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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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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사회학] 자유주의자들, 마스크를 벗다

‘재난을 이용하는 국가를 극복하자’는 주권시민의 등장
등록 2020-10-17 16:21 수정 2020-10-21 08:10
2020년 10월6일 오후 경찰이 서울 광화문광장 집회·시위에 대비해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2020년 10월6일 오후 경찰이 서울 광화문광장 집회·시위에 대비해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보수 세력의 개천절 시위를 막기 위해 등장한 ‘차벽’을 두고 논란이 벌어진다. 개천절 시위와 거리를 두는 모양을 취하던 보수야당들은 물론이고 몇몇 진보적 단체와 정당, 인사까지 시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조처라며 우려를 표했다. 옹호하는 쪽에선 이미 광복절 시위로 홍역을 치른 터라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방역을 위해 불가피한 일이라고 말 한다.

초유의 사건, 초유의 대처법

재난은 사회를 양분하고 쟁투 상태로 몰아넣는다. 중국처럼 시민사회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노골적인 통제 사회에선 사회 분열이 공개적으로 표출될 수 없겠지만, 대다수 민주주의국가에서 재난은 사회를 둘로 갈라놓고 깊은 분열 상태로 만든다. 지금 코로나19 국면에서 방역을 위해 집회와 시위를 제한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두고, 한국 사회가 양분돼 분열하는 것은 이런 점에선 ‘자연스러운’ 일이다.

분열의 핵심에 재난 발생 이후 무엇을 ‘사건’으로 보고 무엇이 ‘사고’인지를 둘러싼 시각 차이가 있다. 사건은 시간을 이전과 이후로 나누며 사람들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단절한다. 사건은 몇몇 특수한 사람이 아니라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보편적인 일이며,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변화가 불가피하다.

반면 사고는 우발적인 것이며 지나가는 것이다. 인간사에서 사고는 언제든 일어난다. 사고를 당한 사람들은 불운을 겪는 것이지만 그건 냉정하게 말해 다른 사람들의 삶과는 무관해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시간은 이전과 이후로 단절되는 게 아니라 사고가 지속되는 그 순간만 예외적이고 사고가 정리되면 이전 삶이 회복된다.

감염병 전문가와 방역 당국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코로나19는 ‘사건’이다. 그것도 100여 년 전에 있던 스페인독감과 비교될 정도로 인류가 직면한 전 지구적인 위기로서 대사건이다. 초유의 사건이니만큼 초유의 대처법이 필요하다. 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이전 삶이 제한되는 건 불가피하다. 모두가 이전 삶의 방식을 상당히 포기하는 것을 감수해야 하고, 그것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시민의 협조이자 의무라고 강조한다. 이런 초유의 사건에 맞서려는 방역을 방해하는 것이야말로 ‘사고’를 치는 거라고 비판한다.

건너편에 코로나19를 심한 감기 정도로 여기며 ‘사고’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부터, ‘사건’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방역을 ‘빌미로’ 시민권을 제한하는 게 더 큰 사건이라고 보는 사람들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이들은 코로나19 초창기에는 얼떨결에 시키는 대로 도시 봉쇄와 전면적인 권리 제한에 순순히 따랐지만, 더는 그런 시민권 제한에 순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들에게는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통제와 제한이 오히려 근대사회의 주권자인 시민의 삶을 붕괴시키는 대사건이 된다. 여기에 순응하면 이전 삶과 이후 삶이 확연히 달라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결사적으로 저항한다.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코로나19 방역 통제에 항의하는 집회를 경찰이 막아서고 있다. REUTERS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코로나19 방역 통제에 항의하는 집회를 경찰이 막아서고 있다. REUTERS


탈주술화, 가짜뉴스와의 싸움

이처럼 재난은 언제나 정치적 사건이었다. 어느 시대, 어떤 사회에서나 재난이 일어나면 그 사회는 재난을 사고로 여기는 쪽과 사건으로 여기는 쪽으로 분열해 쟁투했고, 어느 쪽이 승리하는지에 따라 그 사회가 나아갈 방향이 완전히 다르게 갈라지곤 했다. 이에 관한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세월호 사건일 텐데,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이후 이어진 박근혜 정권의 실정과 국정 농단 발각으로 정권이 붕괴했다. 박근혜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세월호가 ‘사건’이 아니라 그로부터 시작해 박근혜 정권이 붕괴한 ‘사건’으로 여겨졌다. 이들이 끈질기게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집회를 하는 이유다.

전자와 후자의 싸움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해도, 사회가 이 문제를 잘 다루려면 정치적 입장을 떠나 재난의 원인과 방향을 둘러싼 더 많고 자세한 사실을 찾아내고 신중하게 대처법을 모색하는 쪽이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종교적 믿음이나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사실에 접근하는 과학적 태도가 확고해지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재난 극복에서는 탈주술화가 중요하다. 지금 상황에서는 아마 가짜뉴스와의 싸움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 코로나19와 관련해 전 지구적으로 나타나는 흥미로운 흐름이 있다. 감염병이나 기후위기와 같은 재난보다 그것에 대처하는 국가를 일체 불신하며 개인/시민의 권리를 절대적으로 신성시하는 세력의 등장과 확산이다. 이들에게는 재난 극복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재난을 이용하는 인위적 조직인 국가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구에서 이들은 스스로를 ‘주권시민’이라고 한다.

주권시민을 자칭하는 이들의 스펙트럼은 극우부터 극단적 자유주의자까지 다양하며, 그에 따라 ‘국가’의 의미도 폭넓다. 극우는 ‘주권’과 ‘시민적 권리’를 내세우지만 이들이 목표로 삼는 건 국가가 아니라 권력을 쥔 정권인 경우가 많다. 이들에게 중요한 건, 오로지 정권에 반대하고 정권을 타도하는 일이다. 이들은 재난에 맞서려는 국가의 모든 노력을 오히려 재난으로 폭로하기 위해 가짜뉴스를 만들고 퍼뜨리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이런 경우는 진보 세력에도 있지만 이들은 스스로를 주권시민이라고 하지 않는다.

더 주목해야 하는 쪽은 소신을 가진 극단적 자유주의자다. 이들은 정권과 상관없이 일체의 국가 개입에 반대한다. 좁은 의미에서 주권시민이라고 부르는 세력은 이들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국가를 불신하고 재난에 맞서는 국가의 모든 시도를 권력을 위한 책동으로 여기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이용해 음모론을 급속도로 퍼뜨린다. 또한 정권의 음모이건 국가의 음모이건 자신들을 그 음모를 폭로하며 진실을 아는 극소수의 ‘선지자’로 생각한다.

육체적 생명보다 중요한 정치적 생명

외신 보도를 종합해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례를 보면, 이들은 경찰 검문소를 무시하며 뚫고 지나가거나 자기 이름이나 주소를 알려주는 것을 거부한다. 마스크 쓰라는 요구를 무시하고 이를 의도적으로 거부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저항’을 동영상으로 찍어 SNS에 올리며 다른 사람들의 참여를 독려한다. 경찰과 논쟁하는 것을 넘어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영연방 국가를 중심으로 국경을 넘어 서로 격려하고 영감을 주고 연결하기도 한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서는 국왕의 폭정에 맞서 시민의 자유를 선언한 대헌장(마그나카르타)이라고 한다.

이들이 왜 국가에 저항하는지는 이들이 자신을 부르는 다른 이름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을 주권시민 외에 ‘살아 있는 사람’(Living Person) 혹은 ‘자연 인간’(Natural Person)이라고도 한다. 이들에게 국가는 살아 있는 것과 자연에 반하는 것, 즉 사람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악’이다.

여기서 이들이 말하는 자연 상태의 생명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드러난다. 방역이란 이름으로 국가가 지켜주겠다고 말하는 그 육체적 생명이 아니다. 이들에게 코로나19로부터 국가가 보호하겠다고 하는 육체적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방어를 위해 국가가 제한하고 통제하는 정치적 생명이다. 이 정치적 생명의 이름이 바로 ‘자유’다. 자유 없는 생명은 생명이 아니고 죽은 목숨이다.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코로라19라는 바이러스에 의해 육체적 생명이 위협받는 것이 사건으로서 재난이겠지만, 이들에게는 이것을 빌미로 자유가 제한되는 일이야말로 ‘사건’이다.

시민이 책임을 공유할 수 있도록

전 지구적으로 이 국가에 맞선 주권시민들의 ‘봉기’가 심상찮다. 이들이 요구하는 건 육체적 생계를 넘어 사회적 삶이며, 그 사회적 삶의 핵심은 자유다. 이들의 구호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이다. 나는 주권시민을 자처하는 흐름을 그저 위험한 미치광이들의 등장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들의 주장은 그저 정권에 반대하기만 하는 쪽의 대의명분으로 사용되기 쉽다. 한국에서도 이미 자유와는 거리가 먼 극우들이 ‘자유’란 말을 전면에 내걸었고 개천절 차벽 등장 이후 이런 말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 걱정되는 이유는, 자유에 대한 제한이 길어질수록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적 삶에 대한 불만이 점점 더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방역 당국도 이미 이야기하고 있다. 이 사태가 장기화할 것이라고 말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의 삶이 위축되는 것보다 위험한 것이 없다. 민주주의 자체가 사회적 삶의 활성화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함께 고민을 나누는 인권활동가들은 어떻게 사회적 삶을 제한하고 통제할 것인지가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 시민들의 만남과 사회적 삶을 보장할 수 있는지로 초점을 돌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시민이 책임을 공유하는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유’와 ‘사회적 삶’이 저들의 언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한번 뺏긴 언어는 좀처럼 되찾기 힘들다.

엄기호 사회학자

*‘엄기호의 사건의 사회학’은 발생한 뒤에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건’의 종단을 되새기는 칼럼입니다. 2주마다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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