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표준’.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짧은 시간에 인간 세계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인류의 생활양식은 예전과 똑같은 궤도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이른바 ‘코로나 뉴노멀’ 시대의 개막이다. 무엇보다 인간과 인간의 물리적 접촉은 더 이상 무조건적인 덕목이 아니게 됐다. ‘접촉 축소’라는 시대적 요구는 자동차와 비행기의 이동을 줄게 해 의도치 않은 맑은 하늘과 깨끗한 공기를 안겨줬다. 화석 연료로 지탱하는 지금의 에너지 구조는 더 이상 ‘이대로’를 외칠 수 없는 영역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작은 정부론’에 시달리던 국가는 영역을 확장해나갈 태세다. 코로나19 대응에 미숙함을 드러낸 미국과 중국, 두 국가는 국제적인 지도력을 잃었다. 지(G)2 시대가 저물고 지(G)0 시대가 열렸다.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는 ‘코로나 뉴노멀’이 정의와 평등의 얼굴을 갖게 하기 위해 세계시민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_편집자주
누가 ‘사회는 없다’고 했던가? 코로나19가 휩쓴 지 넉 달 만에 작은 정부, 시장경제, 자율과 개인 책임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처럼 돼버렸다. 사회 공공성과 연대를 복원하지 않으면 모두가 살아남지 못하는 사회, ‘뉴노멀’은 이미 시작됐다.
의료도 마찬가지다. 유럽에서도 효율을 추구하는 적시 생산방식(JIT·Just in time)에 따라 최소한의 병상과 인력만 유지했던 것이 문제였다. 한국에서 유럽을 보고 ‘공공의료의 실패’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현지에서는 오히려 부실해진 공공의료 시스템을 위기의 원인으로 본다. 최근 알려진 바에 따르면 유럽연합(EU)에서 지난 8년간 무려 63번에 걸쳐 회원국에 보건의료 예산 축소와 민영화·아웃소싱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이 수조원 규모의 의료 예산을 긴축하고 공공의료 붕괴를 일으킨 것이 비극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병상 늘리는 영국, 상병수당 확대하는 이탈리아
이에 공공의료 복원이 과제로 부상했다. 영국은 2023년까지 매년 무려 399억파운드(약 60조4500억원)를 쏟아부어 병상을 늘리고 수천 명의 의사와 간호사를 충원하기로 했다. 독일은 중환자실 2만8천 병상을 4만 개까지 늘렸다. 스페인은 아예 개인 병원을 비롯해 모든 민간 병원을 일시 국유화했다.
무상의료도 강화됐다. 안 그래도 아파서 일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소득 보전까지 해주는 유럽이었는데, 이탈리아와 스웨덴 등은 유급휴가와 상병수당을 확대했다. 또 포르투갈은 외국인에게까지 의료보험 혜택을 제공하기로 했다. 약자를 지킴으로써 모두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다.
반면 신자유주의 심장국인 미국은 대혼란을 겪고 있다. 확진 환자가 입원해 치료를 받으면 최대 9천만원의 진료비가 청구되는 나라다. 이에 미국인 10명 중 1명이 치료뿐 아니라 검사도 받지 않겠다고 답했다. 이런 탓에 10만 명 넘는 전세계 최대 사망자가 나온 미국의 미래는 더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의료제도 복원이 이번 대선 최대 이슈가 됐다.
그런데 한국만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다. 미국도 유럽도 아닌 ‘K의료’ 방식이 성공을 낳았다고 축배를 든다. ‘K방역’은 몰라도, 정말 ‘K의료’가 성공인가? 단순 수치로만 따져도 한국의 ‘연령 표준화 치명률’은 2.8%로 일본(1.6%), 포르투갈(2.2%), 독일(2.5%)보다 높다. 환자가 적게 발생했지만 의료 자원을 감당하지 못하고 높은 치명률을 보인 것은 오히려 실패로 보는 것이 맞다. 한국은 공공의료 복원이 그 어느 곳보다 시급하다.
죽음의 사투를 벌였던 환자들과 의료진들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대구에서 3월 초 확진자 2300명이 병상이 없어 집에서 대기했고, 3월 중순까지 75명이 사망했을 때 17명(23%)이 입원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일부 민간 병원을 제외하고는 병상을 내주지 않아 5%의 공공병원에서 대구·경북에서 발생한 환자의 77%를 봐야 했기 때문이다.
원격의료, 민간보험 활성, 개인 의료정보 상업화…
몇 안 되는 공공병원에서 코로나19를 도맡느라 의료는 붕괴했고, 공공의료원에서 밀려난 환자들은 갈 곳을 잃었다. 치료할 곳을 찾지 못해 열이 40도까지 펄펄 끓는데도 방치된 18살 정유엽군은 애석하게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대구에 수많은 간호사들이 자원봉사에 나섰는데도 인력이 부족하고 장비가 없어 환자들을 살리지 못했다고 호소했다. 한 의료진은 방호복이 부족하고 교대 근무자가 없어 방호복을 입은 채 소변을 봐야 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감염 관리가 되고 제때 치료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정부는 생각이 다른 듯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코로나 선거’였던 21대 총선에서 여당은 공공병상 확충 계획을 한 줄도 담지 않았고, 정부의 1·2차 추가경정예산에서도 공공의료 예산이 ‘제로’일 수 있을까? 또 어떻게 인력 대책 없이 ‘덕분에’만 외칠 수 있는가? 평소에도 병상당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3분의 1이 안 되는 수로 살인적 노동을 감당하는 간호사들에게 2차 유행 때 또다시 나와 헌신과 희생을 다하라는 잔혹한 메시지다.
‘아프면 쉬라’는 정부의 생활방역 제1지침에도 한숨만 나온다. OECD 국가 중 상병수당도 유급병가도 없는 유일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반면 자가격리 위반자를 향한 처벌은 강화됐다. 최근 위반자에게 1년이 구형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공공성 회복은커녕 개인 책임과 감시 사회가 ‘뉴노멀’이 된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홍남기 부총리는 나아가 ‘위기를 기회로 삼자’고 했다. 누구의 위기이고 누구의 기회일까? 정부는 ‘방역도 유망 서비스산업’이라며 의료로 돈벌이하자고 한다. 원격의료, 민간보험을 활성화하고, 개인 의료정보를 상업화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삼성생명’을 필두로 ‘삼성헬스’와 ‘갤럭시 워치’가 지배하는 의료체계를 만들자는 것이다. 민간 보험회사가 운동하고 식습관을 관리하면 보험료를 감면하고 못하면 페널티를 주면서 ‘건강관리’를 해주면 우리 모두 안전하고 건강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배달의 민족’이 가입 점포를 쥐락펴락하듯 영리 민간 보험회사가 의료기관을 주무르는 미국식 의료(HMO·Health Maintenance Organization)로 향하는 것이 정말 우리의 길일까?
한국은 이미 부족한 공공의료 탓에 과잉 진료가 판을 치고 재난적 의료비 지출 가구가 OECD 국가 중 가장 많다. 그런데도 정부가 밀어붙이는 정책을 보면, 대재앙이 일어난 사회를 빌미로 기존 권력과 자본이 공공부문에 공격을 가하는 ‘재난 자본주의’ 그 자체다. 반면 공공의료의 복원은 멀기만 하다.
더 멀어진 공공의료 강화
‘포스트 코로나’는 정해진 길이 아니다. 뉴노멀이 지긋지긋한 과거 모순의 강화이지 말란 법은 없다. 하지만 더 이상 사라진 공공병원이, 부족한 인력이, 개인에게 떠넘겨진 사회의 책임이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을 앗아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최근 미국 내 코로나19 사망자 1천 명의 부고를 실은 <뉴욕타임스> 1면은 어떤 설명보다 많은 것을 웅변했다. 우리 주변에도 존재하는 ‘웃음 많은 증조할머니’ ‘신혼 즐길 시간 없던 아내’를 잃지 않기 위해서, 이제 의료 민영화가 아니라 공공의료 복원을 시작해야 한다.
전진한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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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_큰 국가의 귀환
1. 코로나 이후 '큰 국가'가 돌아왔다
2. 국가가 이끄는 시장의 막대한 힘, 막막한 과제
3. 자유 vs 안전 논쟁을 넘어 '코로놉티콘'을 막아라
4. K의료는 없다... 공공의료 복원 시작할 때
5. 도시가 건강해지면 시민도 건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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