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구독하기

기사 공유 및 설정

목욕관리사가 다시 움직일 수 있도록, 그의 하루를 연대해요

한겨레21-전태일의료센터, ‘일, 낸다 캠페인’
나의 1, 당신의 하루 ①
하루 병원비 2만1천원, 나눌수록 커지는 희망
등록 2026-04-30 21:51 수정 2026-05-06 15:28
생성형 인공지능(AI) 챗지피티에 ‘세신사가 일하는 모습을 스케치로 그려달라’는 명령어를 입력해 만든 일러스트.

생성형 인공지능(AI) 챗지피티에 ‘세신사가 일하는 모습을 스케치로 그려달라’는 명령어를 입력해 만든 일러스트.


전태일의료센터가 동료 시민의 아픈 하루를 함께 지탱하기 위해 ‘일, 낸다 캠페인’을 시작합니다. 이 캠페인은 몸과 마음을 다친 노동자의 ‘하루치 병원비’(2만1천원)를 매달 선결제하는 기부 연대입니다. 내가 낸 ‘1’(일부/하루/노동)로 누군가의 회복을 돕고, 그가 다시 우리 일상을 든든하게 지켜줍니다.

한겨레21은 ‘나의 1, 당신의 하루’를 매달 다른 필진의 시선을 담은 연속 기고로 전합니다. 이 다정한 여정에 ‘일 내는 동료’로 함께해주시길 바랍니다. 일 내는 동료가 되시려면 왼쪽 정보무늬를 찍어주세요. —편집자

‘일, 낸다 캠페인’ 참여 정보무늬

‘일, 낸다 캠페인’ 참여 정보무늬


 

뜨거운 탕에 몸을 푹 담갔다가 나와 세신사의 손길에 몸을 맡긴다. 서걱거리는 이태리타월이 지나간 자리마다 묵은 피로가 허물처럼 벗겨진다. 목욕탕에서 나와 찬 공기를 맞으면 몸 전체에 아직 열기가 살아 있고, 옷을 다시 입을 땐 괜히 기분이 단정해진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왠지 가볍다. 마음의 결까지 매끄러워지는 기분이 든다. 우리에게 세신은 단순히 몸을 씻는 행위를 넘어 고단한 하루를 털어내고 내일을 시작할 힘을 얻는 ‘작은 회복’의 시간이다.

우리는 그 회복을 돕는 이들을 오래도록 ‘때밀이’라 불렀고, 요즘은 ‘세신사’라고 부른다. 얼마 전에야 나는 이 직업의 표준 명칭이 ‘목욕관리사’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름을 안다고 해서 그 삶의 무게를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이 직업군의 상황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개별 목욕탕에 직원으로 고용된 경우도 있지만, 각 사업장과 용역계약을 맺고 일하는 특수고용직 노동자가 많다.

강찬주(62·가명)씨도 30년을 목욕탕에서 보낸 베테랑 목욕관리사다. 그의 손을 거쳐간 사람은 수없이 많다. 그가 만들어낸 개운함을 기억하는 단골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몸이 무너질 때, 그 개운함과는 전혀 다른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닥쳐온 뇌경색 앞에서 30년 경력은 아무런 방패가 되지 못했다.

강씨의 노동은 고됐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습기와 열기 속에서 손님의 등을 밀고, 남들이 다 나간 뒤에는 목욕탕 전체를 관리하고 청소하는 일까지 도맡았다. 2025년 10월, 그가 녹색병원 신경과를 찾았을 때는 이미 왼쪽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안면마비 증상이 나타난 지 20일이나 지난 뒤였다. 처음엔 그저 조금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다며,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 믿고 꾹 참았다고 했다. 하지만 더는 때수건을 쥘 힘조차 남지 않자, 그는 평소 연락도 끊고 지내던 여동생의 번호를 눌렀다. 30년 베테랑 세신사가 몸의 이상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버티는 것’뿐이었다.

진단은 뇌경색이었다. 당장 입원해 집중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의사의 권유에도 그는 입원을 거부했다. 월평균 150만원 남짓한 수입, 저축해둔 돈은 없었다. 얼마가 나올지 모르는 병원비는 그에게 넘을 수 없는 절벽과 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강씨처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고강도 노동을 하는 이들에게 뇌혈관 질환은 업무 연관성이 높다. 그러나 그는 ‘용역계약’을 맺은 특수고용직이었다. 산업재해 신청조차 쉽지 않은 위치다. 국가가 만든 보호망은 그를 비껴갔다. 의료 현장에서 나는 이런 ‘불행의 연쇄’를 목격한다. 어떤 이들에게 병은 하나의 사건으로 끝나지만, 누군가에게는 삶 전체를 잠식하는 과정이 된다.

녹색병원은 이 잔인한 고리를 끊기 위해 금융산업공익재단과 손잡았다. 2021년부터 재단의 기금지원으로 1400여 명을 치료했다. 강씨에게도 치료비 지원이 가능함을 강조하며 “뇌혈관 질환은 초기 집중치료가 중요하다”고 설득했다. 덕분에 그는 신경과 치료를 받고 재활의학과로 전과해 집중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었고, 사회복지팀의 노력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을 신청해 향후 공공복지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갈 길도 열렸다.

녹색병원이 강찬주씨처럼 병원비를 지원받은 노동자 449명을 조사한 결과 비정규직, 일용직, 특수고용직 등이 80%를 넘었다. 이들의 소득에서 의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본래 67%에 달했다. 일단 아프기만 하면 일상을 제대로 살 수 없었다. 하지만 지원 이후 의료비 비중은 3.9%까지 떨어졌다. 평균적으로 본인부담금 대부분을 지원받았다. 치료 이후 73%가 원직장으로 복귀했다. 산재 보험의 복귀율이 절반도 안 되는 것을 고려하면 놀라운 성과다.

이 지점에서 질문이 남는다. “이런 지원이 일회성 사업에 그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이 녹색병원이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을 추진하고, 병원비 선결제 캠페인 ‘일, 낸다’를 시작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우리의 평온한 하루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노동 위에 서 있다. 30년간 타인에게 개운함을 선물해온 강씨, 아이들의 건강한 밥상을 책임지는 학교 급식 조리사 이씨, 골목을 누비는 배달라이더 송씨. 이들이 만든 하루를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면, 이제는 우리가 모여 서로의 멈춰버린 하루를 다시 움직이게 할 차례다.

‘일, 낸다 캠페인’은 동료 시민의 ‘하루치 병원비’ 2만1천원을 우리가 매달 선결제해두자는 제안이다. 내가 내놓은 작은 ‘1’이 모여 누군가의 멈춰버린 하루를 다시 움직이게 한다. 30년간 우리의 묵은때를 밀어주던 강씨의 손에 다시 힘이 돌아오도록, 이제는 우리가 그의 굽은 등을 밀어줄 차례다. 그 다정한 연결이 시작될 때 비로소 우리 모두의 하루도 더 개운해질 수 있을 것이다.


 

임상혁 녹색병원 원장

한겨레 저널리즘
응원으로 지켜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