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가 산화한 지 50년이 됐다. 반백년이 지나는 동안 한국의 노동조건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정부가 ‘노동존중 사회’를 선언하고 3년이 지난 지금, 노동자가 일터에서 안전하게 일하고, 임금을 착취당하지 않으며, 전태일이 애타게 부르짖던 근로기준법의 보호 아래 산다고 보는 이는 얼마나 될까.
이런 의문을 품고 11개 언론사 기자 12명과 문인, 노동·인권 운동가 등이 모여 신문을 만들었다. 제호가 <전태일50>이다. <한겨레21>은 이 가운데 전태일 정신을 이어받아 언론·문학·인권의 현장에서 각각 수십년간 현장을 지키며 노동에 대한 곡진한 애정을 잃지 않은 세 글쟁이의 글을 받아 싣는다. 우선 1970년 11월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듣고 당시 대학생 신분으로 서울 동숭동 거리를 울며 걷던 홍세화 <전태일50> 편집위원장이 50년 세월을 돌아보며 글을 썼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은 전태일과 어머니 이소선씨가 나누는 가상 대화를, 송경동 시인은 1970년대 이소선씨에서 시작해 2018년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산업재해로 숨진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정리했다._편집자주
1970년 11월13일. 우리는 비슷한 연배였고, 몸도 가까이 있었다.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과 동숭동 대학로, 물리적 거리는 지척이었으나 사회적 거리는 아주 멀었다. 당시 대학생들은 박정희 독재 반대와 교련 반대 투쟁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 노동 청년이 근로기준법과 함께 자신을 불태워 산화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에게 대학생 친구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귀에 쟁쟁한 울림이 끝없이 반복됐다. 현장을 찾아가는 길, 주먹으로 연신 훔쳐야 했던 눈물은 통한과 자성의 그것이었고, 사회적 거리를 물리적 거리만큼 가까이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알아야 했다. 폭압적인 독재는 수단일 뿐 궁극적 목적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근로기준법조차 지키지 않는 독재체제도 극복해야 할 과제였지만, 그 뒤에 노동 착취와 수탈의 자본주의 체제가 숨어 있다는 것을. 그러나 알지 못했다. 대학생이라면서 자본주의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점을 알아차렸을 때의 낭패감이란! 학습해야 했다. 용접기술을 배우겠다고 나서기도 했고 탄광을 찾아가기도 했다. 물론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은 서점에 넘쳐나도 사람들이 읽지 않지만 그땐 자본주의 비판서를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고서점을 뒤져 해방 직후에 출판됐던 카를 카우츠키의 책을 찾았으나 번역이 조악한데다 개념도 생소해 이해되지 않았다. 이와나미서점에서 나온 <정치경제학> <공산당 선언>을 읽겠다고 일본어 공부를 시작한 친구도 있었다. 아직 복사기가 없던 시절, 노트에 깨알같이 옮겨 쓴 글을 몇몇이 돌려 읽었다. 아직은 개별 차원에 머물렀지만, “철학은 프롤레타리아한테서 물질적 무기”를, “프롤레타리아는 철학에서 정신적 무기를 발견(마르크스)”하는 노학연대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어머니, 내가 3분 있다 죽을지 10분 있다 죽을지 모르니… 내가 말하는 것 잘 듣고 엄마 꼭 들어주세요. 학생들하고 노동자들하고 합해서 싸워야지, 따로따로 하면 절대로 안 돼요….” 그렇게 전태일은, 근로기준법과 함께 “내 죽음 헛되이 말라”며 산화한 그의 불꽃은, 젊은 가슴들을 타오르게 한 프로메테우스의 불이었다.
폭압적 박정희-전두환 독재체제는 완강했다. 80년 광주항쟁이 분수령이었고 마침내 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 투쟁은 중대한 변곡점을 찍었다. 그 뒤에도 수구세력은 과거로 돌아가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 지난한 과정에서 수많은 학생과 노동자가 고문당하고 투옥됐고 산화했다.
“내가 부탁하는 거 꼭 들어주겠다고 크게 한 번 대답해봐요.” 피를 콸콸 흘리며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아들의 요구에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네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라고 응답했던 이소선 어머니는 180번 구류 처분을 당했고 3년 넘는 동안 옥살이했다.
민주주의에 완성이라는 것은 없다. 민주주의의 경계선은 우리가 다가갈 때마다 저 멀리 물러난다. 우리 몸이 거하는 모든 곳-일터, 배움터, 집-에서 자유로우면서 자율적인 주체가 되는 길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일터는 인간의 존재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몸 자리이므로 일터에서의 해방은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 지점이 된다. 곧 노동해방이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멀고도 먼 것이다. 가령 영화 <1987>은 6월에 끝난다. 1987년에서 노동자 대투쟁이 펼쳐졌던 7·8·9월을 소거한 이 영화가 민주화와 노동 사이 괴리를 드러냈다면,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는 말은 노동에 대한 민주화의 한계를 솔직히 고백한 것이었다.
실상 이 땅의 민주화는 노동 분할과 배제의 신자유주의를 동반했다. 노동을 분화, 위계화하여 상층(대기업 정규직)은 포섭하고, 하층(비정규직)은 차별, 배제하는 것이다. 더는 “노동자는 하나”가 아니라 단결이 무너졌고, 차별이 제도화되면서 연대도 사라져갔다. 배제된 노동자들은 타워크레인에, 건물 옥상에, 한강 다리 고공 난간에, 광고탑과 공장 굴뚝에 이르기까지 올라갈 곳이 있으면 어디든 올라갔다. 그렇게 높이 올라가야 모습이라도 보일 수 있는 듯이. 다시 사회 불의에 맞선 노동자들이 전태일 뒤를 따랐고 전태일 곁에 묻혔다.
민주화를 비웃듯 노동 관련 법은 여전히 “힘센 자의 권리”(크로폿킨)로 남아 있다. 5인 미만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사업장에는 50년 전에 전태일이 지키라고 외쳤던 근로기준법조차 적용되지 않는다. 수많은 간접고용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 플랫폼노동자, 그리고 공무원과 교사는 노동기본권에서 배제된 채다. 거의 모든 파업을 불법화하여 손배, 가압류로 노동자 생존을 옥죄는 반면, 산업재해로 매년 2천 명 이상이 일터에서 죽지만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은 미뤄지고 있다. 전태일 열사에게 국가 최고훈장을 수여한다는 얘기가 들린다. 제발이지 공약을 지키고 법을 개정한 뒤에나 추진하라.
40년 전 앙드레 고르에게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을 쓰게 했던 자동화, 정보화, 기계화의 단계를 넘어 4차 산업혁명을 말하고 있다. 인공두뇌, 로봇, 플랫폼 자본주의, 알고리즘… 노동의 지위는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추락하고 있다. 고용 없는 저성장 시대, 단결도 연대도 기대하기 어려운 비정규직, 프레카리아트(저임금·저숙련 노동에 시달리는 불안정노동 무산계급)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전태일의 무덤 앞에서 이 질문을 던지고 또 던져야 했다.
그래도 ‘노동존중사회’를 말하고 있지 않으냐고? 하지만 분명히 하자. 노동이 실제로 존중받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질문을 제기해야 하지만, 노동이 존중받는다고 할 때 노동은 객체이지 주체가 아니다. 다시금 강조하건대, 노동은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해방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기울어진 운동장’은 자본과 노동 계급 간 세력관계에 근본적인 변화가 오지 않는 한 바뀌지 않는다. 문제의 심각성은 우리 대부분이 몸은 노동자이지만 의식은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존재로서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의한 개별화된 개인을 구성할 뿐이고, 그들의 존재조건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다. 계급을 구성하지 못한다는 단순명료한 이유로 정치적 대표를 갖지 못한다.” 오늘 한국 노동자 대부분의 모습이 마르크스의 말 그대로 아닌가.
그람시가 강조한 문화적 헤게모니는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명제를 간단히 왜곡한다. 그에 따르면, 산업사회는 노동자들 정신에 ‘가짜 의식’을 주입할 목적을 가진 문화적 헤게모니 수단을 갖고 있다. 학교, 정당, 교회, 매스미디어 등이 그것이다. 오늘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세계를 채우는 매스미디어는 대부분 정치인, 연예인 등 유명인의 서사와 발언, 신변잡기로 꾸며지고, 노동자와 서민은 비극적 사건의 희생자가 되었을 때만 등장한다. 그것도 숫자로만. 서양 격언에도 있듯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도 없다(Out of sight, out of mind). 사람들의 감정이입도 아래가 아닌 위를 향한다. 전태일의 풀빵이 상징하는 연대 정신은 노동과 진보의 중요한 덕목이다. 계급의식이 없다면 감정이입을 통한 연대 정신이라도 기대해야 하는데, 그조차 상층에로의 일방으로만 이뤄진다. “우리가 김용균이다!”와 “우리가 조국이다!”를 비교해보라.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자. 나는 초·중·고에 두루 있는 사회 교과목에서 자본주의에 대해 공부한 게 거의 없다는 점을 알고 있는가. 우리가 자본주의사회에 살고 있다면 사회 시간에 가장 중요하게 공부해야 할 게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16-14-13-12-10-8의 숫자 나열에서 로또 번호를 떠올리는 대신 자본주의체제 아래 노동자에게 요구됐던 하루당 노동시간의 개략적인 변화를 읽어낼 줄 아는가. 나는 “기업 하기 좋은 나라!”라는 구호에 “일하기 좋은 나라!”라고 받아칠 줄 아는가. 그렇지 않다면 노동자인 내 안에서 노동은 이미 지고 있다. 단언컨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결코 헤어날 수 없다. 요컨대 진보정치든 노동운동, 교육운동을 비롯한 시민사회운동이든 그 궁극적 목표를 노동과 자본 계급 사이 세력관계에 변화를 이끄는 데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쉬러 간다네…”(<전태일 평전>에서>)
반세기를 더 살아 초췌하게 늙은 몸이건만 떨리고 가슴이 저며온다. 무슨 말을 덧붙일 것인가. “나의 나인 그대들”이 오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며 프레카리아트라고 말하는 것조차 사족에 지나지 않을 것임에.
글 홍세화 <전태일50> 편집위원장,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표지이야기-전태일 50주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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