월을 놓고 세면대 옆에 머리를 내밀었다. 새치와 검은 머리가 떨어졌다. ㅋㅋㅋ 딸내미가 웃어댄다.
“야, 똑바로 하고 있지?”
“가만있어봐. 그런데 생각보다 잘 안 잘리네….”
“뭐?”
불안하다. 거울을 쳐다봤다.
“오!”
생각보다 잘 나왔다. 이제 겨우 몇 번 가위질했는데 괜찮아 보인다.
“역시, 우리 딸내미!”
딸은 손재주가 좋다. 아홉 살 때 털실로 인형 만들기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집 앞 수공예점에서 수업을 듣더니, 그럴듯한 사슴과 코끼리를 만들어 왔다. 마치 사진처럼 자로 재가며 판박이처럼 그림도 똑같이 그려낸다. 그래도 딸이 내 머리를 깎아줄 만큼 크다니….
머리를 집에서 깎은 건 40년 전 초등학생 때가 마지막이다. 어릴 때는 시골 마을회관에 있던 이발관에서 의자 위에 판때기를 걸치고 앉았다. 그러면 하얀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이발사가 머리를 깎았다. 끝나면 비누 거품을 내서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쓱쓱 긁다가 뜨거운 물에 감겨주는 게 그렇게 시원하고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말했던 게 기억난다.
“요새 머리 깎는 미용기구가 나왔다는데… 우리도 사볼까?”
엄마는 사람들이 그러는데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그냥 커트기로 쭉쭉 아래로 빗으면 잘 잘린다고 했다. 그때 한창 바가지머리를 하고 다니던 친구가 많았다. 시골의 없는 집에서 6남매를 키우던 우리 형편에 이발비가 엄마에게는 비쌌을 것이다. 그 미용세트에 가위가 들어 있었는지 아니면 별도였는지 기억은 없지만, 엄마는 세 살 위 누나의 머리를 바가지처럼 돌려 깎았다. 엄마는 “됐다. 이쁘네”라고 했지만, 분명히 어색했다.
더 기억이 없다. 몇 번을 깎았는지…. 마당의 짚단 옆에서 보자기를 두르고 앉았던 건 기억난다. 그리고 그 분홍색 커트기를 엄마가 빗어내릴 때마다 쓱쓱 머리가 잘렸다. 몇 번 그렇게 머리를 깎은 뒤 나는 ‘아아…’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척척 머리를 잘 자르던 그 커트기가 언제부터인가 슬슬 녹이 슬더니, 머리는 안 잘리고 내 머리가 함께 당겨졌다. 그러다 나는 중학교에 들어갔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면사무소 옆 이발관에서 머리를 깎았다. 그 아저씨도 머리를 시원하게 감겨줬다. 내 코밑수염도 면도해줬다.
엄마가 머리를 깎아주던 그때처럼 나는 딸이 그다지 미덥지 않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구레나룻은 대충 깎았는데 뒷머리는 어쩌지…. 바닥에 자꾸 머리카락이 떨어지고…. 코털용 가위로는 안 되겠다.
“다른 가위 없냐?”
딸내미가 학교 수업 때 쓰는 문구용 가위를 들고 왔다. 손잡이가 파랗다. 어차피 다른 가위도 없고 부엌용 가위도 쓰지 못한다.
“잘 잘려.”
나는 아예 욕조 안에 쭈그려 앉았다. 몸에 두를 보자기가 마땅찮고 또 보자기에 묻는 머리카락은 어쩌랴. 그래서 웃통을 벗었다. 딸내미 앞에 팬티만 달랑 입고 앉을 수도 없어 반바지를 걸쳤다. 삐쩍 마른 내 엉덩이뼈가 욕조 바닥에 닿아 아팠다.
“잘 깎고 있는 거 맞지?”
나는 불안한데 딸내미는 또 낄낄댄다.
“아빠, 나 봐봐. 왼쪽이랑 오른쪽이랑 좀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딸내미는 손이 아프다고 했다. 문구용 가위에 손을 집어넣고 30분 넘게 그러고 있으니…. 욕실은 아직 추웠다. 히터를 안으로 가져왔다.
“문 닫아.”
구경한다고 와서는 화장실 문을 열어놓고 간 아내에게 소리쳤다. 틀어놓은 음악은 문을 닫으니 와이파이가 잘 안 돼서 끊어졌다 말았다 한다. 아직 안 끝났다.
“뒤에 간질거리니까 팍팍 잘라. 위로 올려, 알았지?”
그렇게 거의 1시간을 쭈그려 앉았더니, 더 못 견디겠다.
“거울 갖고 와봐.”
역시!
“오! 좋아, 훌륭한데! 앞으로도 계속 깎자. 이발관 안 가도 되겠어.”
왼쪽 머리가 살짝 파먹은 것 같기도 했지만 이만하면 충분했다. 지난번에 내 머리를 일자로 깎아 올려버렸던 이발사 보조에 비하면 수준급이었다. 엄마가 깎았던 것보다 훨씬 더 세련됐다.
그날 그렇게 처음으로 딸내미가 내 머리를 깎은 뒤, 그사이 내 머리를 세 번이나 더 깎았다. 하루에 확진자 6500명, 사망자가 150명을 넘던 6월 최악의 겨울이 지나갔다. 봄은 짧았다. 아직 하루에 확진자 1500명, 사망자는 30명 안팎인데, 12월 들어 공원의 수영장이 문을 열었다. 1~2월 여름휴가철을 앞두고 최근 다시 2단계로 방역이 강화됐다. 주말에는 예전처럼 허가증을 받아야 밖에 나갈 수 있다.
그사이 칠레로 떠날 때 여섯 살이던 딸은 제 엄마보다 키가 크다. 내 머리를 깎아주던 내 엄마는 이제 혼자서 밥도 못한다. 시골의 마을회관은 문을 닫아, 화투 치는 노인네들을 곁에서 구경하지 못한 지 1년이 돼간다. 집에서 텔레비전만 보던 엄마를 누나들이 미장원에 데리고 갔다. 백발의 머리를 예쁘게 자른 엄마 사진을 얼마 전 누나가 보내왔다.
산티아고(칠레)=김순배 칠레센트랄대학교 비교한국학연구소장
*김순배 소장은 통권 제1315·1316호 표지이야기 ‘코로나 뉴노멀’에 칠레 현지 소식을 담은 글 ‘통행증 없인 집 앞 가게도 통행불가’를 기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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