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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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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가장 많은 목숨을 살린 사람

노동자 목숨을 파리 목숨 아는 세상에서 더 죽을 순 없다, 송경동 시인이 쓴 이소선의 ‘여러 목숨 살린 삶’
등록 2020-11-07 23:33 수정 2020-11-13 15:03
1990년 서울 안암동 고려대에서 열린 ‘전태일 20주기 추모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석한 이소선씨가 연단에 올라 발언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1990년 서울 안암동 고려대에서 열린 ‘전태일 20주기 추모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석한 이소선씨가 연단에 올라 발언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전태일이 50년 전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자기 몸을 불사르며 바란 것은 노동조건 개선이었다. 당시 10대이던 노동자들은 환기구 하나 없이 먼지 가득한 평화시장 지하 공장에서 폐병과 눈병에 시달리면서도 하루 15시간 넘는 노동을 견뎌야 했다. 전태일 정신은 자신의 차비를 헐어 노동착취에 허덕이던 노동자에게 먹을 것을 사주던 ‘풀빵 정신’이자, 이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청과 언론사를 찾아 호소하고 싸운 ‘불꽃 정신’이기도 하다.
열사가 산화한 지 50년이 됐다. 반백년이 지나는 동안 한국의 노동조건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정부가 ‘노동존중 사회’를 선언하고 3년이 지난 지금, 노동자가 일터에서 안전하게 일하고, 임금을 착취당하지 않으며, 전태일이 애타게 부르짖던 근로기준법의 보호 아래 산다고 보는 이는 얼마나 될까.
이런 의문을 품고 11개 언론사 기자 12명과 문인, 노동·인권 운동가 등이 모여 신문을 만들었다. 제호가 <전태일50>이다. <한겨레21>은 이 가운데 전태일 정신을 이어받아 언론·문학·인권의 현장에서 각각 수십년간 현장을 지키며 노동에 대한 곡진한 애정을 잃지 않은 세 글쟁이의 글을 받아 싣는다. 우선 1970년 11월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듣고 당시 대학생 신분으로 서울 동숭동 거리를 울며 걷던 홍세화 <전태일50> 편집위원장이 50년 세월을 돌아보며 글을 썼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은 전태일과 어머니 이소선씨가 나누는 가상 대화를, 송경동 시인은 1970년대 이소선씨에서 시작해 2018년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산업재해로 숨진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정리했다. _편집자주

“물러가지 않으면 내가 뛰어내려 죽겠다!”

경찰기동대는 건물 안과 맞은편 건물 옥상 등으로 밀고 들어왔다. 민종덕은 결국 뛰어내려 척추가 부러진 채 병원으로 이송됐다. 이어서 신승철이 “물러가라”며 깨진 유리창으로 두 차례 배를 갈랐다. 스무 살 재단보조 박해창은 동맥을 15㎝가량 그었다. 노동자들은 방 안에 있던 종이에 휘발유를 뿌리고 “다 같이 죽자!”고 울부짖었다. “어머니를 모셔와라! 모셔오지 않으면 모두 다 죽어버리겠다.” 이어서 스물한 살 재단보조공 김주삼이 유리 조각으로 배를 몇 차례 그었고, 전태일의 여동생인 스물다섯 전순옥이 웃통을 벗어 아래로 던지고 창문으로 올라가 땅으로 뛰어내렸다. 전순옥의 다리 한쪽을 간신히 잡고 늘어진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그를 끌어올렸다. 이어서 열아홉 살 미싱보조 임미경이 웃통을 벗고 유리 조각을 집어들고 다른 창문 위로 뛰어 올라갔다. “제2의 전태일은 여자가 되어야 한다. 딴 사람 희생할 것 없이 내가 죽겠다!”고 소리치면서 “놔요, 놔요”라며 울부짖었다.

1977년 9월9일이었다. 모든 집회, 시위, 결사의 자유가 봉쇄된 긴급조치 아래 겨울공화국 시절, 박정희 정권은 청계피복노조의 노동교실을 강제로 폐쇄하고, 이소선을 구속했다. “노동교실을 돌려달라!” “어머니를 석방하라!” 그들은 전태일의 영정이 걸린 노동교실과,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이었던 청계피복노조, 그리고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청계천 어린 동심들의 어머니로,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로 다시 태어난 이소선을 다시 빼앗길 수 없었다.

살아서 싸워야지

“영진이 어딨느냐. 영진아… 나, 태일이 엄마다.”

“정말입니까. 전태일 어머니 맞습니까.”

“어머니, 나는 운 좋은 놈입니다.”

“지금 그 꼴을 하고 있는데 뭐가 운이 좋다는 거냐?”

“어머니를 만났잖아요. 태일이 형한테 가면 어머니께서 노동자를 위해 살아오신 얘기 전해드릴게요.”

“살아서 싸워야지, 태일이한테 뭐 하러 가냐.”

1986년 3월17일 구로공단 신흥정밀에서 일하던 박영진과 동료 여덟 명이 점심시간 식당 구내에서 비참한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유인물을 낭독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금세 구사대와 전투경찰이 달려왔다. “열 셀 때까지 물러서지 않으면 분신하겠다”고 경고했지만, 경찰들은 “어서 죽어봐!”라고 비웃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아홉, 열!” 불길이 타올랐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노동삼권 보장하라!” 스물일곱. 구두닦이, 신문배달원으로 살다 노동자가 되었던 박영진이 ‘태일이 형한테 가면 어머니께서 노동자를 위해 살아오신 얘기를 전해주겠다’고 한다. 이런 눈물겨운 ‘인편’이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박영진은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 묘소 바로 아래에 묻혔다.

이소선씨가 성동구치소에 들어갔을 당시 전태일 열사 동생 순덕씨가 보낸 편지. 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이소선씨가 성동구치소에 들어갔을 당시 전태일 열사 동생 순덕씨가 보낸 편지. 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죽더라도 타고 싶었던 희망버스

“위험한 물건 내놔라.”

“없어요, 어머니.”

“저건 뭐냐? 죽기를 작정했냐.”

옥상 농성장 옆 폐회로텔레비전(CCTV) 쇠기둥에 매어둔 목 올가미였다. 어머니는 칼을 찾아 들고 단숨에 올가미를 쓱쓱 베어버렸다.

“죽는 건 태일이 하나로 족해. 이년들아, 살아서 싸워.”

2008년 8월14일. ‘낼부터 나오지 마시오. 사유: 근무 중 잡담’ 문자 하나면 끝이던 기륭전자 비정규직 농성장에 연로한 어머니께서 불쑥 쳐들어오셨다. 김소연, 유흥희는 소복을 입은 채 예의 목줄을 걸어두고 60여 일째 단식농성 중이었다. 전태일 열사 사후 38년이 지난 때였지만 노동자들 삶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국어사전에도 없던 말 ‘비정규직’으로 내몰린 이가 당시 960만 명, 지금은 1100만 명이다. 단식은 96일째에 이르러서야 수많은 이의 분노와 통곡 속에 중단됐다.

“진숙아, 내려와라. 내려와서 나하고 함께 싸우자. 박창수가 죽고 김주익이 죽고 곽재규가 죽어간 그곳에서 너까지 죽는 것 나는 못 본다. 제발 내려와라!”

“어머니! 열여덟 살에 하루 12시간 13시간, 어떤 때는 잠자는 시간도 없이 일주일씩 곱빼기 철야를 하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뭘 알았겠습니까? 불량 냈다고 조장한테 따귀를 맞고도 기숙사 베갯잇 젖도록 우는 것밖에 모르던 아이가 노동법을 알았겠습니까? 권리가 뭔지를 알았겠습니까? 어머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나 지금이나 노동자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아는 저들에게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임을 꼭 보여주겠습니다.”

2008년 친구 김주익이 목을 매단 부산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에 올라가 309일을 버티던 김진숙. 행상, 식모, 미싱공, 버스안내양을 거쳐 스물한 살에 용접공으로 입사한 그. 스물여섯에 해고되고 대공분실 세 번, 징역 두 번, 수배생활 5년 하니 쉰두 살이더라는 그. 어머니는 “내가 거기 가서 죽더라도 가야겠다”고 병상에서 고집을 부리셨지만 끝내 일어나실 수 없었다. “영정으로라도 소망이시던 희망버스를 태워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수배 중이던 사무실에 작은 분향소를 차리고 좋아하시던 담배와 소주 한 잔 올려드리곤 사람들에게 전화하기 시작했다. 김진숙에게 가는 ‘어머니의 희망버스’였다.

네가 죽은 날 나도 죽었어

“엄마, 힘들어.”

“진즉 말하지. 힘들면 그만둬도 돼. 그 회사 나오면 안 될까?”

“아니야. 일단 여기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볼게.”

2018년 12월11일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스물네 살 김용균은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에 말려 몸통과 머리가 분리된 채 새벽 3시10분 발견됐다. 월급은 간신히 법정 최저임금. ‘2인 1조’ 근무수칙은 머나먼 말. 랜턴 하나 지급되지 않았다. 유품은 컵라면 세 개. “이게 나라입니까…. 내가 너야. 네가 죽임을 당한 날 나도 죽었어.” 그의 어머니 김미숙은 62일 동안 차가운 냉동고를 지키며 싸웠다. 1년마다 2400여 명이 일수 찍듯 죽어가는데 대부분이 ‘비정규직’인 것도 알게 되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스물둘 황유미를 잃은 황상기 아버지, 열아홉 현장실습생 이민호를 잃은 이상영 아버지, 세월호 유가족분들이 찾아와 “이겨내야 한다”고 꼭 껴안아주었다. 그 캄캄한 투쟁이 28년 만에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을 끌어냈다. 김용균의 동료들 3천여 명은 정규직이 되었다. 김미숙은 그 뒤 천몇백 번째 이소선이 되어 눈물겨운 전국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오늘을 살고 있다.

송경동 시인

*일부 내용은 <전태일 평전>과 <이소선 평전> 등에서 빌려왔습니다.

*표지이야기-전태일 50주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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